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경력의 가장 큰 전환점의 작품이 <공동경비구역JSA>(2000) 직전에 만들었던 단편영화 <심판>(1999)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전환점이란 ‘배우들과의 의사소통이 뭔지, 이 소통이 영화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또 배우들이 얼마나 존중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전작들의 의미 있는 실패 이후에 단편작업은 이어지는 장편영화에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하지만 단편의 의미는 장편과의 연속성의 관점만이 아닌 도리어 그것으로부터의 이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령, <심판>을 만든 후에 당시 월간잡지 ‘키노’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찬욱은 단편을 만들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충무로에서 일하다 보면 상업적 부담감이 커서, 아예 처음의 소재선택부터 포기하게 되는 이야기 거리가 많이 있다. 내게는 적어도 영화사에 손해는 보이지 말아야겠다. 관객에게 폭넓게 사랑 받고 싶다는 심정이 있으니까. 그렇게 누락된 소재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편 영화로 출발한 사람이 만든 희귀한 단편영화’라는 당시의 평은 지금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그만큼 그의 단편 영화의 수가 증가했고, 장편 감독들의 옴니버스 영화들이 이제는 대중적인 일이 되었으니), 여전히 상업적 부담 때문에 누락된 기획이나 소재를 단편화한다는 것은 작업의 정당성으로 남아 있다(물론 단편 작업의 대부분이 제안과 기획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당시 이런 단편작업을 연결되는 컨셉트로 모아 100분 정도 분량이 되면 한 편의 옴니버스 장편이 되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물론 그런 일이 이후에 벌어지진 않았다. 의도와는 다르지만 이번 미장센 영화제의 특별전에서 그의 단편들을 묶어 마치 한 편의 옴니버스 장편처럼 상영하는 일은 그 때의 소망을 실현하는 기획이다. 

 

하지만, 막상 그의 단편들을 묶어놓고 보면 이들이 연결되는 공통의 컨셉트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심판>이 당시의 실용적 의미- 이어지는 장편의 실험대로서의 기능성-를 넘어서 다른 단편들과 합류해 박찬욱의 우주의 다른 은하계를 형성하는지도 질문으로 남는다. 만약 박찬욱의 영화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는 ‘박찬욱의 아카이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의 단편들은 이런 아카이브의 어디에 목록화 될 수 있을까? 혹은 단편들로 구성된 은하계는 그동안 알고 있다고 여겼던 박찬욱의 아카이브에 어떤 변화를 발생시킬 수 있을까? 이런 몇 가지 질문들은 그의 단편들을 장편의 연속성을 위한 매듭이나 커넥터, 혹은 (상업적) 중심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것들의 수동적 종합 그 이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일단 <심판>에서 우리가 보는 ‘쇼크 컷shock cut’에 대해 이야기기를 하고 싶다. ‘쇼크 컷’이란 리처드 페나가 박찬욱 영화의 형식성을 일컬어 불렀던 표현이다. 그는 “박찬욱은 절대로 내러티브의 연속성이 그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예상 밖의 이미지들을 중단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캐릭터들이 소개되고, 새로운 장소가 공개되며, 새로운 시점이 생겨나는 이 모든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재구성하도록 만든다. 박찬욱의 영화는 숏들과 신들을 연결해 점점 더 큰 단위의 조직화된 실체로 발전시키는 일 대신 관객을 끊임없이 내러티브 밖으로 끌어내면서 고전적 개념의 연속성 외의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심판>은 말하자면 20세기를 붕괴와 파멸로 끝내는 영화다. 이를테면 90년대 한국사회를 둘러싼 붕괴들의 가시화. <심판>을 이루는 배경적 세계는 사회주의의 붕괴와 이데올로기의 종언(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시작해 경제적 파탄으로 이어지는 90년대의 한국사회의 재앙들이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1995년의 대구 지하철 참사와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의 IMF 사태, 그리고 세기말의 종말론과 이상기후의 재난들. 그렇다고 이런 장면들이 촬영된 것은 아니고, 단지 텔레비전 화면들만이 나열될 뿐이다(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이후 <올드보이>의 텔레비전 화면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어 대형 참사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20대 여성의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 영화는 이 밀실과도 같은 공간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여기에 죽은 여자가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쌍의 부부와 염사가 있다. 누구의 딸도 아닌 시체.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갑자기 나타난 젊은 여자가 이 부부의 잃어버린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두들 죽은 여자를 자신의 딸이라 말하면서 장작 살아있는 나를 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난무하는 증언들에 이어지는 갑작스런 지진과 죽음. 


