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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자크 타티, 우편배달부와 자동차 본문

영화일기

자크 타티, 우편배달부와 자동차

Hulot 2009. 5. 20. 09:47




자크 타티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축제일>은 우편배달부를 주인공으로 모던한 사회의 속도를 그가 어떻게 희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편배달부로 분한 타티는 효율성이 지배하는 어떤 사회의 내면을 질주한다. 제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운송기계를 활용해 우편배달부는 공동체의 감정을 이어주는 편지를 전달한다. 그는 이미 1936년 르네 클레망의 <오른쪽을 조심해>라는 영화에서 우편배달부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후에, 타티는 우편배달부를 주인공으로  <우편배달부 학교>라는 단편을 만들기도 했다. 이 단편은 1943년 무렵, 타티가 비시정권 하에서 독일에의 협력과 망명 사이에서 고민하다, 친구인 극작가 앙리 마르케와 비점령지대인 생 제베르라는 마을에 내려가서 그곳에서 은둔하다 만났던 시골 사람들과의 교감에서 시작됐다. 전쟁이 끝난 후에 타티는 파리로 돌아와 앙리 마르케와 공동으로 1946년에 영화의 각본을 썼고, 단편을 만들었다.


<축제일>은 <우편배달부 학교>의 에피소드를 계승하는 작품으로,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하나는 떠돌이 흥행사들이 마을에 도착해 벌이는 에피소드이고, 다른 하나는 시골의 작은 우체국의 우편배달부 타티가 겪는 우스꽝스런 소동이다. 그는 천막극장에서 상영된 비행기와 첨단 운송기계를 동원한 미국의 합리적 우편시스템에 고무되어 현대적인 시간체계에 적응해 편지를 배달하려 애쓴다. 그는 합리성, 속도와 경쟁을 벌이려 한다.


타티는 이 영화를 1947년 5개월에 걸쳐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비전문적인 마을 주민들로, 놀랍게도 그는 당시 이 영화를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톰슨컬러라는 컬러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다. 실제로 촬영단계에서 타티는 두 대의 카메라로, 하나는 흑백으로 다른 하나는 컬러로 촬영했지만, 컬러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영화 개봉시에는 흑백버전으로 상영하게 됐다(이번 ‘회고전’에서 상영하는 버전은 오랫동안 비밀에 가려져 있었던 컬러버전이다.) 영화는 마을에 흥행사들의 대열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해, 일종의 축제가 벌어지고 이어 그 축제가 종결을 맞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성은 <윌로씨의 휴가>에서 휴가철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방식과 닮았다. 앙드레 바쟁이 말한 ‘시에스타의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 타티의 주된 목표인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무대와 영화의 결합으로도 이채롭다. 영화의 장면들은 어떤 무대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은 롱쇼트로 일관되어 있다. 타티는 화면의 넓은 영역에서 마을 주민들의 모습, 그들의 숨결, 영혼을 지극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성은 코미디에 적합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개그라던가 희극이라는 범주에 완벽하게 포착되지 않는 영상들, 순간적인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 앙리 루소나 라울 두피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는 인간과 사물에의 예찬, 마을의 생생한 풍경과 영혼을 표현하는 것으로 고다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전후 프랑스 영화계에서 나온 최초의 모던한 영화로 손꼽을 수 있겠다.



<축제일>에서 엿보이는 모던한 세계와의 충돌은 1958년작인 <나의 삼촌>에서 보다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영화는 타티의 영화중 가장 위트가 넘치는 영화이자 윌로씨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이다. 타티는 이 영화에서 프랑스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삶이 지닌 비인격성, 무미건조함, 황폐함을 풍자한다. 이제 윌로씨는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대적인 삶의 장치들과 싸운다. 거대한 눈처럼 보이는 창문, 철근으로 만들어진 괴상한 건축물, 모던한 가구, 자동차들이 즐비한 모던한 환경에서 윌로씨의 소심한 행동은 <윌로씨의 휴가>(53)에서처럼 무정부적인 혼란을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나의 삼촌>이 프랑스 누벨바그가 태동하기 바로 직전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세르즈 다네는 타티의 영화가 프랑스 역사(혹은 영화사)와 관련한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특징짓는다고 말한바 있다. 타티는 프랑스 누벨바그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직전인 1958년에 <나의 삼촌>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으로 무성 코미디와 프랑스 누벨바그, 팝과 아방가르드를 연결하는 작품이자 프랑스의 모던한 사회 환경을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68혁명 직전에 만들어진, 일종의 무정부적 혼란을 그린 <플레이타임>(67)은 그런 점에서 고다르의 <주말>보다 더 선구적이다(고다르는 <플레이타임>에 자극되어 <주말>의 긴 자동차 행렬의 시퀀스를 만들어냈다.)



자크 타티의 현대사회에 대한 보다 강렬한 표현은 <플레이타임>을 거쳐 <트래픽>(71)에서 정점에 달한다. 자동차의 발달과 커뮤니케이션의 곤란함이 영화의 주제다. 영화에는 곳곳에서 일상적인 정체나 다양한 자동차 사고가 등장한다. 타티는 <트래픽>에서 자동차의 움직임을 코미디의 운동과 연결하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를 풍자한다. 찰리 채플린이 20세기 초두, 미국의 자동차 생산방식을 혁신한 ‘포드주의’와 ‘컨베이어 시스템’을 <모던 타임즈>에서 인간의 기계화와 소외로 풍자했다면, 타티는 20세기 후반의 소비자본주의 사회와 현대인의 모습을 자동차의 단조로운 운동과 그것의 정체, 사고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동차의 움직임은 영화의 운동과 닮았다. 자동차는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바퀴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진다. 이것은 기차와 더불어 영화의 움직임과 유사한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동시에 자동차는 움직임과 속도뿐만 아니라 교통과 소통을 만들어냈다. 영화 역시 움직이는 영상으로 대중적인 소통을 이뤄낸다는 점으로, 영화와 자동차는 태생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트래픽>에서 타티가 표현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장소로 여행을 가거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인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차안에서 보내면서 담화를 나눈다. 차에 동승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쳐다보기도 한다. 자동차는 그래서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즉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기도 하다.



타티는 <트래픽>에서 도로 위에 가득한 자동차들의 행렬, 자동차 교통사고를 보여주면서 현대 사회의 일반적 특징을 풍자한다. <트래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운행하는 자동차는 다르지만 모두 도로를 질주하려는 동일한 열망에 사로잡혀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교통 정체가 발생한다. 교통 정체는 현대 사회의 진보가 지닌 역설적인 상황을 표현한다. 참을성 없는 여행자들에게 자동차는 빠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반대로, 현대인들을 구금하고 감금하며, 위험한 세계로 안내하는 기계가 자동차이기도 하다. <트래픽>은 그런 현대사회의 특징, 부조화, 불협화음, 결핍을 표현한다. 교통(트래픽)의 장애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곤경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소외와 고독, 나아가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이렇게 경이롭게 표현한 코미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