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CINEMATHEQUE DE M. HULOT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 세계는 거대한 무대이고, 무대는 또한 세계이다 본문

영화일기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 세계는 거대한 무대이고, 무대는 또한 세계이다

Hulot 2008. 2. 15. 10:25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끝난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지금 한창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미 일주일의 상영이 지났고 이제 상영의 후반부가 진행되고 있으니 이 글은 남은 시간 동안 혹시나 미넬리의 영화를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이 뛰어난(게다가 재밌기까지 한) 작가의 영화를 놓치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이 될까를 미리 애석해하며 서울아트시네마로 '춤 한 번 댕기러' 오시라는 일종의 발길을 재촉하는 글이다.

빈센트 미넬리 하면 '뮤지컬 영화의 제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금만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게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넬리는 그의 영화적 삶을 통해 4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뮤지컬은 16편으로 대부분 그의 영화적 경력의 초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뮤지컬에서 성공적인 작품을 남긴 이후 그가 진정으로 작가로서 창조성을 발휘하며 원숙한 영화를 만든 것은 중후기로, 그 대부분은 오히려 멜로드라마, 코미디, 전기영화 등이다.  

영화제작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할리우드 내막 드라마의 걸작인 <악당과 미녀>(52)나 그가 가장 영화화를 갈망했던 작품으로 광기에 취해 홀린 화가의 생애를 그린 반 고흐의 전기영화 <삶의 열정>(56), 당시로서는 가장 도전적인 주제였던 동성애를 기저에 깔면서 복잡한 애증 속에서 흔들리는 유부녀(데보라 커가 명연기를 보여준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차와 동정>(56), 이미 장르적 주기를 다한 스크루볼 코미디를 그레고리 펙과 로렌 바콜을 주인공으로 재구성한 <디자이닝 우먼>(57)을 보면 그의 영화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채로운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미넬리는 주로 현실, 사회의 억압으로 고통 받는 주인공이 자기표현의 수단(그 대부분은 예술적 표현과 관련된다)을 찾아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여기서 개인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들은 심리적 고통을 겪으면서 기이한 의식의 흐름 안에 놓인다.  

이를테면, 1956년에 빈센트 미넬리는 반 고흐의 삶을 그린 <삶의 열정lust for Life>이란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는 국내에도 출간된 어빙 스톤의 동명의 전기를 바탕으로 고흐의 반생애를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젊은 시절 화가를 지망했던 미넬리는 반 고흐의 삶을 영화로 담아낼 기회를 오랫동안 꿈꿨는데 광기에 취한 화가의 생애에 매료됐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현실에서 억압을 받은 인물이 예술적 표현수단을 찾아내는 것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이야기에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흐의 삶은 예술적 창작과 작가의 정체성과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흔히 빈센트 미넬리를 고전적 작가의 계보에 위치시키지만, 사실 그는 단언하자면 니콜라스 레이가 제대로 등장하기 전에, 혹은 사무엘 풀러나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할리우드가 처음으로 갖게 된 현대적인 작가의 계보에서 거의 앞줄에 위치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스튜디오에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영화를 찍은 것이 의식적이 된 작가들의 계열, 혹은 작가적 정체성의 문제를 화면에 기입하는 자기반영적인 특성을 이미 화려한 뮤지컬의 이면에 혹은 장르영화 안에 심어놓고 있었다. 고다르가 '뮤지컬은 영화의 에센스다'라고 말할 때, 미넬리는 그런 영화의 에센스를 가장 충실하게 시각적 표상에 담아내려 한 사람이었다. 

<삶의 열정>의 후반부 쯤에서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상하는 장면은 꽤나 강렬한데, 무엇보다 색체의 활용이 도드라질 만큼 눈에 띈다. 미넬리는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기조가 되는 색조를 정해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은연중에 드러내는데 이를테면 격정, 정욕, 흥분은 빨강으로 광기와 불안은 초록 등을 활용해 표현했다. 

