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는 여성의 누드를 자주 영화에 담아냈다. 여인의 벌거벗은 몸이 매혹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에로틱한 응시의 대상이거나 이야기의 특권적인 순간을 표지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몸에 남성이 에로틱한 환상을 품는 경우도 거의 없다. 60년대 고다르에게 여성의 누드는 ‘매춘’이란 주제와 연결되곤 했었다. 이때 여성의 몸은 돈과 교환되어 상품처럼 양도되는 소비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냉정한 자본주의 교환에서 포르노그래픽한 환상이란 있을 리가 없다. 상품가치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향락에의 몰입이란 끊임없이 비켜가기 마련이다. <그녀의 삶을 살다>에서 여성의 몸은 도리어 욕망을 얼어붙게 한다. 그 빈자리에 <알파빌>에서처럼 사랑의 언어가 들어설 때도 있다. 정열도 부족하고, 관능적이지도, 도발적이지도 않은 즉물적인 몸의 노출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도 엿보이는데, 여기서 여성이 셔츠를 들어올려 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에로티시즘과는 하등 상관없는 가혹한 노동의 몸짓이다. 그럼에도 왜 포르노그래픽한 이미지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섹스가 영화의 한계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영화에서 섹스의 표현은 정말로 포르노그래피로 한정될 것이고, 섹스는 평범한 영화가 다루어야 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터부시되고 봐서는 안 될 제한구역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편의 영화들에 내려진 제한상영가 등급판정이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아트시네마 또한 2006년 <숏버스>의 상영으로 곤혹을 치러야만 했었다. 등급을 받지 않은 영화, 혹은 제한상영가를 받은 영화들의 상영에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미 2008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열린 ‘감각의 독립’과 관련한 특별전에서도 중요하게 제기했었다.  최근의 상황은 여전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거대한 불씨로 남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도리어 더 가혹한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의 포럼섹션에서는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시 한 번 말하려 한다. 예술영화관의 관계자들, 법조인들, 영화인들과 함께 제한상영이란 등급 때문에 예술영화관에서조차 일부 영화들이 상영 불가한 것을 문제 삼으려 한다. 제한상영가 영화나 등급을 받지 않은 영화들의 상영이 예술영화관에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할 생각이다. 섹스는 우리 삶의 일부이고, 삶의 모든 것은 또한 영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성욱)

저작자 표시
신고
  1. 관객 2014.08.10 23:52 신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여기에 글 남깁니다.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상영 후 영화 해설도 가끔 하시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귀찮은 부탁이 될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한 번 설명해 주시는 것으로 관객이 다 알아 듣기는 힘든 것 같아요. 이 블로그에서 올려 주신 글을 다시 읽어보면 더 많은 참고도 되고, 질문을 남길 수도 있고 해서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럼 올려주시길 기대하며, 끝으로 친절한 영화 해설 감사드려요~~:)

    • Hulot 2014.08.28 23:58 신고

      가능하면 그럴려고 하는데 말로 하는것과 글은 또 달라서 쉽게 올리지는 못하고 있네요. 정리될때마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