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특별 좌담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일본영화연구자인 히라사와 고를 초청,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오시마의 세계를 깊이 탐구해 볼 수 있는 특별 강연과 좌담을 마련했다. 지난 18일 오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와 동아시아’란 주제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히라사와 고, 변성찬, 후지이 다케시, 몬마 다카시 4명의 패널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진 좌담은 오시마의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지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도 진행되고 있는데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하자면 오시마 감독을 이해하는 것에는 난제가 있다.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접속을 이뤄낸 작가였기에 지금의 관객들에게 수용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난제가 역설적으로 동시대성, 현재성의 문제를 재고하게 한다. 히라사와 고는 오시마를 개인-작가보다는 ‘운동체’로 보았는데, 오늘은 그런 접속들, 즉 ‘오시마 커넥션’이라 부를법한 오시마와 동아시아라는 커넥션을 살펴보려 한다.

후지이 다케시(역사학자):
전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살지만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는데,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교사형>의 모델이 된 이진우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여고생 실종된다. 전화가 와서 옥상에 가보니 여고생이 있었다. 여고생의 유품인 빗이 장례식에 배달되어 왔다. 이진우라는 재일조선인 소년이 체포당하게 되는데, 추리소설의 애독자일 것이라는 추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애독자였던 소년이었다. 공상했던 것을 실제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사건이 성립되었다. 물증은 없었고 자백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60년 11월부터 있었는데, 4.19혁명 이후라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62년 7월에 다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이진우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한국에서도 영화화할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산됐다. 아마 유현목 감독의 작품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가 이와 관련한 단편소설을 썼었다. 그는 이진우라는 캐릭터에 관심을 보였는데, 일본의 장 주네로 본 것이다. 이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사건을 조명한 게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이라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과 유사한 것을 느꼈다. 교육부장은 칼리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웃음) 세트장에서 표현주의적 배경으로 연극이 이루어진다. 이진우라는 소년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해해서 다시 구성하는 영화로, 역사학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라고 본다.