그런데 이들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기심인가, 혹은 어떤 악의 힘들인가? 원인규명은 다른 설명을 요할 테지만, 무엇보다 그전에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시체를 말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시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세상에는 여러 방식의 시체 처리법이 있다. 나중에 우리는 <파란만장>이나 <청출어람> 같은 작품에서 다른 방식과 만나게 될테지만(무속적, 혹은 동양적 방식?), 그 전에 흥미를 끌었던 것은 초현실주의자의 용법을 슬쩍 빌려 표현하자면 ‘우아한 시체Cadavre Exquris'이다. 이는 실제 시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있어야 하지 않은 곳에 있지 말아야할 것이 출현함으로써 일어나는 충격을 의미한다(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데페이즈망depaysement). ‘쇼크 컷’이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이다. 이는 시각과 느낌, 상식, 고정 관념을 무산시키는 붕괴의 감각과 새로운 사고 회로를 작동시킨다(이러한 ‘우아한 시체’ 혹은 데페이즈망의 기법이 가장 충실한 사례를 꼽자면 단연 <박쥐>일 것이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는 링거액 튜브나 보조기구를 동원해 피를 보충한다. 종종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인 의식과 동반되기도 한다. 가령,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에 처한 남자의 고해성사를 치르면서 그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 먹는다). ‘우아한 시체’는 하나의 평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서로 동떨어진 두 개의 실재의 우연한 만남, 이질적인 것의 우연한 만남을 의미한다. 가령, 배터리가 빠진 면도기, 비워져버린 맥주 캔, 끊어진 대교, 얼굴이 훼손된 시체, 잘려진 다리, 인공수족 등의 출현들. 이런 관점에서 <심판>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 하나를 꼽자면 서로 자신의 딸이라며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시체 옆에 좌우 나란히 들이미는 두 개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혹은 누구의 딸일 수도 있는 말하지 못하는 시체. <심판>의 밀실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재앙은 우리를 ‘이후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심판의 시간일 것이다. 아마도 최종심판의 날.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처벌이 아니라 붕괴의 경험이 초래하는 계기적이고 직선적인 시간, 혹은 이야기적인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경험이다. 어쩌면, 이후의 박찬욱의 영화 속에서 전개될 붕괴의 이야기들은 이 커다란 붕괴(말하자면 20세기의 붕괴)라는 이후의 시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섯 개의 시선>에 실린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는 박찬욱의 (장편)영화를 특징짓는 밀실성이라는 감금의 모티프와 분열적인 혼란스런 정체성의 특징을 다른 시선으로 표현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단편은 서울의 한 섬유공장에서 보조 미싱사로 일하던 네팔 노동자 찬드라가 공장 근처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고는 계산을 치르지 못해 경찰에 끌려간 후 한국어를 더듬는 그의 모습 때문에 행려병자로 오해 받아 6년 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된, 있을 수 없는 일화를 극화했다. 이 영화에서 찬드라는 화면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되돌아간 네팔 현지의 마을에서 그녀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 카메라가 대신 그녀의 자리와 시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를 두고 '이방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회'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효과는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녀를 타자가 아닌 한국인으로 착각했다는 것에 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찬드라씨’라는 감독의 말은 그녀의 얼굴을 찾는 질문이지만, 이는 동시에 그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녀가 놓인 상황과 처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즉, 이 영화는 한 인물이 진실로 누구이며 어떤가를 타자의 관점에서 그려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상황에 놓이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에서 복수의 관계 속에 위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의 딸인지 모호한 관계에 놓였던 시체처럼. 


찬드라가 감옥에 감금되었던 상황을 언급해야만 할 터인데, 감금은 <올드보이>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단편에서도 꽤나 중요한 설정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감금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전한 그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감금은 그의 생의 연속성을 붕괴시키고 다른 세계와 복수의 관계를 맺게 한다. <쓰리, 몬스터>의 단편인 <컷Cut>(2004)은 이러한 문제를 가장 추상적인 차원으로 고도화한 작품이다. 능력 있고, 부유하고, 착하기까지 한 인기 영화감독은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의 과거 영화에서 엑스트라를 연기한 어느 괴한의 협박과 마주한다. 흥미롭게도 그의 집은 이제 또 하나의 세트장으로 변모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당한다. 감금된 그는 이제 악몽과도 같은 기이한 세계와 마주한다. 이 환각적인 세계에는 미치광이들뿐만 아니라 이후 사신들, 무당들로 넘쳐날 것이다. 바로크적 무대와도 같은 통일성 없는 이 세계는 변화무쌍한 형상들의 세계이다. 그의 집은 영화를 찍던 스튜디오의 세계와 기묘하게 뒤집혀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마치 세상의 사물들이 거꾸로 뒤집어진 거울에 비쳐진 평행하는 세계처럼 보인다. 도플갱어들이 출물하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뱀파이어의 세계. 여기서 온갖 고정된 형상들은 무너질 것이다. 현실이란 비틀거리고 뒤집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가히 연극무대장치처럼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다. 그가 집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다시 영화가 촬영되는 세트로 되돌아간 것이다. 연극과 무대장치에 놓인 인물들은 어떤 의미로든 배우이며 그들의 역할은 쉽게 뒤바뀔 수 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어 엑스트라가 연출자가 되고, 연출자인 감독은 엑스트라가 되어 저열한 연기를 해야만 한다. 내부와 외부가 불분명한 무대의 세계는 그런데 어떤 악마가 관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단지 끔찍한 꿈을 꾸었던 것인가? 





