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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바르다, 예술가의 초상 본문

영화일기

바르다, 예술가의 초상

Hulot 2010. 12. 13. 01:29

*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0월 31일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바르다에 관한 강연을 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거의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바르다의 예술가의 초상화 작업, 혹은 그녀 자신의 자화상과 관련해서 이 영화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김성욱)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 영화는 DVD로도 출시된 적이 없고, 예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열렸던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 때도 상영되지 않았던 작품 중에 하나라서 오늘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필름 상영을 하는 날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 영화 다음에 만들어진 <아무도 모르게>라는 작품은 유일하게 한국에 비디오로 출시되었던 작품이다. 이런 상황 자체가 방금 보신 영화가 놓인 처지를 대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모르게>는 극영화이고, 그 소재가 갖는 흥미로움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알려졌지만, 사실 그 영화의 모태가 된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는 전혀 공개가 된 적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제인 버킨은 바르다의 <방랑자>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먼저 바르다에게 함께 작업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이 처음 만나게 되었고, 오늘 보신 영화가 만들어졌다. <아무도 모르게>는 실제로 버킨의 집에서 촬영한 영화다. 그 영화의 주인공 남자아이는 바르다의 아들인 마티유 드미이고, 그 친구로 버킨의 딸인 샬롯 갱스부르 역시 함께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아무도 모르게>는 픽션이지만 그 픽션이 작동되는 배경과 인물은 완전히 실제이다. 반대로 방금 보신 영화는 철저하게 실제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적 이미지나 사진 이미지, 광고 이미지 등을 통해 대부분 픽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적인 부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 아녜스 바르다라는 감독을 특징지어주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방금 보신 영화는 한 여인의 초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나 <방랑자>와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8~90년대를 지나면서 바르다의 작품이 프랑스 영화계에서 갖는 선구성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방랑자>가 나오던 1985년에는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중 한 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다. 그 둘은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표상, 재현하는 것과 관련한 증인적인 문제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자화상이라는 관점 안에서, 고다르가 95년에 만든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이라는 영화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고다르 스스로는 최초로 자신의 자화상을 영화로 만든 시도를 한 것처럼 표현하는데, 이 영화에서 바르다가 고다르보다 훨씬 더 선구적으로 이런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가 바르다와 버킨이 결합된, 예술가에 대한 자화상이라는 느낌이라면, 이번에 상영되지는 않지만 곧 개봉할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진정한 의미의 바르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여러모로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에서 중심을 이루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전에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바르다의 영화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 하면 바르다는 언제나 이면화나 삼면화를 만드는 작가이다. 그것은 주로 제단에 바쳐지는 성화에서 드러나는 형식인데, 이 영화와 <아무도 모르게>는 일종의 이면화 같은 것이다. 두 개가 쌍둥이 같은 작품인데, 하나는 픽션이고 하나는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보면 다큐멘터리는 픽션적인 것에 의해서 구성되고, 픽션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 안에서 작동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런 이중성이 영화 안에서 하나의 형상적인 틀을 갖게 되는 것이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면화나 삼면화는 한 번에 여러 개의 이미지들을 동시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버킨이 자신의 초상과 관련해서 하는 근본적인 이야기는 ‘나는 유명인이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싶다’는 것이다. 바르다는 그것이 역설이라며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건 하나의 딜레마 같다. 유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성을 가진 사람이 평범한 사람으로 동시에 표현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회화적 이미지가 표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후경의 하녀와 전경의 여인, 그 두 여자의 형상으로서 동시에 공존하고 싶어 하는 버킨의 욕구가 ‘타블로 비방’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이중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중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바르다는 초창기에서부터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제작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을 다큐멘터리나 에세이처럼 만들면서 동시에 픽션 한 편을 거기에 붙여가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안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바르다가 1954년에 만들었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경우, 두 개의 사건이 평행적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라 푸앵트 쿠르트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 부분이고, 또 하나는 헤어지기로 결심한 연인이 남자의 고향을 방문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 영화의 편집은 알랭 레네에게 맡겨졌는데, 레네는 두 개의 이질적인 것들이 평행하는 구조를 보며 굉장히 놀라워했다. 레네는 이 영화의 편집 작업이 끝난 이후인 59년에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게 되는데, 이 작품은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고다르가 만든 <비브르 사 비>의 챕터 구성 역시 분명히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바르다는 누벨바그 작가들 가운데 상당히 선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고다르나 트뤼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 작가이다. 그만큼 바르다는 많이 소개되지 못했고, 동시에 바르다를 여성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게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약화되게 되었다. 물론 바르다를 여성영화로 중요하게 평가하며 분석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틀을 넘어서서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바르다를 바라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바르다가 영화사에서 자꾸 간과되지 않나 한다.

