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토니 레인즈가 만든 <장선우 변주곡>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몇 개의 주제들을 나열한 다큐멘터리에서 흥미를 끌었던 것은 그가 했던 말들이나 그의 영화적 테마들이 아니었다. 조금은 볼품없는 그의 몸과 횡설수설하는 말투, 흐트러진 머리카락 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영화가 그의 몸의 태도와 자세를 닮았다고 여겼다. 그의 몸, 그의 태도, 그의 몸짓들은 영화의 무질서함, 흐트러짐, 권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영화의 시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영화를 시작한 감독이었다. 그가 제기한 ‘열린 영화’가 그러했다. 장선우는 1980년대 초에 쓴 한 글에서 ‘카메라는 독립된 인격이 되어 상대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걸며 발언하고 다투기도 할뿐만 아니라, 대상이 비어 있을땐 그 자리를 메꾸고 대상이 울고 있을 때 그는 광대처럼 춤추기도 하며, 신명을 불지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카메라가 대상에 참여하고 논다는 말은 그 실천적 검증이 없이 매우 불투명한 가설이긴 해도, 열린 영화가 지향해야할 카메라의 존재양식이다. 그것을 우리는 신명의 카메라라고 해두자’라고 말한다. 카메라와 대상은 의지하고,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며, 판을 이룬다. 카메라는 기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인간화하는 것이다. 시선의 무한한 자유, 카메라의 눈이 환상적인 것을 포기하고 특권적인 것을 거부하고, 대상과의 나눔에 있어서 직선적인 것에서 원형적인 것으로, 소유가 아니라 나눔을, 유폐가 아니라 해방을 원함으로써 나온다. 카메라와 대상과의 관계, 그것의 존재양식이 중요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그리하여 일관되게 카메라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때론 불쾌하게 느껴질 이미지들이 전시되고, 차가운 카메라의 시선 앞에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의 떨림과 제스처가 알몸으로 전시된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가난한 난봉꾼과 매맞는 여인에게, <경마장 가는길>에서는 비루한 유학파 지식인과 그를 회피하는 J에게,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소심한 삼류 소설가와 엉덩이 하나로 출세한 여배우에게, <꽃잎>에서는 잡역부와 가녀린 소녀에게, <나쁜 영화>에서는 철없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에서는 몰락한 예술가와 막 나가는 여고생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실 <나쁜 영화>에서 카메라 스크립터를 비추는 시선이나 <거짓말>에서 제이가 인터뷰를 하며 몸을 움츠리는 모습은 그들의 파격적인 정사신보다 더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아마도 장선우는 홍상수 이전에 '비루한 인간들'(푸코의 표현)을 영화에 담아낸 첫 감독일 것이다. 그의 영화에는 물론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거짓말>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남녀가 공원을 거닐면서 나무들을 거두는 장면이다. 불필요한 물건들, 하지만 두 남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사라지고 쓸모없이 남겨진 것들, 시간들. 장선우의 영화는 아마도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그 자신이 긴 침묵의 상태에 있다.(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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