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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유현목 감독님에 대한 짧은 기억들 본문

영화일기

유현목 감독님에 대한 짧은 기억들

Hulot 2009. 7. 3. 02:02



유현목 감독님이 세상을 떠났다. 잠깐이나마 감독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사적인 기억들이다. 처음 얼굴을 뵌 것은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예전 사당동에 있던 '문화학교서울'에서였다. 당시 대표님이 '소형영화동우회'의 대표를 하셨는데 유현목 감독님이 동우회의 창립자였다. 그 친분으로 문화학교서울에서 종종 감독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물론 이야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그저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내가 그 시절에 기억하는 유현목 감독님은 지독한 영화광인이었다. 2001년으로 기억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볼 때였다. 영화가 막 시작할 무렵에 앞자리에 꽤 나이가 드신 어른 한 분이 자리를 했다. 종종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했지만 어르신이 작품을 잘못 골랐을 거라 생각했다. 꽤 긴 상영시간에 때론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질 때 면도날에 살짝 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앞자리의 나이든 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유현목 감독이었다.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감독님을 뵌 적은 꽤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극장을 나오며 한번 뵙고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순을 앞둔 감독에게 지금의 영화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었다.

유현목 감독을 영화제에서 만나는 일은 드믄 일이 아니었다. 요란한
행사장이 아니라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만났던 적이 많았다. 칠순을 넘기고도 새로운 영화들을 평범한 관객처럼 극장에서 보시는 것에 꽤 감동을 받았다. 언젠가 인터뷰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2003년 7월에 그런 기회가 생겼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안국동에 있던 시절에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아 독일과 한국의 분단을 되돌아보는 '한독 분단영화 특별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상영할 생각을 했다. 이때다 싶었다. 유현목 감독을 뵙고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남산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감독님과 마주했다. 그 때 감독님과 나눈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지독한 영화광인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한 유현목 감독은 소년기 내성적인 성품에 늘 가냘픈 선병질의 약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소년시절의 고독과 소우주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마을에 찾아오는 '구경거리' 덕분이었다. 소학교 5,6학년 때쯤 그는 지방순회공연을 하는 신파극단의 공연이나 활동사진을 구경하는 취미를 붙였고 이것이 발전되어 중학시절에는 교회에서 하는 성극의 대본을 쓰거나 주연 또는 연출을 맡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현목 감독이 적극적으로 영화에 몰두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해방의 물결은 영화의 해방을 불러 왔고 금기의 명화들이 갑자기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유현목 감독은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섬광처럼 다가온 영화의 빛과 만났고 변두리 조그마한 극장을 돌아다니며 재탕, 삼탕을 거듭하며 영화를 봤다고 한다. 영화에 미쳐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던 것이다.

"동국대를 다닐 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 보름 동안 시나리오 강좌가 있었지. 오영진, 최금동, 백철 선생 등이 강좌를 맡았는데, 보름 동안 들었어. 왜 들었냐면, 일제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 심취했다고. 그런데 해방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프랑스 영화가 들어온 거야. 피에르 슈발의 35년도 작품이었지. 그 영화에 미쳤었지. 미친 이유가 뭐냐면, 문자로 쓰인 이미지하고 영상의 이미지가 갖는 차이가 있어요. 영상적 매력인 거지. 그 영화에 완전히 심취해서, 열 네 번을 봤어요. 그때 2번관, 3번관, 4번관, 필름이 다 찢어지고 비가 오고 그랬어도, 마지막 열 네 번까지 봤어. 미친 거지, 그 영화에. 연극과 다른 영화세계에 매혹돼 시나리오 강좌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지."

유현목 감독의 영화작업은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수십 번을 보면서 기술적인 면이 어떻게 시도됐는가를 탐구했다고 한다. 한국영화의 진부한 '스토리텔링'을 넘어서기 위해 영상적인 시도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작조건이 가혹했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유현목 감독은 영상적 테크닉의 미숙함을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했다.

