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는 '시적 리얼리즘' 혹은 '사회적 판타지'라 명명된 1930년대 프랑스 영화들이 대거 수입되어 관객들의 사랑을 얻었다. 자크 페데나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 줄리앙 뒤비비에의 <망향>(1936), <무도회의 수첩>(1937)과 같은 작품들이 특히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가령 작가인 김남천은 <망향>(첫 개봉 제목은 <페페 르 모코>이었지만, 전후에 재개봉할 때 <망향>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을 본 후의 소감을 소설에서 이런 식으로 기술한다. “어떤 날 오후, 봄이라지만, 아직도 치위가 완전히 대기 속에서 가시어 버리지 않은 날, 나는 영화 상설관에서 <페페 르 모코>를 구경하고 일곱 시경에 거리에 나섰다. 저녁을 먹어야 할 끼니때가 이미 지났으나, 곧 뻐스에 시달리면서 집으로 향할 생각을 먹지 않고, 어데 그늘진 거리나 거닐면서 지금 보고 나오는 토키가 주는 아름다운 흥분을, 고지낙하니 향락하고 싶어서, 나는 발을 뒷골목으로 돌려놓았다. 서울의 빈약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의 상념의 촉수는 ‘카즈바’의 소란하고 수상스러운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페페 르 모코>가 소프트의 뒷전을 추켜서 머리에 올려놓고, 줄이 반뜻한 양복에 색 구두를 신고, 목에는 명주 수건을 얌전히 둘러 감고서, ‘카즈바’의, 소굴을 탈출하야 계집을 찾아 부두로 향하던 그림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필름 누아르라는 표현은 원래 1930년대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시적 리얼리즘 영화 대부분은 파리의 노동자등의 하층계급에 의한 도시적 드라마가 주를 이루면서 인물의 파멸이나 절망을 강조한 연애, 범죄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한 범죄 소설의 전통을 계승했다. 특히 조르주 심농과 당시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시적’이란 표현에서의 이 영화의 시정은 그래서 일상적인 사물, 배경, 환경, 분위기 등에 있다. 대표적인 작가였던 마르셀 카르네와 시인 자크 프레베르는 현대 도시의 산업지역에서 길을 잃어버린 19세기 말의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기질은 회색빛 색조의 우울한 세계에 가까웠다. 그의 영화에서 선한 자들은 종종 범죄를 저지른다. 이는 반항이나 사랑과 같은 우발적 이유 때문이었고, 악인들은 추상적인 범죄자들이 아니라 사악하고 비열하며 사기꾼에 탐욕스럽기까지 하다. 불한당들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반면 실패는 언제나 선한 자들의 운명이었다. 아마도 이런 절망적인 분위기가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들에게 어필했던 것이리라.

 

이렇듯 1930년대 프랑스 영화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일치감치 친숙했다. 사실 40대를 넘긴 대부분의 관객들은 아마도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이들의 작품 한두 편을 시청했던 공동적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 영화의 비관주의는 인민전선의 희미한 희망이 사라진 시점의 불안한 정신사를 반영하는 것이라 말해진다. 정치적 불안정과 임박한 전쟁의 위협,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 배신과 회의, 이런 식으로 모든 희망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개인적인 반항(때로는 거의 자살에 이르는 시도) 외에는 달리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몰락을 씁쓸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었다.

 

1930년대 프랑스는 격변으로 치닫던 때이다. 글로벌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정치적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대중들의 열망을 사로잡고 있었다. 프랑스 영화는 당시 아방가르드에서 대중적 영화로의 변신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전의 대담한 실험가들이 좌파 인민전선과 결합했지만, 이내 좌절로 끝났고 어두운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양성과 프랑스 제작의 양질의 전통에 따르자면, 이 시기 마르셀 카르네, 르네 클레르, 줄리앙 뒤비비에, 자크 페이데르, 사샤 기트리, 마르셀 파뇰, 장 르누아르, 장 비고 등의 작가들이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게다가 사운드의 도래로 프랑스 영화가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변화를 겪던 때인데, 문화적 비관주의와 산업적인 파멸의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영화산업을 표준화시켰고 로케이션 촬영은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대신 영화제작이 스튜디오의 통제 가능한 환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0년에서 누벨바그 직전의 30년간은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로 제작편수로 보자면 일종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3,094편의 극영화가 만들어졌는데, 1930년대에 1,305편, 1940년대에 807편, 그리고 1950년대에 982편의 영화가 나왔다. 그런데, ‘고전기’라는 표현은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주의를 요한다. 가령, 이 시기를 연속성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까? 전전과 전후로 이 시기를 구분해야 할까? 앙드레 바쟁은 이와 관련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종전의 시기가 아니라, 1941년에 프랑스 영화의 단절의 시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 시기가 비록 전쟁의 기간이긴 했지만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전전 프랑스 영화의 위대한 거장들인 장 르누아르, 르네 클레르, 줄리앙 뒤비비에 등이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연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대적 차이와 미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명백하게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식으로 시대를 구분하던 이 시기는 누벨바그의 도래와 비교하자면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로 불리어질만하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들(세계 경제위기, 인민전선, 2차 대전, 냉전 등)이 있었고, 영화의 중요한 기술적 혁신(사운드와 컬러의 도래)이 있었다.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 영화와 대중(주류)영화의 구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전후의 젊은 비평가들은 ‘작가정책’이라는 표현으로 이 시기의 주류 영화들 가운데 ‘작가’를 구분하려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영화는 이 시기 할리우드 영화처럼 장르성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코미디, 로맨스, 뮤지컬, 스릴러, 사극 등까지 다양한 장르들이 있었고 배우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영화의 대부분은 게다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프랑스의 고전기가 할리우드의 고전적 규범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학자인 지네트 뱅상도는 이 시기의 프랑스 영화를 ‘스펙터클의 예술’이라 불렀다. 이는 몇 가지 중요한 미학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정교한 음악과 대사, 뮤지컬적인 퍼포먼스가 있다. 둘째, 섬세한 편집과 긴 카메라의 움직임이 활용되고 있었다. 가령, 줄리앙 뒤비비에, 장 르누아르, 막스 오퓔스 등의 영화는 할리우드의 보편적 리듬과 속도와 상이한 섬세한 편집과 연극적이고 뮤지컬적인 전통에서 기원한 느린 리듬의 카메라 움직임이 있었다.

 

시적 리얼리즘은 또한 대중주의적 멜로드라마, 사회적 판타지, 누아르 리얼리즘, 로맨틱한 페시미즘, 마술적 리얼리즘 등의 다양한 표현들을 내포한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즘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서정의 시학으로 끌어올리는 시적 리얼리즘은 바쟁이 카르네의 영화를 두고 지적했듯이 특별히 인물들의 주변을 둘러싼 사물과 환경의 역할을 탐구했다. 가령, <망향>에서 장 가뱅이 마지막 밤을 보낼 때에 그의 운명적 상황과 과거를 지시하는 것은 테디베어, 자전거, 거울, 브로치, 담배들과 같은 시시한 사물들이다. <북호텔>(1938)에서 시학을 구성하는 것은 감상적인 노래들과 대사들, 독일 촬영술에 근거한 표현주의적 조명, 파리의 아름다운 환유를 제공한 노스탤직한 세트 디자인들이다. 시적 리얼리즘의 미학은 그래서 창조되고 양식화된 시각적 구성에서 기원한 것이다. 프랑스 고전기의 사멸은 이러한 시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영화의 등장이라 말할 수 있다. 바쟁의 표현을 빌자면 ‘시적’인 것에서 ‘사실적’인 것으로의 변화가 전후의 프랑스 영화에서 등장한다. 시적 리얼리즘을 계승하고 넘어선 두 종류의 사실적인 장르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 앙리 베르뇌유, 클로드 오탕 라라의 누아르 심리학적 드라마가 있다. 이들의 영화는 개인의 심리학에 근거한 범죄 드라마들이다. 이전의 범죄 영화와 차이가 있다면 사랑이 더 이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혼성의 상실이 발생한다. 다른 하나는 자크 베케르, 줄스 다신, 장 피에르 멜빌이 창조한 황혼의 갱스터 영화들이다.

 

누벨바그의 도래와 더불어 프랑스 영화의 명백한 단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계승과 영속성의 관점에서 프랑스 고전기의 영화들은 이후의 영화들에 거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비평의 새로운 시작도 이러한 변경의 과정에서 발생했다. 가령, 바쟁의 영화비평은 점령기 프랑스 영화들의 비평에서 시작해 마르셀 카르네, 장 그레미용, 줄리앙 뒤비비에의 영화들을 세심하게 분석했다. 또한 ‘사실적인 미학을 위하여’, ‘영화적 비평을 향해서’, ‘대중을 창조하기’, ‘리얼리즘에 대하여’, ‘영화와 대중 예술’ 등의 비평적 에세이가 이 시기의 영화들에서 나왔다. 바쟁은 1943년에 쓴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변하고 있다. 예술은 창조 그 자체이다. 이제 영화를 재발견하자!’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이제 고전기 프랑스 영화들을 재발견하자! 이 특별전은 그 첫 시작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이 글은 지난 2011년 겨울에 기획해 열린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때 썼던 글을 다시 올린 것이다.

영화에서 감독이란 불가시의 존재이다. 나로서는 그런 보이지 않는 감독의 존재를 인지하게 해준 고마운 책 중의 하나가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이 책은 또한 좌절과 불평등의 인식을 안겨준 책이기도 했다. 비디오가 없던 시절에 순전히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보고 감독과 인터뷰를 했던 트뤼포의 놀라운 기억력과 보는 능력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트뤼포가 거의 외우다시피 보았던 영화들에서 사소한 질문을 할 경우에(가령 <숙녀 사라지다>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경우)는 가끔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이 책은 한 명의 영화광이 자신이 숭배하는 작가를 만나 영화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비평가의 초기시절이 아니라 1966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자면(물론, 인터뷰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시절부터,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인터뷰한 본심은 자신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이 정작 미국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 것과 히치콕과의 정밀한 인터뷰가 가능하다면 사람들에게 그가 만든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는 표면적 이유는 거짓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독의 자격으로 히치콕의 작업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트뤼포는 영화를 만들면서 연출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마다 히치콕 식으로 생각하며 해결점을 찾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화작법을 알기 위한 시도로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이 비슷한 일을 동시기에 자크 리베트도 했었다. 자크 리베트는 1966년 5월에서 6월까지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장 르누아르를 만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사실 그는 르누아르와 3주의 시간을 보내면서 르누아르의 영화적 비법을 전수받을 사심에 이 작업을 했다. 누벨바그 작가들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운,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았던 영화광들이다. 그들이 영화 연출에서 곤경에 처할 때 존경하는 감독을 인터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 ‘히치북Hitchbook’이라 불린 이 책은 프랑스에서는 ‘히치콕의 영화Le Cinéma selon Hitchcock’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정사각형 모양에 350장의 사진을 포함, 총 260페이지의 화려한 책으로 초판이 발행됐다. 미국판은 다음해인 1967년 11월에 출간되었는데, 정작 프랑스판은 5천부가 팔린 반면 미국판은 하드커버가 15,000부, 페이퍼북이 21,000부 가량 판매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한국 초판본은 1994년에 나왔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트뤼포의 친구이기도 했던 야마다 코이치와 하수미 시게이코의 번역으로 1981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의 출간 기념회가 꽤 멋졌다고 생각한다. 트뤼포는 책 출간을 기념하는 리셉션에 히치콕을 초청하면서 출판사가 점심 파티를 제안한 것을 거절하고 감독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히치콕의 영화 발췌본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발췌본에는 <39계단>에서 두 남녀가 서로 수갑을 채워지는 장면, <이창>의 마지막 장면, <나는 비밀을 안다>에서 앨버트 홀 시퀀스, <사이코>에서의 욕실 살해 장면과 안소니 퍼킨스가 물걸레질하는 장면, 그리고 자동차가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장면, <새>에서 멜라니가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 <마니>에서 정신분석학적인 회합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혁명적인 인터뷰 책은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나, 종종 영화연출이 절망을 느끼는 이들을 위한 바이블이다. 지금 이 책이 한국에서는 절판 중이라고 한다. 책의 재출간과 더불어 히치콕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시네마테크에서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김성욱)

 

*'씨네21'에 절판된 영화책에 대한 특별기획에 썼던 글이다.

