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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장 르누아르 회고전 본문

영화일기

장 르누아르 회고전

Hulot 2008. 2. 2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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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영화가 찾아온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이자 수많은 거장들이 주저함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 칭송한 장 르누아르는 쾌활한 순간의 신랄함과 슬픔의 익살스러움이라는 인간사의 희비극을 세밀하게 그려낸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대부분 유머러스하지만 그들의 삶의 현실에는 항상 비극적인 감성이 스며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미셸 시몽과 장 가뱅의 멜랑콜리한 연기가 그의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어떤 단일한 범주로 묶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영화 이론으로 정밀하게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불확실성과 우연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감독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만(이를테면 루키노 비스콘티는 그에게서 삶의 태도를, 프랑수아 트뤼포는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장 뤽 고다르는 그의 영화가 ‘영화 그 이상’이라고 고백했다), 반대로 영화 이론서에서 그의 이름과 작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현상은 르누아르의 영화가 우리 삶의 내적 진실에 너무나 근접해 있기에 발생하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르누아르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삶의 속도보다 배우의 연기나 이야기가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뒤늦게 따라오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감독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주제, 인물, 배우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며 ‘르누아르가 영화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생동감 있는 영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동정심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희극이자 비극이며, 인물들은 그래서 종종 ‘영웅’인지 ‘악당’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르누아르는 <암캐>(1931)에 대해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영웅도 악당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 당신들과 닮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단지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그, 그녀, 그리고 다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이런 복잡한 삼각관계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인물의 내적 진실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 인물이 타인(혹은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점을 일깨운다. 연극적인 세트와 인물의 동선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유연한 움직임은 인물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각각의 인물들의 관점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 덕분에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사소한 조연마저도 주연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다 르누아르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창조하게끔 하는 자유를 허용했고,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변경하면서, 배우의 충동과 재치에 따라 영화를 즉흥적으로 창조해냈다. 르누아르는 미국의 존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 무엇보다 ‘인물(배우)’을 제일 중요시한 감독으로, 인물을 영화의 원천이자 질료, 방법이자 재료로 여겼다. 그들의 확신, 소심함, 애정, 욕망의 순간적인 흐름은 모두 인물들의 표정과 행위를 통해 표현되지만 이런 감정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모호하고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자연과 연극, 리얼리티의 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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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르누아르는 모든 영화 감독들이 내적인 리얼리티(스튜디오 내부에서 구성된 세계의 리얼리티)와 외부적인 리얼리티(자연 세계의 리얼리티) 사이에서 싸움을 벌인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 안에 이 두 가지 리얼리티를 자연과 연극이란 두 축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구성해냈고, 거기에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장 르누아르의 자연에 대한 친화성은 그가 자연, 특히 강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보였던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임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후기작 <풀밭 위의 오찬>(1959)은 그런 ‘르누아르적인 감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강의 흐름은 곧바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대변하며 인물들의 삶을 우연과 변화로 안내하고, 인간의 틀에 박힌 세계에 자유를 선사한다.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1932)에서 부랑자 부뒤는 사랑하는 개를 잃어버린 슬픔 때문에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부르주아 서적 판매상 레스티뇨아의 구조 덕분에 살아나 부르주아 세계로 편입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 부뒤는 레스티뇨아의 하녀와 강가에서 결혼식을 벌이는데, 그 순간 보트가 전복되어 부뒤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시체처럼 강을 따라 표류한다. 이 돌연한 사건 덕분에 부뒤는 부르주아적인 겉치레를 모두 털어버리고 예전의 부랑자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자연은 또한 인물들의 비극적인 감성을 불러오고, 그들을 운명과 죽음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화할 수 없으며, 자연은 결코 이상적인 천국이 아니다. <토니>(1934), <인간 야수>(1938), <풀밭 위의 오찬>에서 자연은 운명과 죽음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인간의 삶에 중립적이기에 대단히 냉정하기까지 하다.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토니>는 한 무리의 이민자들이 기차로 마을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예의 그 장면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 사이에 이민 노동자 토니의 잔혹한 죽음이 놓여 있다. 토니는 범죄자로 몰려 강을 가로지르는 철로 위에서 사냥꾼의 총에 희생당한다. <인간 야수> 또한 시골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기차의 질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기관사인 자크 랑티에(장 가뱅)는 사회의 기계적인 힘, 통제 불가능한 감정, 악성 유전자가 만들어낸 덫에 걸려 신음하고, 마침내 자살한다. 르누아르의 자연주의가 다분히 정치적인 뉘앙스를 풍기게끔 하는 대목이다. 물론 그의 행동주의적인 휴머니즘과 좌파적인 정치 성향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 작품은 193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두 편의 작품, 즉 노동자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 <랑주씨의 범죄>(1936)다. 세상물정 모르는 몽상가 랑주가 악덕 편집장인 바탈라가 기차 사고로 사망한 뒤 존폐 위기에 처한 잡지사를 직원들과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노동자 공동체를 상징하는 세트, 360도 팬 촬영과 심도 깊은 화면이 대단히 인상적인 걸작이다. 1935년 10월에 결성된 프랑스 인민전선에 대한 르누아르의 희망이 담겨 있는 이 영화와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라 마르세예즈>(1938)에서 르누아르는 유럽 사회를 잠식한 파시즘에 대항하며 인민주의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장 르누아르는 대상 세계의 표면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거나 그것을 하나의 관점에서 묘사하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인물들의 내적인 진실에 도달하려 애썼다. 그가 영화의 형식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나는 자연에 근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연은 만물이며,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수없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를 비추는 각양각색의 프리즘처럼 영화를 다뤘고, 연극적인 형식, 방법, 스타일, 프레임 구성, 카메라의 운동, 세트를 통해 다양한 관계들을 표현해냈다.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파멸, 실패한 고전주의 혹은 예술가의 좌절을 그린 영화가 그의 프랑스 시절을 마감하는 작품인 <게임의 규칙>(1939)이다.