"예전에는 한국영화가 그냥 스토리텔링이야. 배우의 연기도 대사의 전달일 뿐이고. 영상의 표현이나, 몽타주 편집도 전무했지. 비싼 필름을 얼마 안 주니까, 찍다가 필름 끊어지면 카메라 위치나 이런 건 신경 쓸 수가 없었어. 그냥 스토리만 이어지게 했다고. 영상주의적 표현이 아주 드물었지. 한국영화에서 그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어요. 왜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찍어야 하는지, 왜 이렇게 편집을 해야 하는지, 라는 질문이 거의 없었어. 테크닉부터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지. 영화를 보는데 테마가 어떻고 이런 건 나중에 배우자. 그래서 순전히 테크닉만 봤어. 왜 카메라가 거기서 찍었지, 왜 팬을 했지, 왜 천천히 이동했지? 노트를 갖고 깜깜한 영화관에서 그런 걸 적었어. 집에 와서 그걸 딴 노트에 적는데, 그게 참 재밌었다고. 영상적 표현이나, 편집 몽타주의 재구성, 대사와 영상과의 관계, 음악의 역할, 이런 걸 공부하게 된 거지."

유현목 감독은 한국전쟁의 피난 시절에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부산 서면의 중앙극장에서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너무 영화에 도취되어 도랑에 빠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베르 브레송,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에 특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 <저항>을 보고 영화에 도취됐지. <소매치기>에서는 손의 움직임이 기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저항>도 그렇지. 내용은 단순해. 감옥에서 탈출하는 이야긴데, 쇠로 탈출도구를 몰래 만드는 모습을 오래 찍고 있어. 그게 영혼의 움직임을 찍는 거지. 그런 면에서 충격을 많이 받았고 영화의 가능성을 본 거야.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에도 큰 영향을 받았지. 베리만을 한번 만날 기회가 있기도 했었어. 유럽 시찰을 갔을 때 파리에서 브레송을 만났지. 미국, 영국, 독일에 초청받아 간 거였는데, 베리만은 그 때 독감 걸려서 못 만나고 그의 작품을 영화인협회에서 틀어줘서 6편인가를 봤어. 그 독특한 수법에 감동을 받았지. 그의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

스스로 '조금은 건방진 일'이라 말했지만, 유현목 감독은 당시 '멜로드라마나 신파에 혐오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1960년대에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꽤나 고통스런 일이었다. 흥행성이 없고 안 팔리는 감독으로 악명을 들어야만 했다.

"그때는 카메라도 몇 대 없어서 빌려 쓸 때야. 다른 팀에서 카메라를 쓰고 있으면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어. 제작자는 빨리 찍으라고 재촉하고. 제작시간이 곧 돈이니까. 나는 느린 감독으로 유명했지. 왜냐면 보통 세트를 제작하면 3면에만 벽을 만든다고. 이게 빨리 찍을 수 있는 방법이긴 한데, 나는 제4의 벽을 꼭 만들었어. 그래야 화면에서 입체성을 가질 수 있어. 입체성이라는 게, 관객의 주의를 요구한다고. 사이즈나 앵글에 따른 이미지의 표현성이라는 게 있는데, 촬영하면서 그걸 다 고려하면 하루에 몇 커트 못 찍는 거지. 세트나 앵글 한 번 바꿀 때마다 2-3 시간씩 걸리니까. 그러니까 느린 거지. 느린 감독인 데다 안 팔리는 감독이라고 악명을 얻었지."

영화작업은 고통스런 일




유현목 감독은 대단한 애연가였다. 언제나 먼발치에서 그 분을 뵐 때마다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었다. 극장에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종종 담배를 피우시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를 할 때까지도 나는 담배가 유현목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 감독님은 담배를 피우게 된 사연을 말해주셨다. 담배 연기에 고독한 삶의 무게가 짙게 묻어 있었다.

"예전에는 영화 만들기가 정말 어려웠지. 제작비 중에 제일 많이 들어간 게 필름 값이랑 현상비였어. 거기다 신성일, 엄앵란 같은 스타배우들은 한 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찍었고 동시에 여러 작품을 찍을 수밖에 없으니까 무리가 많았지. 배우를 한 번 잡으려면 일정이 한 달만에 돌아왔다고. 한번 돌아오면 매일 무리해서 찍어서, 잘 시간도 없었어. 배우가 졸면서 연기를 하다가 지금 대사가 아니고 먼저 찍던 영화의 대사를 하기도 했지. O.K.가 될 수가 없는데 필름이 아까우니까 그냥 가는 거지. 만 피트 영화를 촬영하면 필름을 만 2천 피트밖에 안 줬어. 지금이야 20만자, 30만자 쓰지만. N.G.가 분명한데, 그래도 O.K.를 할 수밖에 없었어. 그 때부터 담배를 배운 거야. 하루에 세 갑반씩 매일."

