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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2009 시네바캉스서울 - 자크 드미의 뮤지컬 본문

영화일기

2009 시네바캉스서울 - 자크 드미의 뮤지컬

Hulot 2009. 8. 4. 16:21




*2005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처음으로 '자크 드미 회고전'이 열린 바 있습니다. 그 해 열렸던 회고전은 통속적으로 이해되던 자크 드미의 영화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였습니다. 이번 '2009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다시 자크 드미의 네 편의 뮤지컬 영화가 상영됩니다. 아래 글은 2005년 회고전을 맞아 썼던 글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자크 드미의 영화를 아직도 제대로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그의 영화들을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가능한 하루에 몰아서 보아주었으면 합니다. 그의 영화는 한 편의 작품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하나의 우주로, 세계로 받아들일 때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김성욱) 
   

상실감으로 가득한 아름다움 - 자크 드미의 세계

1991년 자크 드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평생의 반려자였던 아녜스 바르다는 드미의 영화 세계를 보여 주는 다큐멘터리 <자끄 드미의 세계>(1995)를 연출했다. 자크 드미를 사랑했던 친구들, 배우, 감독들의 증언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 옆에서 세 명의 여인이 드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편지에서 “당신의 영화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감사를 보여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나로 하여금 삶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삶이 고귀하고 잔혹하면서도 매혹적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자끄 드미의 세계>가 드미의 영화 세계를 조망하는 평론가나 감독의 말을 전시하는 대신 그의 영화를 사랑한 평범한 관객의 편지를 읽어주는 것으로 장면을 시작하는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의 영화를 비평가나 영화학자, 혹은 영화 애호가들은 외면했다. 반면, 그의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멜빌의 영화가 그러하듯, 드미의 영화는 대중들의 사랑 덕분에 지속할 수 있었다. 

1931년에 태어난 자크 드미는 고다르, 트뤼포 등과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의 일원으로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시절을 제외하자면 그는 평생 누벨바그 그룹이나 알랭 레네, 크리스 마르케 등의 좌안파 그룹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영화계의 이단아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령, 초기에 고다르는 드미의 첫 장편 극영화 <롤라>(1961)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만 이후 그의 영화가 지나치게 ‘유아적’이며 ‘친미적’이란 이유를 들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드미의 영화에 대한 비판은, 또한 1968년을 거치면서 프랑스영화가 보다 정치화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드미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한 채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고통스런 시간에서 그를 지켜준 것은 친구들과 관객들, 그리고 동반자 아녜스 바르다였다. 바르다는 드미가 사망한 후, 자신의 영화제작사인 ‘시네타마리스’를 통해 <쉘부르의 우산>, <로슈포르의 숙녀들>, <당나귀 공주> 등의 필름을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표면적인 친화성에도 불구하고 드미와 바르다의 관계는 엄격하게 독립적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가 자크 드미의 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것을 원치 않는 편이다. 자크 드미의 회고전을 위해 필자와 파리에서 만났던 ‘시네타마리스’의 관계자는 "바르다는 드미의 영화를 사랑하지만 그의 영화와 자신의 영화 간에 엄밀한 미학적 차이가 있기에 드미에 관한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외하자면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회고전’에서 함께 그들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자끄 드미의 세계>의 첫 부분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드미가 그의 첫 영화 <롤라>의 세트장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을 보여 주며 ’당시 자크는 뷰 파인더로 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시 독일제 카메라를 통해 자크를 보고 있었다. 나중에 자크는 <행복>의 세트장을 방문했다. 우리들은 그러나 서로에게 신중했다. 그래서 나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신중하게 그에 관해 말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드미와 바르다의 관계는 1959년에 처음 시작되어, 다게레 거리에서 영화 작업을 함께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결코 한 번도 영화 작업을 함께하거나 서로의 작품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미는 "창조적인 작업이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수행했다"라고 말한다. 

실연의 상처, 사랑의 슬픔




자크 드미는 평생 동안 비난을 무릅쓰며 뮤지컬영화를 만들려 애썼다. <쉘부르의 우산>(1964)은 비평적인 호평을 얻었지만,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과 <당나귀 공주>(1970)는 정치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으로 끝없는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드미는 말년에 이브 몽탕을 주연으로 <추억의 마르세이유>(1988)라는 뮤지컬을 완성하는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랑했던 자크 드미는 뮤지컬이 프랑스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는 편견과 평생 싸웠다. 그는 스탠리 도넨,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이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프랑스영화가 뮤지컬영화를 만들지 못하는지에 대해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뮤지컬영화는 대가가 많이 따르는 작업이었고, 세트 설계와 음악 작곡, 댄스 리허설 등의 복잡한 공정이 필요한, 한마디로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여러 편의 뮤지컬 영화를 구상했지만, 최종적으로 그가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제한적이었고, 이 또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가령, 이브 몽탕이 출연한 <추억의 마르세이유>는 구상 단계에서 완성까지 꼬박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드미는 왜 뮤지컬의 판타지 세계에 이토록 오랫동안 빠져들었던 것일까?