후작의 성에서 열린 사냥 파티에 참가한 부르주아들의 복잡한 삼각관계와 그들의 파멸을 그린 르누아르의 걸작 <게임의 규칙>은 30년대 말의 혼탁한 유럽 정치 상황, 인민전선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 공동체가 초래한 필연적인 파멸을 불안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로, 그는 이 영화에 음악가 옥타브 역으로 출연해 인간과 예술, 그리고 세계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영화의 한 장면에서 옥타브는 ‘난 뭐가 선이고 악인지 걱정하는 걸 관둘 거야. 사람들 모두 저마다 이유가 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라고 말한다). 딥 포커스와 롱 테이크, 연극적인 인물 배치와 카메라의 유연한 흐름은 인간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들의 집합으로 만들어낸다. 르누아르는 이 영화에서 주인과 하인, 생명체와 자동 기계, 연극과 현실, 인간과 야수, 인물과 그들의 역할을 짝패로 구성하면서 기묘한 거울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르누아르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파시즘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남부인>은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으로 캘리포니아 목화밭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려는 남자의 고투를 그려내고 있다.




르누아르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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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르누아르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작품들 중 가장 흥미를 끄는 작품들은 아무래도 30년대 영화들에 비해 소개될 기회가 적었던 그의 후기작들이다. 1951년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온 르누아르는 새롭게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황금마차>(1952), <프렌치 캉캉>(1955), <엘레나와 남자들>(1956)을 만들었는데, 이 세 편의 영화는 연극적인 형식을 빌어 과거를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황금마차>는 18세기 페루를 배경으로 코미디 델 아르트 유랑극단의 이야기를, <프렌치 캉캉>은 물랭루즈를 설립하고 캉캉을 재상연하려는 극장주의 노력을, <엘레나와 남자들>은 19세기 말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예술과 정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들은 1930년대 르누아르의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다분히 스펙터클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러시아인형처럼 하나의 세계 안에 또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매혹적인 세계와 예술, 사랑에 대한 그의 견해는 30년대 작품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는 걸작들이다.



장 르누아르는 1950년대 이래로 텔레비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것은 1960년대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 언어(특히 그는 줌 렌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를 실험한 것보다 10년 앞선 작업이었다. 르누아르는 1959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텔레비전용 영화 <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장>(1959)을 만들었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각색한 이 영화는 6,7대의 카메라와 다량의 마이크를 동시에 사용해 2주의 리허설을 거쳐 10일 만에 촬영을 끝낸 실험적인 영화로, 당시의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에 일대 혁신을 이뤄내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텔레비전 기법을 활용해 다섯 대의 카메라로 인상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풀밭 위의 오찬>(1959)을 또한 만들었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르누아르는 경제적인 필요성보다는 일종의 미학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18세기의 시계 수리공에 비유하며, 시계 수리공이 시계의 부품을 조립하듯이 다양한 힘을 동시에 조립하는 감독의 능력을 텔레비전의 시대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성영화에서 시작해 <장 르누아르의 소극장>(1969)으로 이어지는 르누아르의 영화는 마치 삶의 극장이란 거대한 무대에서 자연, 인간, 사회가 서로 울림과 하모니를 이루는 웅장한 연주와도 같다. 거기엔 구태의연한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래서 그의 영화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은 자크 리베트가 하워드 혹스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그저 그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 보는 것’이리라.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2002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장 르누아르 회고전'에 맞춰 '필름2.0'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