  1. wina 2014.04.07 23:18

    궁금했던 책인데 글로써 소개해주시니 더욱 재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네요. dvd로만 만나던 히치콕의 작품들을 시네마테크에서 보게 되는 날도 기다려봅니다.

마가레테 폰 트로타의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기 영화이지만, 그의 생애의 아주 작은, 하지만 강렬했던 순간을 담고 있다. 1961년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해 기사를 쓰게 되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아렌트의 곤경을 다룬다. 그녀는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 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아슬아슬하게 탈출해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러한 경험을 근거로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하지만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글은 논란을 불러왔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냉혹한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관료였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러한 생각을 『더 뉴요커』에 발표해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1960년대 초에 아렌트의 주장은 꽤나 위험한 것으로 비쳐졌고, 그로 인해 그녀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다. 영화는 그러나 아이히만의 재판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대신 그녀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옹호자로, 나치를 도운 일부 유대인 지도자를 고발한 비열한 자로 비난과 협박을 받았고, 대학에서는 사직을 권고당하고 오랜 친구와도 결별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영화의 끝 무렵 그녀의 대학 강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렌트 역의 바바라 슈코바의 연기가 워낙 탁월해 연설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녀는 이미 <로자 룩셈부르크>에서도 마찬가지로 로자의 탁월한 연설을 훌륭하게 연기한 바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이 영화에서 작은 비중으로 표현된 것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미 이 사건은 에이알 시반의 탁월한 다큐멘터리 <스페셜리스트>에서 다뤄진 바 있다. 감독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축으로 4개월에 걸쳐 350시간 동안 열린 아이히만 재판의 기록 영상을 두 시간으로 재구성했다. 아이히만은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 규율과 명령에 충실한 관리였고, 그러므로 생각과 양심과 상상력이 없이 관료 조직에 편입되었을 때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결국 거대한 악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악의 평범함이란 생각 없는 개인에게 악으로의 통로가 도처에 있다는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아렌트를 보여주는 방식에서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들이다. 


가령,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전적으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대신하면서 감독은 범죄자와 희생자라는 강고한 도식에서 벗어나 아렌트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한다. 그녀가 뉴욕의 친구들과 벌이는 파티들, 학생들과의 사소한 대화들, 남편과의 결혼 생활, 담배를 물고 소파에 누워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 등. 트로타의 카메라는 이런 평범한  일상에 작지만 어떤 거대한 변화들이 발생하는가를 지켜보게 한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담담하게 말했다. 아렌트의 주장은 자각 없는 평범한 인간이 미증유의 학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녀가 겪게 될 이후의 곤경을 거울처럼 비추는 듯하다. 그녀의 글에 대한 악의적인 반응들, 친구와의 결별, 이스라엘 정부의 출판 중지 요청, 학교 당국의 수업 중지 요구 등은 그녀의 순진한 눈빛(이는 세르주 다네가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와 비교해 2차 대전 당시 조지 스티븐슨이 수용소를 촬영할 때의 시선을 두고 했던 그런 의미에서다)에 대한 과도한 반응들이다. 이런 순진한 눈빛은 그녀의 합리적 지성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시간에 그곳에 있던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다. 나중에 오는 자들은 더한 정당성과 윤리적 책임을 감수해야만 한다.

[2013 베니스 인 서울]

 

올해의베니스 클래식섹션에서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연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다미아노 다미아니, 엘리오 페트리, 프란체스코 로지, 로셀리니의 대표작과 파졸리니, 베르톨루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 이탈리아 현대영화를 개괄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작으로 소개하는 지안프란코 로지와 지아니 아멜리오의 작품 또한 전후 이탈리아의 위기를 반영한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1950년대의 네오리얼리즘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는 이탈리아 영화의 어떤 경향을 살펴본다.

 

네오리얼리즘 영화혁명

 

 

 

 

“1940년대의 영화 혁명인 네오리얼리즘과 1400년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간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갈릴레오 박물관에 들어선 한 남자가 과학사 연구소의 박물관 관장에게 던진 질문이다. 박물관의 관장은 둘 간에 공통적인 흔적이 발견된다며 미술, 과학, 기술에 걸쳐 강한 연관성이 있었고 네오리얼리즘이 영화사에 변화를 일으켰듯이 르네상스 미술에 있어서 직선 원근법이 도입되면서 미술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지아니 보차키의 <네오리얼리즘 강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다큐멘터리다. 그는 다양한 영화인들(베르톨루치, 에르마노 올미, 파울로 타비아니,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 등)과 영화에서 발췌한 특정한 장면들을 병치하면서 네오리얼리즘으로 향한 영화의 창문을 열어 보인다. 내레이터는 올해 세상을 떠난 카를로 리차니이다. 그는 영화평론가로 출발해 로셀리니의 <독일영년>의 각본을 썼고, 네오리얼리즘을 이끈 영화감독이다.

영화와 미술, 혹은 과학사와의 관련성이 논의의 중심은 아니다. 요점은획기적인 변화혹은영화 혁명이라는 표현에 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아직 전쟁 중이던 1940년대 초부터 50년대 초까지 10년간 지속된 것으로 제한된 그룹의 이태리 영화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단어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심지어는 어떤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거나 또는 그 영화들의 수를 몇 편으로 할지( 1,000편의 이탈리아 영화 중 몇 편이 네오리얼리즘 영화인가?)를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네오리얼리즘은 시기적으로 대략 10여년간 지속됐지만, 그럼에도 20세기의 나머지 절반 동안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의 영화감독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영화 혁명이었다. 만약, 네오리얼리즘이 영화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영화적 경향이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국민적 정체성의 부활의 수단으로서 새로운 영화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네오리얼리즘은 단지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미학적 저항, 즉 영화적 형식 그 자체의 새로운 관념에 근거한 미학적 저항이었다. 카를로 리차니의 충실한 강의에 고다르가 <영화사> 3A에서 제안한 네오리얼리즘의 혁명적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 고다르는 영화가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국민적 정체성을 갱신하는 수단이라 설명한다. 3A에서 고다르는 제도화된 회상, 즉 파리수복 45주년  기념식의 장면에서 영화와 텔레비전의 현재 상태에 애도를 표한다. 왜냐하면 프랑스 영화는 결코 독일과 미국에서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 할리우드의 점령에 저항한 유일한 영화로서 로셀리니의 영화를 손꼽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평범한 제작방식에 경의를 표한다. 완전히 예견치 못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적 행위, 그리고 스튜디오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서 적대적인 조건에서 촬영된, 영화의 완전한 잠재성의 실현, 시각예술의 독특한 형식,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규모에서 작동하는 국민의 미래의 자아를 투사한 영화들.

 

 

 

 

 

파졸리니와 베르톨루치에 관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윌터 파사노의 <베르톨루치가 말하는 베르톨루치>(2013)와 엔리코 멘두니의 <예언 : 파졸리니의 아프리카>(2013)에서는 네오리얼리즘의 짧은 시기를 거친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에 어떤 변경이 있었는지 두 명의 작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가령, 파졸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하에 있던 <아카토네> <맘마 로마>를 만든 후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그는 수난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모순적인 충돌을 그리던 초기의 시기에서 전통적인 맑시즘의 위기와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들, 신자본주의와 파시즘의 등장이라는 명백한 위기를 정식화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파졸리니는 1950년대의 작가들이 노동계급과 인간성에의 공통된 희망을 논의하는 성스러운 불꽃의 수호자였다면 이제 작가들에게,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시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파졸리니는 이 시기에 또한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탈리아적인 지식인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떠난 것이다. 1961, 파졸리니는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와 처음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 새로운 여행은 새로운 신화, 3세계에 대한 점차적인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영화작업과 여행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이국적인 문화들과 먼 곳의 장소들을 탐구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예언 : 파졸리니의 아프리카>는 스스로를현대보다 더 현대적인 방랑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형제를 찾는 방랑자라 여긴 파졸리니의 제 3세계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60-70년대 정치영화의 두 전선 - 프란체스코 로지와 엘리오 페트리 

 

 

지난해베니스 인 서울에서 <마테이 사건>이란 작품으로 소개한 바 있는 프란체스코 로지는 전후, 그리고 포스트-네오리얼리스트 영화적 세계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작가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영화는 이탈리아 사회의 현대적인 부패, 절대권력, 그리고총탄의 시대라 불린 70년대의 테러리즘을 다룬다. 로지는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의 조감독을 했고, 마피아 문제를 다룬 <살바토레 쥘리아노>(1961)로 데뷔해 유명세를 얻었다. 로지의 특징이라면 그가 전형적인 이야기의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신화, 전설, 역사 속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가령, <살바토레 쥘리아노>를 시작으로 <마테이 사건>(1972), 그리고 <럭키 루치아노>(1973)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산업적인 유명인들의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단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매버릭들의 개성과 성취, 삶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 흐르지 않는다. 로지가 이러한 인물들을 다룬 것은 그들이 이태리 공화국의 삶에서 명백한 위기를 체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무법자이고, 또 다른 이는 정부의 독점가, 혹은 범죄자이다. 로지가 꼽은 인물들의 삶은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현대사, 그리고 국가의 일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지의 관심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맥락에서 권력, 통치, 경제적 지배를 인물들의 삶을 빌어 영화로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지는 타비아니 형제, 올미, 베르톨루치, 마르코 페레리, 마르코 벨로키오와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좌파 정치학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권력과 정치의 파워게임을 표상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

이번 ‘2013 베니스 인 서울에서 최초로 소개하는 <도시 위에 군림하는 손>(1963)은 그런 로지의 정치적 영화의 출발점의 작품이다. 현대 이탈리아의 권력구조가 주제이다. 나폴리의 주택지구 재개발 뒤에 숨겨진 거대한 부패가 관심사이다. 로지의 카메라는 정치적 언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회의실, 법정, 의사당, 사무실, 바 등을 오가며 여기서의 발언들로 권력의 비가시적인 구조들에 접근해 들어간다. 로지의 영화는 강렬한 정치성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본성적으로 과격하거나 프로파간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았고, 계몽주의적인 태도나 주장을 전달하는 데에 덜 관심을 보였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방식은 먼저 조사와 탐사에서 시작해 주제들이 논의되고, 그러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대한 해석의 여지들을 비록 모호하고 복잡하더라도 풀어놓는 것이다. 권력과 지배의 매커니즘에 접근해 들어가는 것,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절대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의 불가능성, 곤란함에서 정치성을 사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로지의 영화가 지닌 흥미로움이다.

