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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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지금 아시아 영화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KIM SEONG UK 2010. 11. 11. 11:53

 

한때 아시아 영화들이 환대를 받던 때가 있었다. 불과 십오 년 전만 해도 중국 5세대의 영화들이나 대만 뉴웨이브, 이란 뉴웨이브 감독들의 영화가 극장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다. 중국의 장예모와 첸 카이거,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차이밍량, 그리고 에드워드 양,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의 작가가 영화잡지는 물론이고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제 호시절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일본 영화를 제외하고 극장가에서 아시아 영화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21세기에 새롭게 출현한 아시아 영화들 대부분이 거대한 공백처럼 존재유무를 확인하기 힘들다. 이는 아시아 영화들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국제영화제를 방문하거나 세계 영화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영화들 대부분이 아시아 영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베니스, 베를린 등의 유명 영화제에서 연일 아시아 영화들이 수상의 영예를 얻고 있다. 태국영화, 필리핀 영화, 말레이시아 영화 등이 상찬의 대상이다. 유독 한국의 영화시장에서만 아시아 영화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 영화 대부분이 영화제의 잠깐의 환대 이후에 극장에서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수입 개봉이 없는 탓이다. 영화제의 떠들썩한 환대가 그래서 민망할 지경이다. 개봉되지 못한 영화들 대부분은 영화제 카탈로그의 적힌 홍보성 글 몇 줄로만 남아 있다. 그도 쉽게 기억에서 사라진다. 영화를 구해 보기도 힘들다.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는 일이 없다. 방송에서 상영되는 일은 기대하기도 힘들다. 유능한 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인기 있는 비평가의 글에서도 아시아 영화가 외면당하고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11월 10일부터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우리시대의 아시아 영화 특별전’은 그런 유령이 된 영화들을 모으는 행사다. 20여 편의 최근 아시아 영화들이 상영되는데, 물론 이 정도 목록으로는 아시아 영화의 무성한 밀림지대를 제대로 탐사하기에 역부족이다. 적어도 작은 나침반 정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약한 맥이라도 잡아보자는 것이다. 어디부터 울창한 숲을 통과해야만 할까. 일단, 거장의 최근작을 살펴보자. ‘지그재그 삼부작’으로 유명한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근작들은 신예작가들의 작품이상으로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수입개봉이 어려웠을 뿐 그의 최근작들은 젊은 패기이상의 실험적 정신으로 충만하다. 칸 국제영화제의 60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옴니버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의 단편을 확장한 것처럼 보이는 <쉬린>(2008)은 줄리엣 비노쉬와 이란의 유명 여배우 백 여명이 단지 스크린에 투영되는 극장의 전경을 바라보는 장면이 90분 넘게 지속되는 끈기 있는 영화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정작 영화가 아닌 관객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 혹은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얼굴이다. 카메라는 여인들의 눈동자 안쪽에 반사되는 빛과 그녀들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감정의 상태들을 비춘다. 영화가 절정에 이를 때 그녀들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순간 눈앞의 무언가에 매료된 얼굴을 촬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로베르 브레송의 말이 떠오른다.





아시아 각 나라의 정치, 사회의 문제들이 어떻게 영화에 삼투되어 있는지, 혹은 그들의 가혹한 역사를 어떻게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가를 눈여겨볼 필요도 있다. 가장 진지하고, 끔찍하고, 흥미로운 영화중의 하나는 캄보디아 출신의 리씨 팡이 만든 <크메르 루즈-피의 기억>(2003)이다. ‘S21, la machine de mort Khmre rouge’라는 원제목에서, S21은 캄보디아의 정치범 수용소를 지칭한다. S21에 수용되어 대학살을 겪은 이들의 잔혹한 기억을 독특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영화다. 이 수용소에서 1975년에서 79년까지, 1만 7천여 명의 수감자가 고문이나 심문으로 처형당했다. 리씨 팡은 대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학살박물관이 된 그 때의 장소에 모아 가혹한 날들을 재연한다. 일어났던 일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어떠한 책임도 부정한다. 학살의 증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다. 사진, 아카이브, 생존자의 증언이 있고, 신체에 남아 있는 무의식적 동작이나 기억이 있다.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정권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 고 변명한다. 감독은 그들의 신체에 배어 있는 동작이나 말, 그들이 했던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살인 기계’가 무감하게 작동했던 것을 파악하기 위한 수법이다. 한나 아렌트가 ‘범용한 악’이라 말했던 것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와 비교해 볼만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너무 늦지 않게 동시대 작가들과 만남을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작가들의 작품도 주목의 대상이다. ‘필리핀 영화의 신동’이라 불리는 라야 마틴은 1984년생으로, 약관 26세의 나이에 이미 장편영화를 8편이나 만들었다! 그는 필리핀의 식민지 시대를 다룬 <인디펜던시아>(2009)로 지난 해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부문에 진출, 세계적인 주목을 얻었다. 국내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영화에서 다루는 이슈는 진지한데도 사람들은 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편견을 갖기도 했다. 칸 영화제에 가면서 내 영화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어린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영화적 경륜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랐다. 경이로운 데뷔작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2005), 280분 동안 어린 소녀의 삶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보여주는 <상영중>(2008), 미국 강점기의 필리핀을 무성영화와 뉴스 릴 등의 역사와 픽션의 혼합수법으로 보여주는 <인디펜던시아>(2009) 등이 상영된다. 이 작가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그 젊음의 새로운 기운이 어떤 영화를 생산하고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새롭게 부상한 작가들이 있는 반면,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 말레이시아 영화계의 ‘대모’라 불린 야스민 아흐마드는 단 6편의 청춘송가와도 같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고 51세의 젊음으로 지난해 사망했다. 그녀의 유작이 된 <탈렌타임>(2009)은 말레이시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학예회를 무대로 한 청춘이야기다. 야스민 감독의 작품은 주로 민족이나 종교의 차이를 넘은 연애를 드라마의 중심으로 하면서 말레이시아 사회를 그렸다. <탈렌타임>에서도 그런 섬세한 감정과 아름다움이 무상하게 느껴질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느껴진다. 아름답고 슬프고 웃기고. 달리 말하자면 이건 삶이다. 영화의 시작부와 마지막이 대구를 이루는데, 아무도 없는 교실에 빛이 들어오고 하나씩 불이 꺼지면서 모든 것이 사라져간다. 명멸하는 빛과 시간의 무상함에서 그녀의 부재가 가슴아프게 느껴진다. 가장 즐겁고 가장 슬픈 영화다.


극히 최근까지 아시아 영화들을 제대로 챙겨보지 않은 것은 태만이다. 이들 영화를 그저 변방국가의 테두리 안에 감금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 감금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비켜가고, 넘어서면서 아시아 영화는 현대의 작가 누구나가 직면한 다양한 곤란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다. 동시대의 작가들을 너무 늦지 않게 만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