조심스럽게 <말미잘> 이후에 영화를 더 만드실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감독님은 '영화작업은 고통스런 일'이라 말했다.

"의욕은 있는데, 나이가 드니까 몸이 힘들어. 미국의 심리학자가 쓴 책에서 직업 중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모가 많은 일에 순위를 매긴 게 있어. 1위가 영화감독이고, 2위가 강대국의 대통령이고, 3위가 전쟁 중 작전책임자야. 영화감독은 육체노동도 심하지만, 정신적인 소모가 심해.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게 된다고. 컷, 했을 때의 그 중압감이라는 건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지. 반 년, 1년씩 진행되는 영화작업은 쉴 틈도 없고 힘들어. 콘티 하나 짜는데 이틀 밤 사흘 밤을 새울 때도 있고.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80이 되는데, 디지털 카메라로 규모가 작은 영화를 찍어보고 싶어. 소품으로 문제의식 있는 걸 해보고 싶어."

유현목 감독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그 분의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는 일은 있었지만 영화를 결코 만들지는 못했다. 2006년 2월에 김홍준 감독의 추천으로 <춘몽>(65)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에 극장의 뒷자리에서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유현목 감독님이 영화를 보시며 '아, 저 친구가 신성일이야. 연기를 잘 했지'라는 식으로 중계를 하듯이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상영 후에 진행된 김홍준 감독과의 대담에서 유현목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영화를 찍다가 에너지가 부족하고, 다시 찍고 싶은 장면이 있어도 그냥 오케이를 해야 했어. 그러면 감독은 무척 불쾌해진다고. 그래서 담배를 많이 피웠어. 지금도 커피 중독이고 담배 두 갑을 태우지. 다들 알겠지만 나는 <오발탄>이라든가 <순교자>, <사람의 아들>, <김약국의 딸들>, <장마>와 같은 문예적 작품을 만들었고, 비흥행 감독이라 오락영화는 만들 줄 몰랐어. 당시에는 촬영과 녹음, 감독에게 주는 개런티를 빼면 다른 스태프들은 생계비가 부족할 정도였지. 이런 영화 작업이라도 해야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이었어. 요즘은 필름을 50만자도 쓰고 카메라도 두 대 이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너무 부럽고 왜 너무 일찍 태어났나, 라는 생각에 원망도 하곤 했지."

2007년 8월에 피아니스트 박창수 씨가 개최하는 '하우스 콘서트'에서 <김약국의 딸들>(63)을 상영하면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보조기구를 끌고 움직여야할 만큼 감독님은 거동이 불편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시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내내 서서 영화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사실, 무슨 말을 하셨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때 나는 그 분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조기구를 잡고 있던 그 분의 손과 지쳐 보이지만 묵직한 등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잠깐씩 얼굴을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날이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감독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 감독님이 세상을 떠났다. 사소한 순간들이지만 그 분과의 만남은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를 보며 그 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여전히 감독님이 극장의 어둠 한 구석에서 영화를 보고 계실 것만 같다.
(김성욱)

* 프레시안의 '상상의 시네마테크'에 쓴 글이다. 감독님은 시네마테크에 큰 애정이 있으셨고,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해 다른 자리에서도 말씀을 많이 하셨다. 영화를 보시던 감독님의 모습이 떠올라 무언가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사실 많지 않다. 아주 조그만 기억의 조각들 뿐이다.

* 사진들은 모두 '하우스 콘서트'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시던 모습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몇 차례 상영회가 있긴 했지만 제대로 감독님의 회고전을 진행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마도 영상자료원이나 국제영화제에서 보다 충실하게 이런 행사를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예전 안국동 시절인 2003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오발탄>의 상영후에 극장에 오셨던 감독님과 근처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었다. 그 때, 두 어잔의 술을 비우시고는 감독님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춤을 추셨다. 동석했던 사람들 중에 관객으로 왔던 젊은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감독님이 그에게 '자네는 뭘 하고 싶나'라고 묻자 '전, 영화감독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감독님은 '그래, 자네는 영화를 몇 편이나 봤나? 어떤 영화들을 봤어? 열 번 이상 본 영화가 있나'라고 물었다. 감독님의 질문은 단호했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때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젊은 청년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길을 가려는 젊은이에게 감독님이 보인 날카롭고 진지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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