 

 

 

 

불행하게도 짧은 영화적 경력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그는 1929년에 태어나 19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오 페트리는 로지와 동시대에 다른 경로로 정치적인 영화를 시도한다. 로지의 영화가 특수하게 이탈리아적인 반면 페트리는 국제적 성공을 거뒀는데, 무엇보다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를 흥미로운 영화적 형식과 대중적인 기호들과 연결해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페트리는 노동계급 출신이고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영화비평가로서 활동을 시작해 카를로 리차니, 푸치니, 디노 리치 등의 이탈리아 감독의 각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네오리얼리즘의 유산 아래서 영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객관적 현실의 재현보다는 사회적 의식의 형성에서 개인의 심리학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분석의 객관적 요소만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 주관성의 문제를 사회비평과 정치적 참여의 문제와 결합한다. 로지가 지리-정치학의 문제를 다뤘다면, 페트리는 사회의 병리학을 탐구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사적 소유는 절도가 아니다>는 권력의 졸개인 경찰에게 면죄부를 보장하는 사회의 매커니즘을 다룬 <완전범죄>(1970),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의 정신병리적인 문제를 다룬 <노동자 계급 천국에 가다>(1972)에 이어사회적 신경증 삼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페트리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병리적 탐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그리고 비평가들에게도 외면 받은 저주받은 영화다.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하고 그로테스크한 초상을 그렸던 탓에 그 대담한 시도가 아마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탓이다. 이 영화에서 페트리는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변태적 가치를 양산하는가를 탐구한다. 젊은 은행원인 토탈은 드문 피부 질병을 갖고 있다. 그는 돈에 알레르기를 보인다. 그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돈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적 소유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페트리는 자본주의적인 질병을 소유에의 열망으로 표현하는데, 이 질병에 면역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페트리는 소유와 돈의 폐쇄된 방에 갇혀 우리의 무의식이 방출하는 유독성 개스에 질식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유산 - 두 편의 이탈리아 신작

 

 

네오리얼리즘의 유산은 두 편의 이탈리아 신작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가령,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안프란코 로시의 <성스러운 도로>와 지아니 아멜리오의 <용감무쌍>이 그러하다. 각각, 다큐멘터리와 픽션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전후 이탈리아의 위기적 상황에서 담아낸 실직, 빈곤, 고독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성스러운 도로>는 감독 지안프란코 로시가 2년간 미니밴을 타고 로마의 거대한 외곽순환도로 ‘GRA’ 주변을 다니며 그 주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에 담긴성스러운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신비로움, 혹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순환도로라는 설정은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강조하는데, 대략 이 외곽지역에는 300만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고, 로마 중심부에는 15만 정도의 인구가 있다고 한다. 이런 중심과 주변의 차이는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주제를 또한 떠올리게 한다. 가령,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발 멜라이나Val Melaina라는 로마 성벽에서 5마일 떨어진 지구에서 시작하는데, 이곳은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신지구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중심지로부터의 거리 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으러 도시로 갈 수도 없었다. <움베르토 D>는 더 이상 로마의 중심지에서 살 수 없어 변두리에 아파트를 구해야만 하는 노인의 절망을 그렸다. 중심지는 점점 현대화되어가고 돈을 갖지 못한 이들은 주변부로 계속 이주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구두닦이>의 소년들은 끔찍한 도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들의 환경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살던 희망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작가이지만 80년대 난니 모레티와 더불어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한 작가인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의 신작 <용감무쌍> 또한 비토리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적인 시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아멜리오 감독은 1990년작 <선고>, 1992년작 <도둑맞은 아이들>, 1994년작 <라메리카>로 유럽영화상을 수상했고, <도둑맞은 아이들>은 또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1998년작인 <우리가 웃는 법>으로는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아멜리오 감독은 특정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힘겨운 삶을 겪은 한계적인 인물들에 주목했고, 특히나 인간적 관계의 어려움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티를 담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총탄의 시대에 테러리즘을 배경으로 부자 간의 갈등을 그린 처녀작 <마음의 통증>(1983)을 시작으로, 아멜리오 감독은 파시즘기의 팔레르모를 무대로 사형제도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 <선고>(1990)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둑맞은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한 11살 소녀와 그의 동생이 젊은 경찰에 끌려 고아원으로 호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힘든 현실에 노출되어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경찰이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시정 넘치는 화면으로(특히 금빛으로 물드는 바닷가의 백사장에서 호송 중에 잠시 일탈해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잊기 힘들다)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우스 키>(2004) 15년간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아들이 갑자기 만나게 되면서 겪는 부자의 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짧은 여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들이 웃는 방법> 1958년부터 1964년까지의 이탈리아 부흥기를 배경으로 시칠리아에서 토리노로 상경한 형제가 시대에 농락당하는 비극을 그려낸 작품이다. 최근작인 <최초의 인간>(2011)은 알베르 카뮈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작을 영화화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빈곤과 차별이 횡행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용감무쌍>은 그런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놀랍게도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번째 코미디이다. 경기침체가 만연한 밀라노를 배경으로 주인공 안토니오는 불가피하게 하루를 쉬어야 하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매일 직종을 바꿔가며 일을 한다. 피자 배달원, 전차 운전, 장미꽃 배달, 레스토랑의 요리사 등등, 그가 하는 일들은 가히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아내와 이혼한 안토니오는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20대 여성 루시아를 만나게 된다. 루시아는 미래 없는 자신의 삶에 꽤나 비관적이고 모든 일에 시니컬하게 대처한다. 영화의 전체 톤은 무성영화 코미디에 가까운데, 안토니오는 그래서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실업의 문제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에서 보인 인간들의 관계의 어려움을 어둡게 그려낸다. 젊은이들, 그리고 나이 든 이들은 피할 수 없는 실업의 문제에 시달린다. 안토니오는 조금씩 젊은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섹소폰 연주자인 아들과의 사이도 서먹하다. 아멜리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세대의 대표자로서 젊은이들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안토니오는 두 명의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결국 절망감을 느낀다.

 

성공적인 데뷔작 - 엠마 단테의 <팔레르모의 결투> 

엠마 단테의 <팔레르모의 결투>(2013)는 영화 연출보다는 무대 경력과 배우로서 더 유명세를 얻었던 그녀의 성숙한 데뷔작이다. 영화의 원제는카스텔라나 반디에라 거리Via Castellana Bandiera’. ,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팔레르모의 외곽 주택지의 일방통행로를 의미한다. 이 거리에서 언덕길에서 마주오는 차를 만난 두 명의 여인이 심각한 상황으로 대치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이런 내용으로도 장편영화가 성립할 수 있을까 싶은데, 때로 좋은 영화란 언제나 심플한 이야기에 근거한다고 미리 말하고 싶다. 물론 단순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진전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재능이다.

 

 

 

 

아무튼 이 좁은 일방통행로에서 대치하게 된 두 여인들 가운데, 그 한쪽은 여행 중에 다툼을 벌이는 로자와 클라라의 레즈비언 커플이다(그중 한 명이자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치 상황을 풀 생각이 없는 고집스런 여인 로자를 연기한 이가 감독 자신이다). 반대 방향에서 차를 몰고 들어온 이는 손자와 가족을 차로 집에 데려다주고 있던 중인 마을의 고집스런 할머니 사미라. 때는 더운 여름날 오후다. 딱히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거리에서 벌어진 심각한 대치 상황에 마을 주민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기보다는 누가 먼저 물러설지에 내기를 거는 등 다소 방관적인 자세들을 보인다. 수수방관하기는 사미라의 가족들도 매한가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길을 양보하면 좋을 테지만 그 어느 쪽도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실 뚜렷한 명분보다는 그 어떤 뒤틀린 심사와 분노가 이 둘을 심각하게 대치하게 했던 것이다. 낮이 지나 이윽고 밤이 찾아와도 저녁을 먹을 생각도 없이(심지어 이들은 화장실 갈 여유를 보이기도 싫어해 차 안에서 소변을 해결한다) 꼬박 하루를 보낸다. 몇몇 사내들이 나서 분쟁을 해결해 보려고도 하고, 손자를 불러 설득도 시도하지만 둘은 꿈쩍도 않는다. 가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는 형국이다.