바르다의 영화들에서는 픽션과 다큐멘터리, 혹은 현실과 예술적 표상이라는 두 가지의 이중화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벽, 벽들> 같은 영화는 현실에서의 예술적 표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술이라는 미학적 특징 안에서 현실로 들어오는 경향의 영화도 있다. 이 두 가지를 오가는 영화중에 바르다의 역량이 가장 고도로 집중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다. 그 영화는 하나의 그림에서 출발하는데, 허리를 굽히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 현실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현실들을 다큐멘터리로 찾아 나가지만, 동시에 그것은 예술적 표상과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그 영화 안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을 이삭 줍는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카메라로 이삭을 줍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는 자신의 손을 비추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카메라에 비친 표상화된 이미지로서의 손이 있고, 거기에서는 늙어감, 죽음을 볼 수 있다. 죽음, 생, 영원, 불멸, 그리고 현실과 예술적 표상 같은 여러 가지 것들이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로 계속 변경 중에 있다. 단순히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아닌, 현실과 예술적 표상 사이를 이동 중에 있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노마드적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바르다는 영화의 형식적 구조 안에서 끊임없이 이동 중에 있고 변경 중에 있는 인물들을 그린다. 그러므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은 하나의 예술적인 로드무비가 되며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든다. 그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면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다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사진과 회화 이미지들을 영화에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특히 <율리시즈> 같은 작품에서는 바르다라는 감독이 갖고 있는 지적인 풍요로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율리시즈>는 고작 한 장의 사진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사진에 등장한 인물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신화적인 부분으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예술적 종합성이 사진과 회화와 영화의 연결을 통해 발생한다. 또 한편으로는 사진과 회화적 이미지가 갖고 있는 부동성과, 영화의 움직임의 충돌 역시 중요하게 등장한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영화는 직선적으로 전개되는 시간에 의해 진행된다. 그러나 사진은 그 직선적인 시간 안에서 빼내어진 하나의 단편으로, 그것이 갖는 부동성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삶이나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바르다 영화에서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진과 이미지의 영역 안에서, 그 사진에 있는 심층적인 요소들이 아닌 이미지들의 표층적인 세계에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 다른 이미지와 추억들이 등장하게끔 만들어가는 것이 바르다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엽서들이나, 사진 이미지들은 그것이 갖고 있는 이면성들과 그것이 환기시키는 추억과 기억, 혹은 다른 이미지들과 연결되어가면서 하나의 심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심연의 상징적 표현이 해변, 바다이며 그것이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에서 강조되는 바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바르다의 영화를 하나의 제단, 혹은 성화적인 이미지들, 혹은 장례와 연결시킨다. <율리시즈>에 나오는 것처럼 사진이 환기시키는 하나의 신화, 환상, 또는 추억,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갖고 있는 죽음. 그리고 생과 죽음을 그 안에서 하나의 흔적으로서 볼 수 있다는 것.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사진에 대한 단순한 미학적 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좀 더 집약적이고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가 방금 보신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다.



이 영화는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자화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다에게 자화상을 만드는 작업은 여인의 초상, 여인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르다의 공식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부터 중심적으로 제기되어 온 것이다. <방랑자> 역시 그렇다. <방랑자>는 모나의 상을 만들어가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느강에서 발견된 여자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방랑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에게 여러 가지 상을 투영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모나의 죽음으로 시작된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에 대한 갖가지 상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런 상들을 통해서 그 여자에 접근해 가지만 완벽하게 그 여자를 해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나는 익명적 존재였고, 가공의 인물이기에 다양한 신화적인 상들이 비추어질 수 있지만, 반대로 이 영화의 버킨은 유명하고, 고유하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 유명인이라는 존재성 안에서 여러 가지 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방랑자>의 모나와 이 영화의 버킨은 상당히 유사한 구도 안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표현되는 방향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픽션에서 시작해서 상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는 실제에서 시작해서 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시작되는 자화상, 혹은 여성적 표상.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서두에 나오는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 영화는 <아무도 모르게>라는 영화와 함께 볼 때 좀 더 풍요롭게 이해될 수 있는 이면화 같은 것이다. 또 동시에 곧 개봉예정에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의 하나의 원류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개봉 시점에서 보게 되면 오늘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를 보신 것을 굉장히 흡족하게 생각하게 되실 것 같고, 그동안 많이 소개되지 못했던 이 작품의 중요성을 한 번쯤 떠올려보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정리: 박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