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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에디토리얼] 영화의 시민 본문

상상의 영화관

[에디토리얼] 영화의 시민

Hulot 2012. 5. 6. 19:45

 


지난 4월 24일. 에이모스 보겔이 세상을 떠났다. 영화를 전복예술로 사고했던 영화사가이자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 큐레이터였던 이가 작별을 고한 것이다. 폴 크로닌의 <전복예술로서의 영화: 에이모스 보겔과 시네마16>(200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무슨 생각으로 뉴욕의 가장 중요한 영화클럽이었던 ‘시네마 16’을 시작했는지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뉴욕의 상황이 이랬다. "1940년대, 심지어 뉴욕에서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마음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러가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흥미로운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적은 규모에 개인적인 기획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험적인 작품이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곳은 없었다."

1947년, 에이모스 보겔은 상영될 기회가 없었던 ‘전복적인 영화들’을 관객에게 보여줄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시네마 16’이란 전설적인 영화클럽이 개관했다. ‘성숙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멤버쉽으로 운영하는 클럽이었다. 그는 대안적인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처음에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16미리 영화들을 선보였지만, 나중에는 폴란스키, 카사베츠, 클루게, 오시마 나기사, 오즈, 리베트, 레네 등의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모험적인 시도였지만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가 새로운 관객을 만든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마 16’은 이미 이런 영화들을 알고 있는 배타적인 소규모 집단의 매니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극장에 걸린 상업영화들이 영화의 전부라 여긴 관객들에게 그런 시시한 영화들보다 흥미있고 재미있는 중요한 다른 영화들이 이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영화들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세상도 꿈꿀 수 있다. 존 카사베츠의 첫 번째 영화가 나오기 10년 전에(카사베츠의 <그림자들>도 ‘시네마 16’에서 소개되었다) 에이모스 보겔은 이미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모스 보겔의 사망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던 2005년 4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해 서울아트시네마는 2002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안국동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낙원상가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The Last Picture Show’란 고별 프로그램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예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었다.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의 <시티즌 랑글루아>(1994),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도 이때 함께 상영했었다. 영화의 새로운 땅에 이주하긴 했지만 알고보니 우리에겐 입국비자도 영주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년만에 불법이민자처럼 추방을 당했다.

2012년, 5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낙원으로 이주한지도 이미 7년이다. 시네마테크는 그동안 다른 영화들을 꿈꾸었고 다른 세상을 원했다. 그 결과 무엇이 변했고, 우리들에게 어떤 것들이 남았는가를 생각한다. 에이모스 보겔은 극장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지면 영화의 전복이 시작되기를 원했다. 전복의결과, 우리는 다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곳은 입국비자가 필요없는 곳이다. 새로운 세계는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할 새로운 시민을 원한다. 영화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을 보고 자유롭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성숙한 영화의 시민이 필요하다. 되돌아보면 지난 10년의 시네마테크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국비자를 발급해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의 시민권을 획득하려 했다. 그 결과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영화시민이 되기위한  충분한 권리를 이미 획득했는가? 혹은, 우리는 영화시민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