앞서 말했듯 아주 단순한 이야기의 설정이지만 두 여인의 고집불통의 대치가 불러오는 긴장감이 대단해 관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여유를 주지 않는다. 여인들의 대결구도는 흡사 막다른 골목길에서 마주한 서부극 영웅들의 결투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왜 두 여인의 대치 상황이 발생했던 것일까. 단지 두 여인들의 행동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이러한 대치 상황이 무엇을 표상하는가를 깨닫기 위해서 이 질문은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초반 15분간 장면들에서 몇 가지 정황적 근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시작부에서 우리는 로자와 그녀의 연인 클라라가 팔레르모로 향해 자동차를 몰고가는 것을 보게 된다. 로자는 이 마을 출신으로 결혼식의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오지만 점점 마을이 가까워져 오면서는 클라라와 불화를 보이고, 급기야 클라라는 그녀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두 여인의 초조함과 불안은 자동차 내부의 좁은 공간을 폐소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극대화되어 표현된다. 둘의 감정이 고양이 이후 골목길에서 대치하는 긴장감의 전조를 이루고 있다. 반면, 사미라(엘레나 코타가 탁월한 연기를 펼쳐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이 마을의 황폐한 무덤가에서 처음 모습을 보이는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의 묘비 앞에서 슬픔과 상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급기야 딸의 비석에 자신의 몸을 뉘어 부질없지만 불가능한 딸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영화는 내내 이런 두 고집불통의 여인에 초점을 맞춘다.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대치 중이지만 그럼에도 본원적인 연결이 있어 보인다. 그 하나는 팔레르모라는 지리적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로자에게 팔레르모는 불안의 근원적 장소처럼 보인다. 그녀는 이 고향 출신으로, 이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으려 하는 상황이기에 아마도 이 마을이 그녀의 과거에서 기인한 불안을 야기하는 듯하다. 사미라의 완강함은 앞서 묘비의 장면에서 느낄 수 있듯이 가눌 수 없는 슬픔과 애도에서 기원한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남과 어떤 타협과 소통을 이워내는 데 어려움을 야기하는 듯하다. 감독은 이러한 슬픔과 애도, 분노와 불안 등의 감정을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두 여인의 미묘한 얼굴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특히 사미라는 거의 말을 하고 있지 않기에 그녀의 얼굴이 대사를 대신하고 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쇠약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결들을 느끼게 된다. 두 여인의 대립에서 우리는 그들의 갈등과 차이(노년과 젊음, 전통주의와 자유주의 등)를 발견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알게되는 것은 이들이 기묘한 친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대치하던 두 여인의 감정의 상태가 누그러지는 때이다. 깜빡 잠든 로자는 사미라가 차 유리창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놀란다. 하지만,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차 안에서 잠에 들어있다. 잠깐의 착각이다. 잠시 후, 로자의 고집에 화가 나 그녀를 떠났던 클라라가 찾아온다. 그녀에게 로자는 어린 시절 화가 났을 때 참지 못해 이곳을 찾았노라고 말한다. 그 때에 자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이제 그녀의 곁에는 클라라가 있다. 그녀는 클라라에게 노래를 불러달라 하는데, 그녀의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우리는 사미라가 손자의 집을 찾는 발걸음을 지켜보게 된다. 나중에 우리는 이 장면이 일종의 꿈 같은 순간임을 알게 된다. 사미라는 자신 없이 어떻게 이 사람들이 살아갈 것인가를 걱정한다. 이 꿈 같은 장면은 한 사람의 찾아옴과 다른 사람의 떠남으로 대구를 이루면서 로자와 사미라를 기묘하게 연결하는 인상을 준다. 한 여인은 이제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거두고 가족들과 작별을 치렀고, 또 다른 여인은 어머니와도 같은 이를 떠나보냈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끝날 무렵에 우리는 이 두 여인의 고집스런 대치상황이 기묘한 친밀감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연극무대와도 같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기술적인 화려함보다는 삶의 본성을 깊숙이 파악하려 한 성공적인 데뷔작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지난 일요일에 기뻤던 것은 카우리스마키의 '어둠은 걷히고'를 보러 많은 관객들이 왔었던 일이다. 다른 영화들도 그러하지만, 기다려지는 것은 영화의 운명이기에.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그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있다. 실직한 이들은 그들을 고용해줄 사업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기다려진다. 하지만, 이들은 방향을 바꾸어 다른 이들에게 기다려지길 선택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새롭게 오픈하는 '노동'이라는 음식점에서 찾아와줄 사람들을 기다린다. 대체로 그들은 전에는 떠났던 이들이다. 그들은 이제 음식을 맛볼 이들을 기다리기로 선택한다. 우리는 기다려지는 자들을 보게된다. 하나 둘씩, 여덟 명의 사람들. 아마도 그건 책임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음식을 맛본다는 것. 꽤나 오즈적인 주제인 미각은 이 영화에서 사실 표면적으로는 큰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아닌듯 하지만 사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먹는다는 것은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그 전의 카우리마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유토피아를 향해 떠나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여인들이 마시는 트로피칼 음료의 청량함의 블루가 있다. 그들은 낙원으로의 탈주대신에 레스토랑을 재건한다. 켄 로치의 영화가 건축적인 구성을 했다면 여기서 카우리스마키는 보다 회화적이다. 그리하여 엔딩은 결정이자 자세이다. 그들은 여기서 어떻게든 살기로 한다. 그래,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속적인 전투가 되어야하기에. 어떤 미래가 그들에게 도래할 것인지 기약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럼에도 무언가를 빼앗기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버리지 않으려 한다. 아나크로니즘적인, 꽤나 무뚝뚝한 반격의 시도. 2010년에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보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와 같은 이유들이 여기에 있다. 기다려지던 영화관의 기억들처럼. 

까미유 끌로델, 혹은 유명한 무영인

 

 

 

 

 

<까미유 끌로델>(2012)은 브루노 뒤몽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꽤 일탈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먼저, 제목의 연도(원제목은 ‘까미유 끌로델 1915’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시대극이다. 지금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든 뒤몽은 한 번도 역사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동시대의 문제를 다뤘다. 둘째, 줄리엣 비노쉬의 출연이 하나의 사건이 될 만하다. 뒤몽은 데뷔작인 <예수의 삶>(1977)이래로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는 것을 영화적 원칙으로 고수해왔다. 배우들의 과잉의 연기나 분명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관습적인 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로베르 브레송처럼 그는 배우보다는 인물의 물질성에 더 관심을 보였다. 물론 육체에 우선에 두는 것은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혼과 정신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이다. 줄리엣 비노쉬의 출연은 그러므로 그의 경력에서 일탈처럼 보인다.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돌연한 변화는 비노쉬가 먼저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기에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고심했고, 마침 카미유 클로델에 대한 전기를 읽던 차에 비노쉬를 캐스팅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의 선택을 옳았다고 생각한다.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역사적 유명인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유명인을 기용하는 것이 어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뒤몽의 영화에서 특별한 것은 까미유 끌로델을 마치 유명한 무명인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 배우인 비노쉬를 데려와 그녀를 무명인으로 취급하는 것. 그야말로 뒤몽적인 방식이다.

 

관능적인 시선

 

 

 

<까미유 끌로델>은 짧은 설명적인 자막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영화의 끝에서 이와 유사한 설명을 다시 한번 접하게 될 것이다. 때는 1915년. 아비뇽 근처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1864년생 빌뇌브 출신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은 작가 폴 끌로델의 누나로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로 15년을 함께했고 1895년 헤어졌다. 1913년 부친이 타계하고 가족들은 파리 작업실에서 10년간 은둔하던 그녀를 정신이상을 이유로 파리 근교에 입원시켰고 그 후 프랑스 남부 몽드베르그로 옮겼다.”

이 짧은 자막을 제외하자면 이 영화에는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어떠한 부연설명이 없다. 이 자막 또한 그녀를 폴 끌로델의 누나이자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뒤몽은 까미유 끌로델을 위대한 예술가로서 다시한번 보여주려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단지 정신 병동에 감금된 한 여인일 뿐이다. 방점은 예술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뒤몽은 그녀의 삶 전체를 보여줄 생각이 없고, 단지 1915년의 어느 삼일간의 그녀의 평범한 일상만을 묘사한다. 정신병동에의 그녀의 감금, 무료한 일상들, 고통스러운 삶들이 전부이다. 이처럼 유명한 예술가를 무명인처럼 취급하는 것이 꽤나 이상한 방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의 설명적인 자막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가를 알려준다. “까미유 끌로델은 이후 29년의 세월을 더 보냈다. 1943년 10월 19일 79세 나이로 타계했고 집단 매장을 시켜서 시신도 찾지 못했다. 1955년 2월 23일에 죽은 폴 끌로델은 마지막까지 면회를 왔었지만 장례식엔 참석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끌로델은 죽어서도 오랫동안 무명인으로 남았다. 그녀에겐 무덤조차 없었다고 한다.

 

뒤몽의 영화는 뒤늦게 만들어진 그녀에 관한 전설을 뒤집거나 숨겨진 예술적 천재성을 조명하는데 하등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묘사하는 것도 배제되어 있다. 가령, 그녀가 로댕과 어떻게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어떤 예술적 성취를 보였는지, 등등의 문제는 논외다. 우리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그녀의 피해망상과 고통들이다. 그 고통은 지극히 물리적이다. 뒤몽은 정신질환을 앓는 실제 사람들을 촬영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덕분에 비노쉬는 통제가 불가능한 환자들과 즉흥적인 연기를 해야만 했고, 이 시도는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몇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까미유는 그들 속에서 참을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 “이건 사람 사는게 아니다. 저 인간들의 괴성도 지겹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동생 폴 끌로델의 방문 소식을 듣고는 미친 여인이 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정신병동을 뛰어다닌다. 이 장면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장 밝고 순수한 기쁨의 순간일 것이다. 그 외의 시간들 대부분에서 그녀는 감금된 존재로서 순수하게 주변의 사람들과 풍경들, 빛들, 사물들을 보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시골의 전원의 풍경을 보거나 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리고 실내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쳐다보다 맞은 켠 의자에 앉은 두 명의 환자들을 바라보는 장면들은 그녀가 처한 고통의 상황을 망각하게 할 만큼 순수하게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눈에 보이는 불가해한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하려는 까미유의 신체의 예민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감옥과도 같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기에 더 예민하고 관능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뒤몽의 예술적 성취가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에 있다. 그는 시선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작가이다.

 

지상의 시선과 예술가의 손

 

 

 

까미유는 종종 멍하니 나무들을, 혹은 풍경들을 쳐다본다. 이 무료한 행위는 그럼에도 밖의 세계로의 눈빛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녀는 스스로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동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녀의 기대는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 까미유는 동생 폴 끌로델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어쩌면 폴의 도움으로 수용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것이다. 폴 끌로델의 도착의 여정과 짧은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러므로 전반부의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어떤 질문처럼 보인다. 누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을 갖고 있던 폴은 그녀가 수용소의 감금된 30년간 공식적으로 열네 번의 방문을 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의 세 번의 방문을 포함하면 까미유는 30년간 일 년에 한 번도 되지 않는 외부와의 접촉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가족들, 특히 어머니 클로델 부인의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또한 권력과 수단, 신앙심이 돈독한 폴이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정신병동에 방치해두고자 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폴은 까미유를 만나기 전에 먼저 사제에게 일종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그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 덕분에 새로운 빛을 보게 되었고 유물론자인 자신이 복종을 통해 평안을 얻는 신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폴과 만났을 때 카미유는 그의 신앙심에 의문을 표한다. “신이 있다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가?” 까미유는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달라 말하지만 폴은 그녀에게 “그것은 신의 알려지지 않은 의도일거야”라 말한다.

 

폴의 도착은 이 영화에 뒤몽의 전작들, 가령 <하데비치>나 <아우사이드 사탄>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신의 문제를 개입시킨다. 폴은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고, 누이의 가혹한 운명보다는 신을 믿지 않았던 그녀의 개종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의사에게 예술가란 직업은 최악이며 예술작업이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 마음의 균형을 쉽게 깨뜨리고 안정적으로 살기 힘들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장면들은 뒤몽의 영화가 결국 정신적인 면의 두 가지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하나는 물론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예술에 바쳐져야할 까미유의 능력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까미유에게 폴은 예술 대신 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대신하는 종교. 그 끔찍한 치환. 그리하여 이 영화의 짧은 장면 하나를 아마도 중요하게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까미유는 정원을 산책하다 잠시 땅에 시선을 두고 진흙을 잡아 손으로 주물럭거린다.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 장면은 이전에 그녀의 올려다보는 시선들(아마도 영혼과 정신, 혹은 신에의 어떤 열망들을 표현하는 듯한)과 대비되는 내려다보는 지상의 시선을 반영해 그녀를 흙과 대지로 이끌리게 한다. 흙. 물질. 그리고 그것을 만지는 예술가의 손. 물질을 통한 예술적 구현, 즉 조각. 예술가는 이러한 물질을 통해 정신을 구현한다. 그런데 그녀가 이러한 활동을 하지 못할 때 그녀는 순수하게 정신의 영역에 도달하겠지만 이미 그것은 예술이 아닌 종교가 될 것이다. 실제로 까미유는 유배된 자로서 정신병원에 머물면서 창작을 했던 반 고흐나 앙토넹 아르토와는 달리 더 이상 흙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그저 계란이나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상적인 일에 쓰였다고 한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 브루노 뒤몽의 <카미에 클로델>의 개봉시에 '씨네21'에 썼던 글이다.

