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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윌로 삼촌과 아이들 본문

영화일기

윌로 삼촌과 아이들

Hulot 2009. 5. 22. 16:19




아이들을 속이기란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와 공모해 남을 속이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이 함께 비밀을 공유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이들과 비밀을 공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안에서 담배를 피다가 불쑥 조카가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1) ‘삼촌, 담배 피는구나. 할머니한테 일러야지’라고 여덟 살 짜리 조카가 협박을 가해 왔다. 방안에서는 담배피지 말라는 어머니의 권고가 있었기에 조심하던 터이라 ‘너 절대로 할머니한테 고자질하면 안돼. 그럼 만화 안보여 준다. 이건 너랑 나랑 만의 비밀이야. 약속!’이라며 손가락까지 걸며 조카를 타일렀다. 하지만 조카는 문을 열고 나가기가 무섭게 마루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에게 매달리며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건 할머니한테는 비밀인데. 그니까 할머니한테는 절대로 말하면 안돼요’라며 옆에 할머니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말해버렸다.



나중에 ‘왜 말을 했냐고’ 물어보면 조카는 ‘왜 말을 하면 안돼’라고 응수한다. ‘할머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핀잔을 주면 ‘할아버지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진 않았잖아’라고 대꾸를 한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데 왜 말을 했어’라고 묻자 ‘할아버지한테만 말했단 말야. 난 정말 할머니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라며 억울하다는 듯이 째려보기까지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 비밀이란 결코 발설되면 안되는 그런 금기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비밀’이라고 떠벌리며 필히 말해져야만 하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비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사실 아이들의 생각을 읽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이들과 무언가 공모를 벌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나이가 들어서는 알지 못한다.




아이들의 얼굴은 모순된 욕망을 일으키곤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순진함, 천진난만함, 소박함 같은 것을 보고 찾고 싶어한다.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잃어버린 순수성을 혹은 잊고 지낸 시간을 되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아이들이 영화에 출연할 때 그 대부분은 아이들에 ‘관한’ 영화를 통해 어른들을 ‘위한’ 오락을 만들어내는 것에 머물고 만다. 이런 영화들에서 아이와 어른은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된다. 아이가 어른으로 격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묘한 평등주의의 내부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 제스처의 의미를 ‘읽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그들이 종종 토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드러나는 표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외면하는 표정과 만난다. 자크 드와이용의 <뽀네뜨>에서 
어린 뽀네뜨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근심하고 토라지는데, 그 순간 뽀네뜨는 놀이로서의 삶과 그것에 대한 외면으로서의 죽음간의 경계에 서 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지스탕스를 도와준 이태리 신부는 독일군 장교에 의해 총살당한다. 이때 이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고개를 떨구곤 어디론가 걸어간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로셀리니가 신부의 죽음의 순간에 아이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 장면은 반응 쇼트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신부의 죽음에 대해 아이들이 어떤 반응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신부의 죽음과 아이들의 얼굴을 교대로 보게되는데, 이 때 아이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읽어내지 못한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될지, 혹은 그들의 기억에서 이 사건이 어떤 역할을 하게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더 미묘한 세계와 만나게 된다. 아이들은 분명 어른보다 더 세계를 잘 이해하지도 더 넓게 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덜한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더 보고 더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사태를 지켜보며 결코 함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야말로 시대의 진정한 증인이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 헤매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과 도둑>에서 아이의 낮은 시선과 느린 발걸음(그래서 종종 이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뛰기도 한다)은 아버지의 일상적 현실을 따라가는 증인과도 같은 지위와 위치를 점유한다(데 시카는 이 영화에서 아이의 배역을 결정하기 위해 연기 테스트가 아니라 단지 걸음걸이 테스트만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전거를 훔치다 발각되어 아버지가 거리의 사람들로부터 수모를 당할 때, 아이는 울어버린다. 이후의 장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잡고 황망해하며 거리를 걸어간다. 이 순간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아버지의 고통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는 아버지가 도둑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전거를 도둑질한 것 때문에 봉변을 당하는 아버지에게 아이가 손을 내밀 때 그들은 미묘한 도덕적인 공모관계를 갖게된다. 이러한 모럴이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아이들의 시선을 경유해 만들어낸 진정한 새로움이었다.






어른의 위치에서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아이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어른을 보는 그런 영화 또한 있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 가령 <톰과 제리>에서처럼 어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낮은 카메라의 위치를 보여주는 그런 영화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덜렁거리고 경솔한 어른이 등장하는 그런 영화 말이다. 큰 키에 목을 길게 내밀고 마치 타조처럼 기묘한 자세로 걷는 윌로 아저씨가 등장하는 자크 타티의 영화가 그렇다. <나의 삼촌>이나 <윌로씨의 휴가>와 같은 영화에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인물들은 딱 둘인데, 그중 하나가 윌로(감독인 자크 타티가 직접 윌로씨를 연기하고 있다)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다. 윌로는 아이들의 형제이며, 아이들처럼 놀이를 즐기고, 그런 놀이를 부끄러워하거나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가 생기는 대로 행동을 하고, 그 때문에 해프닝이 벌어진다.






타티의 영화에서 웃음은 깊이 보다는 표면 위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조금 방심하면 익살스런 순간을 놓치기 쉽다. 이상한 코미디다. 마치 삶에서 그러하듯 우리는 눈앞에 펼쳐져는 사건들을 접하며 거기서 웃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웃음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발견한다’는 점에 방점이 놓여 있다. 그래서 타티가 발견해낸 웃음은 결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웃음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낸다. 웃음이 벌어지는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가령 <윌로씨의 휴가>에서 타티는 문 개그를 보여주는데, 여기서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발생하는 이상한 ‘소리’가 웃음을 유발한다). 아마도 <플레이 타임>이란 영화를 70mm로 찍은 이유도 그러한 현실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영화에서 아직 설비를 다 끝마치지 못한 레스토랑에서 종업원들과 손님들이 벌이는 일대 해프닝(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했을까’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은 대형 스크린으로 볼 때만 그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거의 백 여명이 넘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의 모든 세부에서, 모든 인물들의 단순한 제스처와 행동에서 우리는 웃음을 정말이지 ‘발견’할 수 있다.





타티의 영화에서 윌로씨가 보여주는 웃음은 친근한 웃음인데, 그것은 윌로의 행동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행동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타티는 아이와 같은 윌로라는 인물을 창조했고, 그의 영화는 그리하여 사실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인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윌로에겐 부모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삼촌과 조카의 차이가 있다. 어른들의 바캉스가 끝나면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끌려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삼촌 윌로씨는 그럴 필요가 없다. 윌로씨는 그래서 대단히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매일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윌로씨의 휴가>에서처럼 시즌이 끝나면 모두들 돌아가 버리는 해변가에 윌로는 여전히 혼자 남아있다. 그는 어쩌면 모두가 돌아간 뒤에도 그들이 떠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그런 윌로의 삶이 정말이지 그립기만 하다.(김성욱)


* (1) 지금은 조카들과 살고 있지도 부모님과 함께 있지도 않다. 그러니 부모님에게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 지난 일이다. 휴가가 끝나고도 부모의 손에 끌려 돌아갈 일이 없는 휴양지의 윌로처럼 말이다.   
* 아주 예전에 '엔키노'에 글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일상의 에피소드에 영화를 섞어서, 혹은 생각나는 영화 이야기들을 연재했는데, '자크 타티 회고전'을 하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윌로와 아이들에 관한 생각을 적었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