히라사와 고(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와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잊혀진 황군>은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다. 오시마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그가 쇼치쿠 영화사를 그만두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랬지만, 다른 한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막 등장했기에 표현의 폭이 더 자유로웠다. <잊혀진 황군>은 전후 일본이 부흥하는 가운데에 전쟁책임을 잊고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통력한 비판을 다뤘다. 1965년에는 <청춘의 비>로 한국 고아원을, 한국에서 촬영한 스틸사진으로 <윤복이의 일기>를, 1968년에는 대동아전쟁 당시의 일본, 미국의 뉴스 영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1969년에는 모택동의 생애와 문화대혁명을 만들었다. 오시마는 일본이라는 범위에서 영화나 세계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한국을, 중국을 생각해 대문자의 일본과 민족을 비판해, 동아시아의 영화인, 지식인으로서의 영화를, 세계를 사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몬마 다카시(일본영화연구자): 오시마를 우회로 해서 일본영화가 한국인을 어떻게 다뤘는지 말씀드리겠다. 오시마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20세기 초의 일본 기록영화에서 먼저 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왕실이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겼다. 그러다가 조선인도 극영화에 등장하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상호이해나 융화가 소박한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크게 보면 국책영화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엔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이 생겼는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코미디 영화에서 실수하는 익살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 시기에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외국인 1위가 조선인이었다. 일제 침략기의 후반이 되면 황국신민으로 책임을 다하는 게 조선인에게 요구됨에 따라 국책영화에 나오는 조선인은 일본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인측의 바람이나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일본영화에서 조선인은 적대시되거나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대상은 아니었다. 패전을 맞이해 그러나 영화계도 변화했다.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이 점이 영화에 반영됐다. 이 시기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한국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두 가지 생겼다. 남한이나 북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들자면, 재일 한국인을 올바른 성실한 사람으로 그리는 것과 반사회적인 무법자로 그리는 것이 있다. 어딘가 극단적인 모습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을 그린 것은 아마도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나>가 처음일 것이다. 그 전까지 재일조선인은 특수한 존재였다. 오시마는 어땠는가 하면,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매개였다. 조선이라는 것을 매개로 일본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이다. <교사형>을 통해 양쪽에 대한 비판을 봤을 것이다. 조선이나 한국은 60년대 일본인들이 잊고 싶었던 존재들이었다. 오시마는 일부러 제시를 하는 것으로 영하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마는 뛰어난 선동가였다. 그런 태도는 일관된 것이다. <잊혀진 황군>은 1963년 8월 16일, 즉 패전기념일 바로 다음날에 방영됐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딱 좋은날이었다. <윤복이의 일기>가 개봉된 것은 65년 12월로, 그 직전 한일조약이 발효됐다. 이런 점에서 오시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성욱: 1992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오시마의 발언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본인 제일의 결함은 우리가 과거에 다른 나라와 어떤 식으로 교류했는가를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교사형>에서 나타나는 재일한국인의 얼굴은 그런 일본인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변성찬(영화평론가):
발표를 들으면서 한국영화에서 표상된 일본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생각했다.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은 착하거나 나쁜 스테레오 타입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타입 중에 굳이 깡패가 아니어도 일본인이 등장하면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다. 우리도 그런 문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사실은 굉장히 낯설고 어렵다. 감정이입도 안되고 곤혹스러운 경험이 생각난다. <교사형>은 7년 전에 처음 봤는데, 가장 떠오르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중간까지는 대극점에 일본이 있는데, 마지막에 가면 일본이라는 호명이 국가로 바뀌면서 국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 R이 장엄한, 영웅적인 패배를 맞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런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범죄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국가라는 것이 그것에 대해서 처벌하거나 이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전복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에 대한 질문으로 일종의 비약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오시마가 60년대 갖고 있었던 정치성의 강렬함 같은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후지이 다케시: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에 일본이 국가로 바뀌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이나 조선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못 벗어난 채로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의 아이로 죽어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김성욱: <교사형>에는 다양한 영화적 표현방식이 눈길을 끈다. R은 일종의 산송장, 미이라에 가깝다. ‘데드 맨 워킹’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스틸사진들이 또한 활용되고 있다. 오시마는 <닌자 무예장>이나 <윤복이의 일기>에서는 완전히 정지된 이미지로 영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연극적 재현을 스틸사진으로 병치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러한 충돌성의 느낌은 파솔리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연극적 재연인데, 이것의 의도는 전혀 기억을 갖지 못한 R에게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거쳐 일본인 교도관들 모두가 재일 한국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말미에 ‘관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객들도 이러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듯이 유도한다. <돌아온 술주정뱅이>들의 후반부에서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모든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이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R이 멈추는 그 지점에서부터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라사와 고: <교사형>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교사형>의 예고편을 보면, 이 예고편은 아다치 마사오가 촬영했는데(그는 이 영화에서 경비과장으로 출연한다), 교사형 집행을 할 때 오미사 목에 줄을 걸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무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국가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예고편에서 던지고 있다. 당시에 영화비평가로 모든 범죄가 혁명적이라는 테제를 제시한 사람도 있다. 이게 옳은지를 떠나서 계속 영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형>의 마지막에서 그가 밖으로 나가봤자 국가가 있는 한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상징적 장면이라 생각한다. <교사형>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년>에서 떠돌이 일가는 계속 경범죄를 저지른다. 어딜가나 일장기가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돌이 가족에게는 사실 국가가 상관없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국가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도쿄전쟁전후비화>에 나오는 풍경들이다. 국가 권력이라는 것이 경찰이나 국회 같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풍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시마가 <도쿄전쟁전후비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풍경들이다. <교사형>에서 시사했던 국가를 더 발전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교사형>에서 R이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과연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김성욱: 오시마 영화의 커넥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1960년대라는 시점에서 보자면 동시대적으로 베트남 전쟁, 중국의 문화혁명, 그리고 한국의 4.19 등의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제의 문제, 과거 식민지와 관련한 문제, 운동집단의 몰락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오시마 영화에 복잡하고 모순적인 접합을 이뤄내고 있다. 이러한 접속의 방식은 무엇일까? 동시대 유럽의 파스빈더는 과거 나치의 기억과 유대인 표상의 문제, 외국인 노동자 등의 문제를 영화에 담아냈다. 오시마는 이와 유사한 작업을 했지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사와 고: ‘접합’이라는 표현처럼, 오시마의 영화는 개인의 작가의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오시마는 작업을 할 때 집단을 형성해서 작업했다.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간에. 집단 속의 다양성이 있다. 다양한 사상들이 응축되어서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때그때 일하는 비평가나 각본가의 사상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순적인 접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를 찍은 것은 물론 오시마라는 감독이지만, 거기에는 그 때 당시의 운동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논의를 통해서 어떤 방향이 생긴다. 그렇기에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오시마는 충돌을 포함해서 하나의 영화운동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시마 같은 경우는 영화적으로 보자면 쇼치쿠 시기를 작가주의 시기, 이후를 지가 베르토프 집단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몬마 타카시:
오시마가 60년대에 찍은 영화를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 원인은 영화 속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히라사와씨가 지적했듯이 집단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여러 가지 요소로 조립된 작품으로, 깔끔한 논문처럼 정리되기 어렵다. 이 시기에 오시마가 만든 영화는 모순을 안은 채로 그 덩어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질문을 던지고 선동하는 측면이 있다. 김성욱씩가 지적한 것처럼 퍼포먼스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에 나오는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보고 있는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다. <교사형>의 맨 마지막에 ‘관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이미 관객이 영호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교사형>의 논의는 사형제도, 재일조선인 문제 등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잊고 지내고, 보기 싫은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선 파스빈더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변성찬: 60년대의 오시마는 영화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제작방식이나 영화에서 분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식> 이후 <감각의 제국>부터 보면 일정한 변화가 보인다. 히라사와 고씨는 미시정치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연속성을 강조하느냐 단절을 강조하느냐 라는 점은 오시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절과 연속성,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히라사와 고 :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다. 물론 68적인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감각의 제국> 이후에 미시정치의 측면에서 오시마가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감각의 제국>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대문자 정치에 저항을 하려고 했던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8년 당시에 오시마는 자기 영화에 대해서는 ‘예감의 영화’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정치나 사회가 먼저 있고, 그것을 영화가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시마는 자기가 만든 영화는 영화가 먼저 앞서서 정치를 예감한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전쟁이 끝난 지점에서 이제 영화에 대한 의미를 바꿔가려 한 점이 보인다. <그 여름의 누이>를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그리는 것은 그만 두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고 있다. 예감의 영화라는 입장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각도에서 동아시아를 재검토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68전후 시기의 영화라는 것이 큰 자극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감각의 제국> 등이 역사적인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주고, 그런 데서 자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고하토>는 68시기에 찍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영화다. <고하토> 이후라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리: 김수현)

* 2003년에 이어 오시마 나기사의 두번째 회고전을 열었다. 이번에는 22편을 상영했다. 위에 올린 내용은 좌담의 극히 일부의 내용이다. 오시마의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를 다음에는 상영할 계획이다. 아마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오시마의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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