  1. 2014.05.01 16:39

    비밀댓글입니다

  2. 김혜선 2016.11.13 07:19

    영화를 보게됐는데 조금 어렵네요
    감독은 종교와 예술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은데 무얼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까미유가 흙을 만지작 거리다 버려버린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이죠?

 

 

 

 

마스무라 감독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합니다

- 배우 와카오 아야코와의 인터뷰

 

배우 와카오 아야코를 만났다.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다이에 특별전’에 참석한 그녀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만났던 시간은 40여 분 정도였다. 스크린에서 그녀를 보아왔던 열망의 시간에 비하자면 턱없이 부족한 만남의 시간이다. 물론, 관객과의 대화와 이어진 뒤풀이 자리까지 참석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와의 만남에 아쉬움은 없다. 다만 이 짧은 기록이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나 무엇보다 그녀만이 가능했던 연기의 비밀에 다가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그 비밀에 우리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마스무라 감독과의 작업에 대해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고 그게 사명이라는 생각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와카오 아야코는 배우로서 총 160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60년대 전성기 시절 다이에 영화사에서 그녀는 연간 1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굴절되거나 도착되지 않으면서 열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여성상을 매번 특별한 연기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동시대에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가령, 일본의 영화잡지 ‘키네마 순보’의 1957년에서 1966년의 십 년간의 ‘베스트 10’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마스무라의 영화는 한 편도 올랐던 적이 없다. 하나의 전통을 형성해온 ‘일본영화’라는 관념이 그에게 거부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그 또한 동시대의 비평가들에게 외면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다시 화려하게 재발견되고 배우 와카오 아야코가 대중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마스무라 감독이 당시 시대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며 지금 와서야 비로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김성욱│먼저, 이렇게 한국에서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

와카오 아야코│일단은 한국에서 영화 관련된 일로 초청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꽤나 신선한 경험이다.

 

김성욱│일본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전국적으로 개최되었고, 한국도 마찬가지로 마스무라 회고전이 열린 것이 2005년의 일이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21세기 들어서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이 다시 발견되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열렸는데,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와 배우의 존재가 새롭게 논의되는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와카오 아야코│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요즘에 그런 작품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질문에의 답변은 어렵다. 전세계적으로 좋은 배우들도 많은데, 답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라는 게 시대와 맞거나 안 맞는 문제들이 있다. 마스무라 감독은 당시 시대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야 비로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마스무라 감독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시에 과소평가되었던 상황이 이해가 될 수 있다.

 

김성욱│배우로서, 출연작이 총 160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이에 시절에, 60년대에 주연작으로 연간 11편 정도에 출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매 작품에서 이렇게 특별한 연기를 보여준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1960년대 다이에 촬영소 시절의 상황은 어땠는가?

와카오 아야코│그 당시에는 영화가 일주일에 한편씩 개봉하는 상황이었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다들 극장을 갖고 있었고 아무리 흥행이 잘되어도 일주일 뒤에는 새로운 작품을 상영했다. 그러니 일 년 내내 촬영소에 있던 기억밖에는 없다. 연간 11편의 영화들 모두에서 주연을 한 것은 아니었다. 촬영일수로 보면 8편이 거의 한계이다. 나머지 세 편은 우정 출연으로 하는 것이었다. 설이나 구정에 개봉하는 작품에 출연했던 것들이다. 그중 몇 편은 사장의 독단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제작부에서 수시로 기획을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김성욱│쟁쟁한 감독들과 작업했는데, 마스무라 감독 이전에 미조구치 감독과의 첫 작품은 <기온 바이샤>로 1953년의 일이다. <적선지대>(1956)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마스무라 감독과의 첫 만남은 <명량소녀>인데, 어떻게 처음 작업하게 되었는가?

와카오 아야코│미조구치 감독의 <적선지대>에 주인공으로 발탁됐는데, 당시는 나도 신인이었기에 주변의 선배 배우나 여배우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정도의 촬영 후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조구치 감독이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는지 마스무라 감독에게 나를 교육시키라고 말했었다. 그때 마스무라 감독은 회사의 명령으로 이태리에 유학 예정이었다. 실비나 망가나, 소피아 로렌 등이 출연했던 이태리 촬영소에서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명랑소녀>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영화에 내가 주연으로 발탁됐다.

 

 

 

 

김성욱│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해 자기 결정을 주장하는 여인상의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와카오 아야코│당시 일본영화의 젊은 여인의 역할은 국한되어 있었다. 예쁜 여성, 조용하고 차분한 여성, 아니면 악역이나 못된 짓하는 여성이다. 그런 식으로 두 가지 패턴이 있었다. 반면 마스무라 감독이 이탈리아에서 본 영화 속의 여성상은 살아 있는, 리얼한 여성이다. 이탈리아 여성은 일본 여성과 달리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표현하는 여인들이다. 그런 것을 내게 바랐던 것 같다. 일본으로 돌아온 마스무라 감독은 얼핏 안 어울릴 것 같은 나를 자기 개성과 주장이 강한 여성상으로 개조하고 싶어 했다. <명량소녀>의 원작은 신데렐라 스토리이다. 신데렐라는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이다. 그런데 마스무라 판의 신데렐라는 달랐다. 기존의 신데렐라와 달리 당하기도 하지만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무찌르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그런 인물이다. 나는 항상 마스무라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고, 그게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연기를 해왔던 것 같다. 마스무라 감독은 자신의 의지를 가진 여인, 그런 여인을 연기하게끔 했다.

 

김성욱│당시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은 일본영화와 일본영화의 전통을 파괴하는 급진적인 시도를 벌였다 생각한다. 당시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이런 새로운 시도에 배우로서 어떻게 공감하셨는지?

와카오 아야코│(그런 여성상에) 공감했다기보다는 그동안 그려진 여성상이 실제로는 가짜였다고 생각한다. 17살, 18살의 살아 있는 실제 여자라면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다. 마스무라 감독도 영화 속의 허구적인 여성상에서 좀 더 리얼한 자연에 가까운 여성을 그려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여배우로서의 기쁨이었다. 당시 소위 의욕적이라 불리던 동년배 여배우들은 “나는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 이런 역할이 나에게는 맞다”고 피력한 경우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감독님이 와카오에게 이런 것을 시키면 재미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어울리는 역할을 해왔다. 내게서 감독들이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에 기대를 갖게끔 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김성욱│<아내는 고백한다>의 마지막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는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을 맹렬한 속도로 파고들어간다. 배우로서 이런 작품의 연기를 할 때 어떤 생각들을 했는가?

와카오 아야코│마지막 장면은 촬영 첫 날 찍었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마음의 준비를 했다. 감독은 손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식의 세부적인 디렉션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을 했다. 내가 느끼는 대로 포현한 것을 나중에 감독님도 최종본에 썼기에 감독에게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와 감독의 관계는 일종의 투쟁이라 생각한다.

 

 

 

 

김성욱│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은 편안한 감독이지만 업무상으로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들었는데, 촬영 현장에서 어땠는지?

와카오 아야코│까다롭다기보다는 엄격했다. 현장에서는, 나는 물론 감독님에게 대항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연기에 있어서는 항상 감독님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보통 촬영이 끝나면 배우와 감독이 회식을 한다던가 하는데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다. 현장에서는 항상 긴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독과의 관계는 좋았다.

 

김성욱│당신이 보여준 연기는 배우가 만들어내는 기적 같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에 어떻게 이렇게 새로운 여성상을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와카오 아야코│영화를 찍을 때는 어려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연기에만 집중한다. 이게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생각하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여성상이 받아들여졌기에, 지금까지 나 또한 여배우로서 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뷰:

若尾 文子 X 김성욱

 

 

  1. 우아한 사랑 2013.10.07 13:46

    와카오 아야코님이 우리나이로 무려 여든한살이시라니...! 정말 나이보다 20년은 젊어보이세요~!




ECM 특별행사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이번 기회에 ECM과 영화의 관계를 살펴보는 특별전을 시네마테크에서도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흥미로운 기획이 될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특별히 ECM의 대표인 만프레드 아이허도 방한하니, 직접 그에게서 고다르 등의 작가들과의 작업에 대해 듣고 싶었던 것이다. 고다르의 사운드에 관한 이야기를 만프레드 아이허를 통해 듣게 된다니! 원래 대로라면 테오 앙겔로플로스나 베르히만, 타르코프스키 등의 영화도 상영할 생각이 있었지만, 아쉽지만 이 영화들의 국내 상영은 국내배급사가 판권을 갖고 있어 도리어 상영이 어렵다.   


음악인들은 생소할 테지만-때론 영화인들조차 모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ECM 은 그동안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고다르와 ECM의 관계는 각별하다. 만프레드 아이허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운드 작업이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고, 고다르는 ECM의 (현대)음악들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들의 음악을 듣는 것 같다는 음악적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 둘은 이미 사운드를 프로듀싱하는 방식에서 이미 공유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가령, 고다르의 사운드 활용은 주류적인 영화음악의 작곡과 비교할 때 더욱 특별해 보인다. 그는 80년대 이래로 전통적인 방식의 영화음악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고다르는 자신이 영화의 ‘작곡가’임을 자칭하기까지 한다(종종 그는 크레딧에 자신이 작품을 ‘연출directed by’했다기보다는 ‘작곡composed by’했다고 쓰곤 한다). 고다르가 음악과 관련해 작업하는 일이란 기성의 곡을 활용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ECM의 만프레드 아이허와의 우호적이고 지적인 관계에 힘입은 바 크다. 자신이 흥미있어 하는 여러 음악가들, 그들의 작품에서 창작에 쓸 만한 것들을 선별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오직 고다르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작업의 방식은 고다르의 작품에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첫째, 고다르의 음악의 활용은 일반적인 영화음악과는 달리 편곡, 혹은 리믹스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는 몇 가지 예외를 제하자면(이를테면 단편들에서 전곡을 활용하는 경우), 대부분의 작품에서 ECM 음반의 음악적 질료들을 리믹스해 그의 작품에 새롭게 활용했다. 이러한 수법은 각각의 음반이 지닌 고유한 특징들, 역사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몽타주와 비슷한 효과를 갖는다. 그렇게 고다르는 아르보 파트, 폴 힌데미스, 메레디스 몽크, 기야 칸첼리의 음반들을 자신의 작품에 가져왔다.


