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내가 쓰는 메일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의 아이디는 대체로 Hulot이다. 버려진 숲처럼 방치되고 있는 이 블로그의 이름도 “Cinematheque de M.Hulot”이다. 가끔 원고를 청탁하는 기자나 강의를 의뢰하는 분들에게 전화로 메일 주소의 알파벳 단어를 또박또박 불러줄 때마다 다시 환기되곤 하는 이 이름은 대체로 '훌로' 혹은 '휠롯'으로 불리곤 했다. 정확한 프랑스식 발음은 윌로이다. 시네필들은 대체로 알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괴상한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하지 못한다. 물론 나 또한 그가 정확하게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엘르 잡지의) 에디터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도 내가 왜 윌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90년대 초에 처음 비디오로 그를 만났던 것 같다. 내가 쓸데없이 본격적으로 영화에 빠져들던 때이다. <윌로씨의 휴가>라는 작품이었는데, 발랄하긴 하지만 큰 웃음을 만들기엔 재주가 없는 프랑스에서 백년에 한 번 나올까 싶은 자크 타티라는 영화감독이 1953년에 만든 작품이다. 윌로는 타티가 연기한 그의 분신이다. 영문자막이 들어간 미국판 비디오였는데, 사실 자막이 필요 없는 대사가 거의 없는 무성에 가까운 영화였다. 그 당시 나는 새벽에 두 세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을 의식처럼 치르고 있었는데, 불안한 정신을 추스르려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해야 했고 할 일을 찾아야만 하는 낮의 일들은 대체로 피곤했고, 때마침 누나가 구입한 비디오플레이어 덕분에 밤에는 눈을 뜨고 꿈을 꿀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지만, 코미디와 뮤지컬이 새벽의 주요 목록이었다. 내 앞의 미래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계획 없는 삶에 그래도 가급적 진지한 영화는 새벽에는 피했던 탓이다. 그때 헤매었던 비디오 무덤사이로 윌로라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어릴적 이끌렸던 배우들의 목록은 많았지만 성인이 되어 무심하게 매혹을 느낀 첫 아저씨였다. 

 

그는 시동이 종종 꺼지고 소리만 요란한 20년대산 구식 아밀카를 몰고 남들처럼 바캉스를 떠나는 평범한 아저씨로 나타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들처럼'이다. 그는 외톨이지만 그렇다고 채플린처럼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떠나는 방랑자는 아니다. 해변을 찾는다고 여자를 꼬드기거나 낭만을 즐기는 식의 그 흔한 동기도 없다. 반겨줄 친구나 함께 시간을 보낼 애인도 없다. 남들처럼 그도 휴가를 떠났을 뿐이다. 이름도 없고 약간은 격식 차린 '무슈'라는 표현이 앞에 붙거나 '나의 삼촌' 같은 식의(그 다음의 영화제목이기도 하다), 아이가 누군가에게 말할 때 호명되는 식으로 등장한다. 사실 그는 언제나 타자의 눈과 말을 빌려 존재성을 얻은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면의 실체가 불분명한 존재. 한 여름 바캉스에 그가 처음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캉스의 '바쿰'이라는 어원의 의미가 그러하듯, 그는 텅 빈 존재이다.

 

윌로는 불평 없는 과묵한 아이이거나 철없는 어른이다. 여기에 축복과 고독이 교차한다. 아이들은 어른의 손에 이끌려 바닷가로 놀러왔지만 휴가가 끝나면 다시 부모의 손에 강제로 학교나 집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바캉스에서 탄생한 월로는 되돌아갈 곳이 없다. 그가 떠났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윌로는 매일 바캉스를 떠나거나 즐기는 축복받은 아이이자 아직도 바캉스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여전히 해변에 머물러 있는 미련한 어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모두가 떠난 해변에서 휴가가 끝났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계속 머물러 있다. 내가 그에게 속절없이 매혹됐던 이유다. 내 젊음의 축제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어둡지만 위안을 얻을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얼마 후 내가 발을 들이게 된 영화라는 세계는 휴가철의 해변처럼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 됐지만, 나는 축제가 끝난 해변에 있는 윌로처럼 오래된 극장에 앉아 있다. 염원하던 일이기도 했다. 윌로는 내가 매혹에 빠진 그림자, 나의 영무자影武者이기 때문이다.  /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엘르 잡지 에디터가 '내가 매혹된 대상'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한 것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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