자크 드미의 어린 시절을 극영화로 만든 <낭트의 자코>와 다큐멘터리 <자끄 드미의 세계>는 그가 겪은 끔찍한 체험이 그를 영화의 세계로 안내했음을 말해준다. 낭트에서 태어난 드미는 2차대전 당시 동네에 떨어진 폭탄 세례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잔혹한 체험을 거친 이후에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처음엔 인형극과 오페라타에, 아홉 살이 되면서부터는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드미는 로베르 브레송, 막스 오퓔스, 장 콕토의 영화에 매료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프랑스에 소개된 할리우드 뮤지컬영화를 보며 뮤지컬영화를 만들 구상을 하게 되었다.

<롤라>를 뮤지컬 영화로 기획했지만 심한 반대에 부딪혀 절반의 시도에 머문 이후에, <쉘부르의 우산>에서 드미는 본격적으로 뮤지컬 작업에 들어섰다. 드미의 일련의 뮤지컬은 행복함의 느낌 못지않게 슬픔의 비극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그의 뮤지컬은 마술과도 같은 힘으로 일상의 모든 하찮은 것들을 아름답게 변형시키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의 영화가 지닌 세트와 색체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느낌을 표현하는 미셸 르그랑의 음악 덕분이기도 하다. 드미의 뮤지컬은 명백하게 상상의 세계라기보다는 일상의 세계에 정박해 있는 느낌을 준다. 자연적인 세트, 도시의 거리, 실내 공간, 일견 상투적이라 느껴질 법한 대사들이 그러하다. 그의 영화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가족을 구성하며, 죽고, 또 헤어짐 뒤에 우연히 만난다. 이런 일상적인 사건의 연속은 뮤지컬이란 장르를 통해 행복의 느낌으로 변형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여전히 그 이면에 슬픔을 깃들게 한다.

<쉘부르의 우산>에서 인물들은 모든 일상적인 말을 샹송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뮤지컬에 꼭 필요한 춤은 없다. 이 영화에 담긴 비극적인 정서는 통속적인 뮤지컬보다는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입영 통지서를 받은 기이는 알제리로 떠나기 전날 밤 주느비에브와 카페에서 슬픔을 나눈다. 그들이 거리를 쏘다닐 때 우리는 기이와 주느비에브의 발을 볼 수 없다. 주느비에브가 '나를 떠나지 말라'고 기이에게 말할 때 둘은 마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것처럼 거리를 미끄러져 나아간다. 그들은 춤을 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로 걷지도 않는다. 그들의 몸은 음악의 선율에 실려 움직일 뿐이다. 화려한 컬러가 도시와 집 내부의 벽을 도배하고 있다면, 미셸 르그랑의 음악은 슬픈 남녀의 몸과 말을 감싸안는다. 음향적인 신체, 음향적인 언어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쉘부르의 우산>에서 사건은 일상의 단편들이며 모든 것은 일상적인 공간에 정박해 있다(자연적인 세트와 거리, 쉘부르의 집, 상투적인 대사들). 인물이 춤을 추며 펼치는 도약과 모험이 이 영화에는 없다. 일하고, 데이트를 즐기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하고, 가족을 구성하고, 죽고, 다시 만나는 일상의 연속만이 존재한다. 이런 일상에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 슬픔의 대부분은 실연의 상처 때문이다. 주느비에브에게 구혼하는 카사르는 "예전에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았죠. 다 지난 일이죠. 실연의 상처를 잊고 싶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알제리 전쟁에 참전한 기이를 기다리는 주느비에브는 "사진을 봐도 이젠 기이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요. 기이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어째서 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죠"라며 눈물을 흘린다. 알제리 전쟁에서 부상당한 기이는 쉘부르로 다시 돌아오지만 주느비에브는 이미 떠나고 없다. 기이는 주느비에브와 거닐던 거리, 함께 차를 마시던 카페에 들러보지만 거기엔 텅 빈 그녀의 그림자만이 남아 있다. 그의 영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 사라진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기이의 정비소 동료는 "모두 함께 노래만 부르는 오페라는 싫어. 난 영화가 좋아"라고 말한다. 자크 드미의 부인인 아녜스 바르다가 자크 드미의 삶을 기억하며 만든 <낭트의 자코>(1991)에도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어린 자코는 "오페라는 지겨워. 그건 계속 한 장소에서 봐야 하잖아. 영화에서는 눈이 움직이게 돼. 얼굴과 세부 상황을 다 볼 수 있어. 영화가 더 좋아"라고 말한다. 영화는 분명 오페라보다 더 좋다. <쉘부르의 우산>은 비극적인 오페레타이기에 슬픈 것이 아니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슬프다. 무언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렌즈에는 슬픔이 담겨 있다. 기억이든 어느 순간 떠오르다 사라지는 사건이든,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다. 