둘째, 고다르는 <누벨바그>를 시작으로 단지 영화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ECM에서 영화의 음반을 만들었다. 통상적으로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라 부르는 것인데, 고다르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에서 활용된 음악들의 모음이 아니라 영화의 대사와 노이즈 등이 모두 포함된 완전한 사운드 트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의 음반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부재한 또 한 편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음악으로서의 영화’는 이미지와 독립된 고유한 표현 형식으로서의 작품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눈먼 관객들, 즉 시각성의 부재에서 영화를 체험하는 다른 관객들을 전제할 것이다.


고다르는 원래 ECM 레코드의 음악가들 몇 명을 방문하는 아이디어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계획은 고다르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나중에 대폭 수정되어 다른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고다르의 <아워뮤직>이 만들어졌다.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것으로 상황은 변경됐지만, 그럼에도 음악에 관한 아이디어는 그 제목에 흔적을 남겼다. 우리들의 음악이란 여기서 영화의 다른 표현과 다른 작용을 의미할 것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보기를 중단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혹은, 마치 바울의 회심을 이끌었던 사건처럼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고다르의 표현을 빌자면, 영화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우리를 이끄는, 우리들의 음악인 것이다. 

베르나데트 라퐁을 기억하며

 

 

 

 

 

베르나데트 라퐁이 세상을 떠났다. 몇 가지 단편적인 영화적 기억들이 떠오른다. 물론 이 기억이 소환하는 이미지들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가장 강렬하고 우아한, 그녀 삶의 뜨거운 순간들이다. 그녀는 누벨바그 초기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이 영화로 끌어들인 배우다. 그런 여인들은 꽤 있었다. 잔 모로가 있고, 안나 카리나가 있고, 브리지트 바르도가 있으며 델핀 세리그가 있다. 베르나데트 라퐁은 그녀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아름다우면서 와일드하고, 자유로우면서 동물적인, 너울거리는 몸의 현전성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바르도에 비견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터부를 깨뜨린 여인이다. 이를테면 조금은 원시적인 삶의 모습이나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누벨바그 감독들이 해방의 시대를 맞이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다. 사회적이고 영화적인 터부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한 여인. 장 르누아르가 미셸 시몽을 환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트뤼포는 일찍이 이 모든 것을 간파해 그녀의 너울거리는 몸의 활력을 필름에 담아낸 첫 번째 감독이자(물론 <미남 세르쥬>(1958)의 클로드 샤브롤을 간과할 수 없지만)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나데트 라퐁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줍음을 타는 모순에 가득한 남자들이 이런 유형의 여성에게 매혹을 느끼는 법이다. 이른바 고혹적이면서도 불량한 여인, 후회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자유로운 여성 말이다. <개구쟁이들>(1957)을 만들 때 트뤼포는 모리스 퐁스의 단편이 묘사한 한 여인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섹슈얼하면서 자극적인, 하지만 눈이 부실 만큼 예쁜 여인. 그렇게 17살의 베르나데트 라퐁이 트뤼포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치마를 휘날리며 적나라하게 다리를 드러내고 자전거를 타는 눈부신 여인이자 아이들의 눈길을 빼앗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름다운 여인이다. <나처럼 예쁜 여자>에서 트뤼포는 다시 한번 그녀를 소환했는데, 이번에 그녀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정상적인 사회 복귀가 불가능한 불량한 여인, 혹은 사랑에 미친 여인이자 노래와 섹스 사이의 불가해한 여인이다. 그녀는 이렇게 노래 부른다. “밴조를 손에 든 소녀. 발가벗고 오두막에 서 있네” 혹은 “나는 길을 따라 걷지도 뒤돌아보지도 않는 여자,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러면서 수많은 키스를 그리워하는 여자. 나처럼 예쁜 여자”. 그녀의 거침없는 표현력과 넘치는 활력, 폭발과 감동을 드러내는 존재감에 트뤼포는 마치 자신의 인생을 걸듯 연기한 여인에게 찬사를 보냈고, 인생을 걸듯 연기하는 여인 앞에서 그 또한 영화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란 그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법이다.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3)는 그녀에 관한 가장 슬픈 이미지로 남아 있다. 으스타슈는 68세대 젊은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탐구하는데, 여기서 베르나데트 라퐁은 성스러운 창녀와 보헤미안 청년에 비하자면 서른을 넘긴 여인, 혹은 엄마이다. 트뤼포의 <나처럼 예쁜 여자>에서 동물적인 활력을 보여주었다면 여기서 그녀는 꽤 식물적이다. 그녀는 젊은이들의 지난 5년의 슬픔(뜨거운 68년을 보낸 젊은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이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여인이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믿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두 남녀가 방을 떠나고 그녀는 조용히 앉아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는다. 파리의 애인들을 그린 노래다. 우리는 이 상냥한 곡이 온전히 끝날 때까지 그녀가 듣고 있는 것을, 그리고 조용히 흐느끼는 순간을 지켜봐야만 한다. “만물이 생동하고 사랑이 가득한 어느 봄날에 내 노래는 정원에서 길을 잃더니 내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파리의 연인들은 이상해요. 내 노래를 들으면 서로 사랑하게 돼요.” 우리는 그녀를 잃었지만 사랑으로 그처럼 예쁜 여인을 기억할 것이다. (김성욱)

 

* '씨네21'에 베르나데트 라퐁에 관해 썼던 추모기사이다. 여배우에 관한 진실은 그들이 관객을 영화에 연결시키는 화신이자, 가장 직접적인 상상력이 매개자이며 영화에서 가장 큰 갈망이 대상이며 감동의 대상이고, 동시에 혐오스럽고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 모든 것을 보여준 배우라는 점에서 배우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지만 트뤼포의 <나처럼 예쁜 여자>(1972)를 보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그녀가 트뤼포의 단편 <개구장이들>(1957)의 베르나데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그녀의 외모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개구장이들>을 만들 때 트뤼포는 모리스 퐁스의 단편이 묘사한 한 여인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다. “그녀는 강물에 목욕하러 갈 때면, 길목에 자전거를 자물쇠에 묶어 놓았다 그녀의 헐렁헐렁한 치마는 언제나 말려 올라간데다가, 틀림없이 속치마는 안 입었을 것이므로 더운 날에는 자전거 안장이 아주 축축해졌다.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안장 위에는 연한 둥근 얼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트뤼포는 섹슈얼하면서 자극적인, 하지만 눈이 부실만큼 예쁜 여인을 떠올렸고 그렇게 17세의 베르나데트 라퐁이 트뤼포의 눈에 들어왔고 그녀 또한 영화의 길에 들어섰다. 그녀는 치마를 휘날리며 적나라하게 다리를 드러내놓고 자전거를 타는 눈부신 여인이자 아이들의 눈길을 빼앗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름다운 여인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녀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누벨바그의 활력의 상징이자 삶의 상징이었다.

 

 

 

 

가토 다이의 임협영화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2003년 9월의 일이다. ‘일본 액션영화 걸작선’으로 마스다 도시오의 <붉은 손수건>(1964)에서 하세가와 가즈히코의 <태양을 훔친 사나이>(1978)까지 총 9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때 가토 다이의 ‘붉은 모란 시리즈’ 중 <화투 승부>(1969)와 <오류의 방문>(1970)을 상영했다. 그해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특별전의 순회상영이었다. 가토 다이의 영화를 비디오가 아니라 필름으로 극장에서 처음 보았던 때이다. 2011년에는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붉은 모란 시리즈’ 7편을 상영하기도 했으니, 이번 ‘임협영화 걸작선’은 세 번째 기획행사로 특별히 ‘도에이 임협노선’에 주목한다.


도에이의 임협노선이란 1963년작 <인생극장 - 히샤카쿠>에서 시작해 1973년의 <의리없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간 지속된 제작노선을 의미한다. 이 시기 일본영화 산업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 산업의 급성장으로 사양길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영화사가 경영 위기에 빠져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이때 도에이는 전통적 사극을 현대화하면서 임협 장르를 고안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도에이는 총 673편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임협영화로 분류될 영화는 235편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전체 작품의 1/3에 해당될 정도로 많은 비중이다. 특히 1967년과 68년 사이에 총 제작편수는 60편 정도로 줄었던 반면 임협영화는 30편에 달해 제작편수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흥행의 전체적 불황기에도 임협영화는 활기가 넘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대다수의 대중장르에 대한 논의가 그러하듯 임협영화 또한 영화와 감독, 사회, 문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고려해야만 아마도 설명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화사들도 시도는 했지만 특별히 도에이에서 이 장르가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적인 스타들, 뛰어난 제작자, 그리고 특별한 감독들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도에이는 텔레비전에 잃어버린 관객들보다는 텔레비전이 끌어들일 수 없었던 관객층을 겨냥해 이 장르를 고안했다고 한다. 안보투쟁의 기세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던 60년대의 반체제 학생들, 노동자 계층, 그리고 한계적인 여성층들을 목표로 이 장르는 효과적으로 기능했고 성공을 거뒀다. 영화가 뜨겁고 불량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임협영화가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전세계의 비평가들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임협영화, 혹은 가토 다이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던 듯하다. 외국 평자들에게도 가토 다이는 ‘장르 감독’ 이상의 그 어떤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임협영화 걸작선’을 맞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는 저명한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 씨는 그런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평론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는 1960년대 후반 가토 다이의 영화에 매료되었지만 당시 그에 관한 영화평론이 없었다며 그리하여 왜 본격적인 영화비평이 없는 것인지, 임협영화나 활극은 제대로 된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기성의 평론에 대한 불만을 더해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가토 다이는 영화비평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내게 이 장르는 무엇보다 뜨거웠던 60년대 후반의 사회를 영화를 통해 상상하도록 하기에 흥미롭다. 오가와 신스케가 <압살의 숲>(1967)으로 학생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있었고, 오시마 나기사는 <교사형>(1968)을 만들고 있었으며, 쓰치모토 노리아키는 <빨치산 전사>(1969)를 만들던 때에 가토 다이의 <붉은 모란>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붉은 모란 - 돌아온 오류>(1970)의 라스트는 이러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나이와 둘이서 후지 준코는 적진으로 쳐들어간다. 그들은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과 그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전투성과 모성을 양날의 칼로 지녔던 후지 준코는 그들을 에워싼 적들 속에서 단도를 휘저으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액션을 토해낸다. 그로 인해 언제나 단정하게 말아 올렸던 그녀의 머리가 흐트러져 바람에 흩날린다. 이 장면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폭력의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녀의 사랑이 흩어지는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지 준코는 60년대의 여인으로 기억된다. 이번 특별전이 새롭게 이 장르를 사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1. 의리의 인력거꾼 車夫遊侠伝・喧嘩辰 / Fightin’ Tatsu the Rickshaw Man

 

 

 

 

1964│99min│일본│B&W
연출│가토 다이
원작│가미야 고헤
각본│가토 다이, 스즈키 노리부미
촬영│가와사키 신타로
음악│다카하시 나카바
편집│ 미야모토 신타로
출연│우치다 료헤, 가와라자키 초이치로, 후지 준코

 