예술가의 열정적 삶과 표현적 수단으로서의 색채에 대한 관심은 빈센트 미넬리 영화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그의 대표작인 진 켈리가 주연한 <해적>(48), <파리의 미국인>(51)과 프레드 아스테어가 주연한 <밴드 웨건>(53)과 같은 뮤지컬 영화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넬리는 <파리의 미국인>에서 자신의 고급예술에의 취향을 회화나 연극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진 켈리의 모던한 댄스로 재현한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파리에 남아 그림을 그리는 미군 병사인 제리 멀리건(진 켈리)의 예술적 자의식과 로맨스를 다룬 이 영화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진 켈리가 겪는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틀루즈 로트렉, 르누아르 등의 그림을 배경으로 ‘회화와 같은 화면plan-tableau’에서 벌어지는 강렬한 춤으로 그려낸다. 다양한 그림을 인용한 화려한 세트는 예술가의 고통뿐만 아니라 뮤지컬의 꿈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족이지만, <파리의 미국인>은 진 켈리의 매혹적인 춤이나 화려한 세트에 흠뻑 빠지는 것 못지 않게 진 켈리의 친구인 피아니스트 아담 쿡으로 분한 오스카 르방의 조연아닌 주연의 생뚱맞은 시니컬한 연기가 한 몫한다. 특히 한 여자를 두고 서로 사랑에 빠진 두 명의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안절부절 못하다 연신 두 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커피를 마시고, 탁자 위의 딴 사람의 술잔을 들이키는 가히 아크로바틱한 연기는 큰 스크린에서 봐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배우나 연기에 전혀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그런 연기라면 정말 한 번 욕심을 내보고 싶을 정도다.
   

<밴드 웨건>은 왕년의 은막의 스타였던 프레드 아스테어가 다시 뮤지컬 무대로 복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인데, 처음 그는 뮤지컬 연출가인 괴팍한 성격의 잭 부캐넌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뮤지컬로 만들려는 기획에 참여하다 좌절된 후, 다시 과거의 레퍼토리를 재구성한 대중적 뮤지컬을 선보여 성공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에서 가장 예쁜 각선미를 지녔던 시드 채리스가 공원에서 달빛을 맞으며 ‘어둠 속의 춤’이라는 음악에 맞춰 숨 막힐 듯한 낭만적인 춤을 선보이는 순간이다. 공원을 거닐 던 두 남녀는 음악의 선율에 따라 조금씩 스텝을 밟다가 자연스럽게 춤의 세계로 빠져든다.

미넬리에게 음악과 춤은 사랑, 혹은 예술적 열정을 지닌 인물들을 현실에서 꿈, 혹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일종의 변환장치이자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경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센트 미넬리는 위대한 꿈의 작가이자 삼투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예술적 열정에 홀린 인간,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몽유병 상태나 백일몽에 가까운 비일상의 세계를 현실과 연결하거나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장면을 그려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놀라움과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화면이 회상과 환상의 장면에서 여지없이 등장한다.

여기서 세계는 거대한 무대이며, 동시에 무대는 또한 세계이다. 미넬리는 회상이나 환상의 장면을 허망하고 안이한 연결을 통해 표현해내는 것을 피하면서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제스처나 말, 혹은 동작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로 이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여기서 색채가 가장 중요한 이행수단으로 활용된다. 색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예술적 열정, 꿈에 홀린 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감정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몸을 움직여 춤을 추게 되는데 이는 뮤지컬의 세계에서 색채의 현란함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월경을 이뤄낸다 미넬리는 색채의 삼투를 영화 고유의 힘으로 전환한 작가인 것이다. 이는 반 고흐가 색채에 다가갈 때 느낀 주저와 두려움, 경외심, 그의 발견과 자신이 창작한 것에 빨려 들어가는 흡수의 경향과 닮았다.
 
빈센트 미넬리의 영화에서 춤은 그래서 단순하게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이전을 표지하며 기억, 꿈, 그리고 시간의 신비에 도달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는 고전기 뮤지컬의 제왕이었지만 또한 MGM의 고다르, 혹은 데이비드 린치와 같은 작가였다. 진 켈리, 혹은 프레드 아스테어가 스크린에서 ‘춤 한번 추시겠어요’라고 속삭이든 가볍게 스탭을 밟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시네마의 매혹적인 꿈의 세계로 빠져 들어보자고 꼬드기는 마법의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밴드 웨건>에서 프레드 아스테어가 부르는 노래는 미넬리의 영화적 세계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해준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쇼에서도 일어나죠. 그게 바로 엔터테인먼트이죠." 빈센트 미넬리에게 그게 또한 영화이기도 하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서울아트시네마
카페 서울아트시네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