<쉘부르의 우산>에 비하자면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남자를 만나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로슈포르의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흥겹게 그린다. 카니발을 벌이기 위해 찾아온 젊은이들, 로슈포르 거리의 수병들, 아이들의 흥겨운 춤으로 화려한 뮤지컬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에서 젊은이들은 <쉘부르의 우산>과 마찬가지로 만남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은 그들의 욕망의 절절함을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에서 로슈포르의 숙녀들처럼 이상적인 여인을 꿈꾸는 젊은 수병 맥센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난 꿈속의 여인을 찾아 로슈포르로 왔어요. 그녀를 찾아 7년이나 항해를 했죠. 하지만 난 아직도 그녀를 찾질 못했어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진 못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내겐 너무 분명해요. 그녀는 내 유일한 사랑이죠. 하지만 그건 단지 꿈이었을까요? 난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그녀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네요. 그녀는 멀리 있을까요, 아님 내 가까이 있을까요? 말할 순 없지만 그녀가 존재한단 걸 난 알아요. 사랑은 유일한 권능이죠"라고 노래한다. 맥센의 노래는 자크 드미의 꿈의 세계, 그곳에 담긴 통렬함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젊은이들은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이는 단지 꿈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 그들은 사랑의 권능을 믿지만 매번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좌절을 거듭한다.

되찾은 시간




뮤지컬영화에서 보이는 이런 통렬한 꿈의 세계는 드미의 영화가 전후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화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영화에 담긴 판타지는 통상적인 것과는 달리 공허하고 상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사물과 존재, 현실과 상상간의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를 영화에 그려내기에 그렇다. 그의 영화는 달리 말하자면 현실의 잔혹함을 보여 주는 브레송의 영화와 꿈의 동화적 세계를 보여 준 콕토의 영화 사이에 위치한다. 두 편의 뛰어난 초기 걸작인 <롤라>와 <천사들의 해안>(1963)은 드미의 영화가 누벨바그 영화와 일정 부분 공통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또한 자유로운 카메라의 작동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와 인물은 정말이지 기이하게 조우한다. 가령, 그의 영화에서 첫 장면은 매번 인상적인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낭트 해변가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롤라>의 첫 장면과 잔 모로를 남겨둔 채 끝없이 뒤로 후퇴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보이는 <천사의 해안> 첫 장면은 관객들을 당황케 할 만큼 경이적이다. 이 장면들은 일상의 진부한(또는 가혹한) 현실과 카메라의 움직임(영화)과 만나는 순간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드미의 영화가 카메라와 인물 간의 용해 불가능성을 통해 현실과 상상의 분열, 통렬함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드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모두 사랑의 권능을 믿는다. 그들에게 사랑은 치료의 기적을 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리얼리티는 그러한 사랑을 금지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사랑에는 끝없는 전쟁, 고통이 뒤따른다. 그들은 헤어짐 뒤에 만남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한다.

드미의 영화가 여행(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러시아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의 귀환)을 거듭하며 끝없이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이러한 고통, 사랑의 금지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는 끊임없이 이러한 꿈을 도시들, 특히 해변의 도시들(<롤라>의 낭트, <천사들의 해안>의 칸, <로슈포르의 숙녀들>의 로슈포르, 심지어 <모델 샵>의 L.A)과 영화라는 기계를 통해 표현해냈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에의 갈망은 불확실한 세계를 구성하지만(꿈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꿈과 함께 끝없는 여정을 거듭한다(현실은 꿈으로 이전된다). 이 여정은 그의 영화 인생이 그러했듯이 모두 소망스런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정을 통해 사랑에의 욕망은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창출할 수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회고전을 위해 2005년, 2월에 파리의 다게레 거리에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사인 ‘시네타마리스’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곳의 관계자는 "전 세계에서 자크 드미의 영화를 찾는 곳은 한국과 일본뿐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그의 영화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한때 자크 드미는 일본의 지원으로 우리에겐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알려진 만화를 원작으로 <레이디 오스카>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는 물론 호평을 얻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드미의 영화는 프랑스에서도 전작을 상영하는 법이 드물 만큼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두에 말했지만 드미의 영화는 프랑스에서 비평가들보다는 관객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던 영화였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드미의 회고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내게 "정말 자크 드미의 영화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나요?"라고 질문하곤 했다.

자크 드미는 완전영화를 꿈꿨다. 그의 영화에서 세트, 음악, 칼라, 미장센, 카메라의 움직임은 주제나 이야기 이상으로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동등한 질료들이다. 게다가 그는 소설에서 발자크가, 혹은 막스 오퓔스가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전체 영화에서 인물들의 삶이 순환하고 이어지기를 원했다. <롤라>, <쉘부르의 우산>, <로슈포르의 숙녀들>, <당나귀 공주>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각 영화에서 인물들의 삶은 그 이전의 영화들에서의 삶을 기억으로 간직하면서 변주된다. 그런 점에서 드미의 영화는 타티나 오즈의 우주와 비교할 만하다. 

다큐멘터리 <자끄 드미의 세계>에서 몽파르나스 묘지 앞에서 자크 드미에게 보내는 한 여인의 편지 마지막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자크 드미, 당신만이 진실의 세계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어요. 당신의 영화 덕분에 우리는 어린 시절을 되찾을 수 있었답니다’. 장 주네는 모든 아름다움은 그 기원에 고통을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드미의 영화는 우리의 유년기의 상처와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꽤나 가슴 아픈 기억들이다.   
-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