때는 1898년, 겨울의 오사카. 인력거꾼 다쓰고로는 항상 소동을 벌이는 말썽꾼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가 오사카 역에서 위세를 떠는 의원을 상대로 싸움질을 하다 구역을 책임지는 니시카와 조직의 야쿠자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비춘다. 로우앵글의 화면이 돋보이는 초반부의 싸움에는 그러나 가토 다이의 이후 영화에서 보이는 비장함이란 없다. 오히려 시대극에 익살 소동극을 섞은 코미디에 가깝다. <의리의 인력거꾼>은 도에이의 임협영화가 아직 만개하기 전, 말하자면 장르의 규칙과 양식미가 엄격하게 작동하기 전 보다 자유롭고 가벼운 터치로 일관한 영화다. 영화의 흥미로움이 여기에 있다. 자기의 구역이라며 텃세를 부리는 야쿠자들에게 그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며, 자신은 규칙을 따르는 일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후의 임협장르가 요구하는 이른바 규칙에 순응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꽤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그 때문에 세 번의 결혼식이 벌어지는 소동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게이샤 기미야코 때문에 시작된다.
구역싸움으로 허구한 날 다툼을 벌이던 다쓰고로는 어느 날 미모의 게이샤 기미야코를 인력거에 태우다 그녀가 건방진 행동을 한다며 다리 위에서 강에 내던져 버린다. 그 때문에 그는 니시카와 조직에 끌려가는데, 사실 그녀는 니시카와 두목의 여인이 되기로 했던 터이다. 두목은 그의 호기로움에 매료되어 조직원으로 들어오도록 요구하는데, 당돌하게도 그는 기미야코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다. 첫눈에 그녀에게 빠졌다며 한눈에 반한 사랑은 지속된다는 엉뚱한 언설을 늘어놓는데, 이 호기로운 행동에 두목도 허락한다. 하지만 약혼식 후의 온천장에서 그는 기미야코가 두목의 여인이라는 고백을 듣고는 분개해 파혼을 선언한다.
액션의 장면들도 흥미롭지만 영화 초반 다쓰고로가 니시카와 조직에 끌려가 기미야코에게 구애를 하는 순간의 양식미가 눈길을 끈다. 수평으로 긴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좌측 원경에서는 두목과 다쓰고로의 대화가 벌어지는데, 이때 정작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화면의 우측 전경에 클로즈업된 기미야코의 얼굴이다. 아주 긴 대화 장면이 컷 없이 지속되는 와중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기미야코의 생생한 표정을 관찰할 수 있다. 가토 다이의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심도 깊은 화면의 연출로 꽤나 아름다운 순간이다. 약혼식을 올리고 저녁길에 그녀를 인력거로 끌어 온천으로 향하는 장면 또한 낭만적이다. 남자들의 거친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에게 이런 세심한 장면들이 도리어 작지만 반가운 선물처럼 다가온다.

 

 

2. 메이지협객전 明治侠客伝・三代目襲名 / Blood of Revenge

 

 

 

 

1965│90min│일본│Color
연출│가토 다이
원작│가미야 고헤
각본│무라오 아키라, 스즈키 노리부미
촬영│와시오 모토야
음악│기쿠치 순스케
편집│가와이 가쓰미
출연│쓰루타 고지, 쓰가와 마사히코, 후지 준코


기야타쓰 조직의 두목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의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는 이 첫 사건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을의 축제가 한창 벌어지는 거리. 문신이 새겨진 건장한 몸의 사내들이 가마를 메고 힘을 쓰는 중에 그 무리들을 등지고 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때는 1907년의 오사카. 이어 기타야쓰의 얼굴이 마찬가지로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이어지는 화면들도 짧은 컷의 연속이다. 발의 클로즈업. 칼의 클로즈업. 그리고 심한 고통에 일그러진 기타야쓰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살인이 이제 막 발생한 것이다. 서두의 십여 분간 진행되는 이런 식의 살인극은 과장된 연기를 배제한 지극히 브레송적인 몽타주 컷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소매치기>의 첫 장면을 살인극으로 구현했다고나 할까. 이미 첫 장면만으로도 <메이지협객전>은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한 영화다. 이어 보스가 살해되면서 다혈질의 아들 하루오는 복수를 결심하는데, 보다 차분하고 과묵한 보스의 오른팔 아사지로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조직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보스의 죽음 이후 아사지로가 후계자로 임명되면서 갈등은 커져만 간다.
전작 <의리의 인력거꾼>과 마찬가지로 가토 다이는 야쿠자 장르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련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한다. 게이샤를 연기한 후지 준코가 아사히로와 다리 위에서 마음을 나누는 장면은 <붉은 모란 - 돌아온 오류>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리에서 벌어지는 서정적인 순간의 전조이다. 로우앵글의 카메라가 다리 위를 걸어가는 후지 준코를 보여준다. 갑자기 그녀가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오는데 그때 아사지로가 반대편에서 등장한다. 아사지로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잘 치렀냐고 묻는다. 아사지로는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그녀가 부모의 임종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녀를 도왔던 것이다. 그녀는 “왜 나 같은 여자에게 친절하게 하냐”며 반문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품에서 꺼낸 복숭아 두 개를 꺼내 고향에서 들고온 선물이라며 그에게 내민다. 그들의 뒤로는 저녁노을이 이제 막 지고 있다.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이다. 조직의 3대를 계승한 아사지로가 치르는 격전은 이 순간 다음에 벌어진다. 그는 경찰에 끌려가고 여인은 흐느낀다.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이 어떻게 변경되는지를 얼마 후 후지 준코가 연기한 ‘붉은 모란 시리즈’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이제 둘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는 동행의 의식으로 적들과 싸움을 벌인다.


3. 붉은 모란 - 화투 승부 緋牡丹博徒・花札勝負 / Red Peony Gambles Her Life

 

 

 


1969│98min│일본│Color
연출│가토 다이
원작│이시모토 히사키치
각본│스즈키 노리부미, 도리이 모토히로
촬영│후루야 오사미
음악│와타나베 다케오
편집│미야모토 신타로
출연│후지 준코, 아라시 간주로, 다카쿠라 겐, 와카야마 도미사부로


후지 준코가 주연한 도에이의 '붉은 모란 시리즈’는 총 8편이 만들어졌다. 야마시타 고사쿠를 시작으로 가토 다이 등의 감독이 연출에 참여했는데, 가토 다이는 이 중 세 편을 만들었다. 그 첫 작품이 3화인 <화투 승부>로,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눈먼 소녀를 돕는 야쿠자 도박꾼 오류(후지 준코)의 이야기가 6화에서 반복되기에 연작이기도 하다. 가토 다이의 탁월함은 폭력의 격전과 시정 넘치는 연애적 사건 둘 다를 놓치지 않는 섬세한 연출에 있다. 임협 장르에 품격을 더하는 것. 이를테면 오류는 단도와 총을 기모노의 넓은 소매 속에 숨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지만 여전히 여성적 풍미와 관대함을 잃지 않는다.
시대적 배경은 메이지 시대의 나고야. 철로변을 걷고 있던 오류는 눈먼 아이가 기차에 치일 뻔한 순간 재빨리 구해준다. 이 우연하고 당돌한 시작의 사건은 오류의 인정과 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실은 간단치 않은 질문으로 진전된다. 결국 이 아이의 운명은 구제될 것인가? 나중에 니시노마루 일가에 신세를 지게 된 오류는 이 아이가 자신을 사칭하며 사기도박을 일삼는 여도박사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니시노마루의 외동아들 지로는 이 일가와 라이벌 관계인 긴바라 일가의 딸 야에코를 사랑한다. 두 일가가 사업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게 되면서 연인들의 사랑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결국, 니시노마루가 긴바라 일당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고 오류는 혈혈단신 복수를 하기 위해 결전을 치른다.
이야기의 얼개는 임협 장르의 주된 특징에 기대고 있지만 가토 다이의 연출의 강세는 도리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남자와 여자의 멜로드라마를 부각시킨다. 지로와 야에코의 사랑은 라이벌 가문의 적대성 가운데 피어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비극적 사랑을 대중적인 클리셰로 드러내는데, 그 가운데 오류와 하나오카(다카쿠라 겐)의 소란스럽지 않은 사랑이 더해진다. 오류를 마음에 품고 있던 하나오카가 그녀의 살극의 책임을 대속하면서 여기서도 비극의 드라마가 완성된다. 이들의 사랑은 하나오카가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느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범상한 애정은 아니다. 영화는 이 둘이 빗속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의 시정을 매혹적으로 표현한다. 오류가 그에게 우산을 넘겨줄 때 손가락이 가볍게 접촉하는데 그 순간 하나오카는 접촉의 감각에서 그녀의 온정을 죽은 어머니의 기억으로 떠올린다. 최종적인 액션이 벌어지기 바로 전에 눈밭을 둘이 걸어가는 순간이나 한 손에 단도를,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수십 명의 적을 분주히 쓰러뜨리는 난투 장면은 이 강렬한 액션의 폭력에 부드러움을 더한다. 그것은 복수라기보다는 마치 폭력의 에너지들을 거둬들이는 것으로 보일 만큼 우아하다.


4. 붉은 모란 - 돌아온 오류 緋牡丹博徒・お竜参上 / Red Peony Finds a Daughter

 

 


1970│99min│일본│Color
연출│가토 다이
각본│스즈키 노리부미, 가토 다이
촬영│아카쓰카 시게루
음악│사이토 이치로
편집│미야모토 신타로
출연│후지 준코, 아라시 간주로, 스가와라 분타