바로크적 무대의 변신의 세계. 변화무쌍한 형상들의 세계에서 우주는 통일성을, 대지는 고정성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인물들은 정체성을 상실한다.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이런 분열적 경향은 작품만이 아닌 감독에게까지 확장되어 복잡화된다. 가령, 박찬욱-박찬경이라는 연출가의 더블화. 여기서 앞서의 ‘우아한 시체’는 더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초현실주의자들의 창작의 수법인 ‘우아한 시체’는 복수의 창작자들이 참여해 먼저 한 명이 글을 쓰면 다른 이가 가능한 처음의 글에 역설적 형태로 충돌하도록 글을 작성하는, 조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최대한의 창작의 모험을 시도하는 방식이다. 박찬욱-박찬경의 단편작업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란만장>(2010)은 그 새로운 시작점의 작품이다. 이제 ‘우아한 시체’는 애도의 대상으로, 무속 신앙으로 한을 달래주어야만 한다. 깊은 밤, 강가에서 낚시를 하던 낚시꾼에게 고기가 아니라 소복 차림의 여인이 걸려든다. 안개가 자욱한 숲의 강가에서 남자는 낚싯줄이 엉켜 서로 묶인 꼴이 되는데, 나중에 우리는 이 상황이 죽은 남자의 진혼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복 차림의 여인은 무당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서 흔들리고 움직이는 사물들(이를테면 바람에 날아다니는 갓)처럼 카메라는 비틀거리고 뒤집어지면서 두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이전의 영화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연극은 밀실의 극장을 떠나 자연으로 확장되었다는 것. 바로크적 무대극을 대신하는 것은 전통적인 무속 신앙이다.  


<청출어람>(2012)은 우리의 소리를 다루는 단편이다.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지 못한 소녀와 스승이 득음 연습을 위해 초겨울 산행을 하다 스승이 죽음에 이르고 소녀는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청출어람>은 밀실을 떠나 자연적 세계가 무대이다. 이야기와 정보는 <파란만장>보다 단순한 편이다. 대신 소리의 정서와 기분을 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풍경에 보다 주목할 만하다. 에이젠슈테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은 ‘눈의 음악’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영화의 소재인 소리를 풍경으로 표현해 ‘눈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공간적인 소실점을 갖지 않는 동양화는 또한 그 평면성에 의해 관객의 시선을 표상 공간에서 벗어나게 하는 시선의 운동을 요구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풍경화 속을 유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런 ‘눈의 음악’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서 ‘소리=그림=풍경’이라는 삼위일체가 성립한다. 


<파란만장>과 <청출어람>은 아마도 다른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무속 신앙이나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해 덧붙일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이 두 편의 영화에서 특별하게 눈을 끌어당기는 공통된 움직임에 대해서만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가령, 날아다니는 갓과 학의 움직임. 갓과 학의 움직임은 무언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것을 영화에 끌어온다. 여전히 두 편의 영화에는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현실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 혹은 이승과 저승의 세계. 하지만 <파란만장>에서의 갓과 <청출어람>에서의 학은 이 두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청출어람>에서 학의 비상은 스승의 죽음 이후에 풍경의 세계에서 시작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실점이 상실된 풍경화 속을 날아다닌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들의 세계를 오가는 것. 일체의 분할을 횡단하는 운동의 힘. 이러한 비상飛上이야말로 아마도 단편영화가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월경의 경험일 것이다. (김성욱) 

 

* 올해 미장센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단편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특별전이 열린다. 미장센 단편영화제의 카탈로그에 쓴 글이다.


저작자 표시
신고
  1. . 2017.10.12 20:41 신고

    영화에 무지한지라 읽는데 어러움이 조금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영화도 한 번 보고 싶네요.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