가짜 ‘붉은 모란’ 행세를 했던 오도키의 딸 기미코를 찾기 위해 오류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돌아다닌다. 도쿄의 아사쿠사 거리에서 결국 오류는 기미코를 찾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조직 간의 항쟁에 휘말리고 만다. 이곳에서는 야쿠자 일가들이 새로 생긴 인기 극장의 지배권을 두고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오류는 분쟁에 휘말리고 기미코는 오류가 신세를 지는 뎃포큐와 라이벌 관계인 사메즈 가의 조직원인 긴지와 사랑에 빠진다. 3화에서 보였던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사랑이 반복된다. 그 와중에 오류는 7년 전에 헤어진 여동생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아오야마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된다.
6화에서 오류가 처한 도덕적 곤경은 더 심화된다. 그녀는 기미코를 오랫동안 방치했었고(그 때문에 오류는 소녀를 찾아 수년간 떠돌아다녔다) 급기야 기미코의 약혼자가 야쿠자의 복수극에서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두 장면에서 오류가 처한 상황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가령 오류가 기미코를 뎃포큐 가의 집에서 재회하는 첫 순간. 로우앵글로 표현된 깊이 있는 화면의 전경에는 기미코가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앉아 있다. 중경과 후경에는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야쿠자들이 보이고 그 사이에 오류가 있다. 긴 화면의 세로축의 심도가 강조된 밀도 높은 인물들의 배치는 중경과 후경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것에의 반응과 감정을 전경의 기미코에 집중하게 한다. 마침내 오류는 부모의 죽음으로 외톨이가 된 기미코를 두고 떠난 것을 사과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오류가 화면의 전경에 위치하고 후경에는 기미코가 가부키 연극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녀는 여인의 운명을 대사로 읊조리고 있다. 오류는 무대 위의 기미코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린다. 복수를 위해 적진에 홀로 나서기 직전이다.
잃어버린 동생이 유곽에서 쓸쓸히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오야마와 다리 위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장면도 아름다운 순간이다. 눈발이 매섭게 내리고 있다. 아오야마는 이제 고향으로 되돌아가 죽은 여동생의 시신을 부모님 곁에 묻을 거라 말한다. 오류는 기차에서 드시라며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내민다. 그 순간 품에서 떨어져 나온 귤 하나가 눈밭 위를 떼구르 굴러간다. 하얀 눈과 대비되는 오렌지빛 귤은 여성적 상냥함과 모성애와 갈망을 의미한다고 한다. 라스트의 액션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러한 서정적인 순간들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을 격렬한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적들에 둘러싸여 그녀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격렬한 액션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언제나 단정하게 말아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져 바람에 날린다. 그녀의 사랑이 흩어지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딱히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헤수스 프랑코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여행길의 서점에서 샀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에 관한 관심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꼭 책을 읽겠다고 샀던 것은 아니었다. 책이란 친구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헤수스 프랑코의 영화는 마치 어린 시절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야만 했던 골목길 어느 낡은 집과도 같은 인상이다. 피해가면서도 계속 시선이 머물던 곳 말이다. 그러니 두 권의 책을 내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적당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한 권은 파리에서 구입한 것으로 『판타즘의 에너지』라는 제목의 제법 진지한 분석이 담긴 근사한 책이다. 도쿄에서 샀던 또 한 권은 이런 작가에 관한 책이라면 언제나 한 권쯤은 있기 마련인, 그래서 몇 페이지만 들처봐도 “흠, 이 저자는 매니아임이 틀림없어”라 확신하게 되는 그런 류의 책이다. 제목은 『이형의 감독 : 헤수스 프랑코』이다. 두 권의 책이 나왔던 시점이 각각 2004년과 2005년 무렵임을 감안하자면 전 세계적으로도 헤수스 프랑코를 그래도 새롭게 조명하려 했던 것이 21세기에 들어서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여전히 다른 나라의 사정이다. 책을 구입하면서도 그의 영화를 상영할 날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올해 ‘뱀파이어와 영화’라는 테마를 시네바캉스의 한 섹션으로 떠올리며 이 기회에 슬쩍 헤수스 프랑코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상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영이 결정되고 나서 얼마 후 뒤늦게 그가 올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헤수스 프랑코에 관한 한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분석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 자동 반응하는 로봇 같다고 비판했었다). 어떤 이들은(가령 다네의 경우) 그의 작품을 보지는 않았지만 황당무계하여 모순적이기까지 한 그의 영화가 그나마 정직함을 지니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그는 너무 많은 제작에 이름을 올려 비평가들이 도리어 작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다. 그는 영화 연출의 폭식가로(생전 2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혹은 소매치기식 연출(그는 주어진 제작비와 일정을 잘 지키면서 돈을 남겨 같은 제작진들과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곤 했다)로 유명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만든 영화의 질에 관심이 없었고, 가명으로 여러 버전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고아가 될 법한 영화들의 아버지를 자처했다. 영화가 사양길로 접어들던 6-70년대에 헤수스 프랑코는 마치 1930년대 할리우드 B급영화 감독들처럼 시대착오적인 황금기를 살았다.

 

 

 

 

그는 평생 어떤 터부에서도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었고 고전주의,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를 대중영화와 접목해 내러티브와 시각적 실험을 도모했다. 말 한 마리로 웨스턴을 찍었던 B급영화 감독들처럼 날림으로 한 편을 해치우는 작가들도 공을 들이는 작품이 있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작품을 남기는 법이다. 그는 걸작을 만들려고 의도했던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흥미로운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우리는 먼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나중에 그것은 걸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처음부터 걸작을 만드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쇼트들은 완벽한데, 정작 그 결과는 참을 수 없는 영화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었다. 헤수스 프랑코의 모든 영화가 걸작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옥석을 가려야만 하는 작품들이 숨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일부러 피해갈 필요도 없다. 한여름의 시네바캉스가 이제 시작했으니 즐기시기를 기원한다.(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 2013'에서는 '뱀파이어 섹션'에서 헤수스 프랑코의 <레즈비언 뱀파이어>를 상영한다.




1952년 시네라마[3대의 카메라에서 동시에 촬영한 필름을 3대의 영사기에서 횡장의 스크린에 영사해 입체적인 화면을 얻는 영화로, 스크린의 가로 세로 비율이 1:2.88이다]가 처음 선을 보인 후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앞 다퉈 시네라마와 유사한 와이드 스크린을 만들어냈다.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곳은 20세기 폭스사. 폭스는 프랑스의 발명가인 앙리 크레티앙이 1920년대에 발명한 애너모포스코프의 세계 특허권을 사들였고, 이것을 시네마스코프라 불렀다. 앙리 크레티앙이 고안한 애너모픽 렌즈는 표준 렌즈 앞에 부착해 표준 렌즈가 수용할 수 있는 영상의 2배 정도의 크기를 좌우방향으로 압축해 35mm 필름에 담아낼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촬영한 필름을 거대한 와이드 스크린 장비가 설치된 극장에서 펼쳐 보이는 공정을 통해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만들어진다. 기존의 화면보다 2배 넓게 보이는 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는 1:2.35. 


일본의 경우 도호스코프는 가로 세로가 1.37:1에서 1:2.35로 도호가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1957년 7월의 일이다. 이유는 1953년 2월, NHK 텔레비전 방송의 보급에 대항하기 위해 영화 화면의 크기를 키울 필요성이 있었던 것. 구로사와 아키라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1958)에서 처음으로 와이드 스크린을 사용했다. 이 경향은 1970년 <도데스 카덴>까지 이어진다. 이미 일본의 영화 회사들은 1957년에 이르러 빠짐없이 자사 제작의 와이드 스크린 영화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도헤이 스코프, 닛카츠 스코프 등 등. 그러나 이러한 와이드 스크린 영화들은 영화 연출에서 문제를 양산했다. 특히나 깊이의 문제가 있다. 촬영시에 애너모픽 렌즈를 다는 것은 초점거리가 길어져 특유의 평면적인 영상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애너모픽 렌즈는 광량이 손실을 불러와 세트에서 촬영시에 전체적으로 선명한 영상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와이드 스크린이 화면이 옆으로 길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로가 좁아졌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을 정도다. 


많은 광량을 동원해 딥포커스 테크닉을 보여주었던 구로사와 아키라 또한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구로사와의 가장 효과적인 해결은 수직의 구도를 활용해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요짐보>(1961)의 마지막 장면이 이를 예증한다. 저 멀리 후경으로 마지막 결투를 치르기 위해 미후네 도시로가 들어온다. 전경에는 두 명의 남자가 화면의 우편에 서 있고, 세로의 구도로 한 남자가 매달려 있다. 스코프의 수평선과 수직의 충돌. 아직 전경에 있는 이들은 후경에 등장한 미후네 도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전경의 두 인물은 언제 저 깊이 속에서 등장한 미후네 도시로를 인식할 것인가? 결투를 예고하는 사건의 긴장감이 만들어진다. 잠시후, 이들은 미후네 도시로의 등장을 알게 되고 화면의 왼편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에 저 깊이에서부터 화면의 전경으로 액션의 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다. 전경의 두 인물이 일어서는 순간 카메라 또한 그들과 함께 상승하면서 왼편에 매달려 있던 사람의 존재가 드러난다. 화면의 전경을 차지하는 이는 이제 밧줄에 매달린 사람. 그는 저 후경에 등장한 미후네 도시로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이다. 수평으로 늘어선 악당들의 무리. 그리고 저 멀리 미후네 도시로가 서서히 걸어온다. 와이드 스크린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중층적인 프레임과 수직의 구도는 관객의 시선을 넓은 화면에서 수직의 깊이로 향하게 하고 고립과 긴장감을 증대시킨다. 구로사와의 와이드 스크린의 미학은 그런 점에서 미후네 도시로가 집단 내에서 처한 상황, 인물들과의 관계와 심리, 고독감의 테마와도 연결된다.(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사무라이의 길

 

<7인의 사무라이>는 16세기 일본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산적들에게 매년 식량과 여자를 약탈당한 산간의 농민들이 일곱 명의 사무라이를 고용해 산적과 싸우는 이야기다. 상영시간이 3시간 반에 달하는 이 영화는 당시 2억 엔이 넘는 제작비(당시 일반적인 영화의 7배에 달하는 예산)에 1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초대형 대작이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진정한 대작인 것은 이 영화가 이후 등장한 수많은 무협영화, 서부영화, 그리고 액션영화에 많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협녀>로 유명한 호금전 감독은 액션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로 <7인의 사무라이>를 꼽았다. 특히 그가 기억하는 장면은 사무라이 간베이가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으로 둔갑해 주먹밥을 들고 오두막에 들어가 아이를 인질로 잡은 도둑을 베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정작 중요한 사건을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영화 속 군중들처럼 바깥에서 오두막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호금전이 말하듯이 이 장면은 구로사와 감독이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1946)에 감화받아 구성한 장면이다. 보안관 와이어트 워프(헨리 폰다)가 술에 취한 인디언을 끌고 나오는 장면에서 존 포드 감독은 이와 유사한 연출을 이미 보여주었다. 구로사와는 존 포드처럼 액션이 벌어지는 사건을 화면의 바깥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한다.

 

액션에 정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연출 또한 흥미롭다. 가령 검의 달인인 규조를 보여주는 방식은 대부분 그렇다. 두목 간베이와 동료들이 사무라이를 모으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닐 때 그들은 규조가 대중들 앞에서 떠벌이 사무라이와 벌이는 겨루기를 본다. 이 장면에서 규조는 검을 뽑지도 않고 단지 적을 한참 노려보더니 “바보 같으니, 이미 승부는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상대의 모습과 상태만을 보고도 승부를 읽어낸 것이다. 이 과묵한 사무라이는 이후에도 영웅적인 풍모를 보여준다. 산적들이 마을을 침공할 때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산적들이 쏘아대는 총이 어느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지 몰라 곤란을 겪는다. 이때 규조는 자신이 적진에 가서 총을 한 정 훔쳐오겠다고 말한다. 그는 쏜살같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고, 카메라는 그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윽고 얼마 후, 규조는 보란 듯이 한 손에 총을 들고 임무를 완수한 채 마을로 되돌아온다. 그가 적진에서 어떻게 총을 훔쳤는지는 보여지지 않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활약을 상상할 여지가 더 많아진다. 반면, 어린애처럼 날뛰며 까불거리는 농부 출신의 사무라이 기쿠치요가 적진에서 총을 노획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상세히 보여준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최고의 전투 장면은 무엇보다 영화의 종결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진흙탕을 뒹굴면서 흙투성이가 되어 산적들과 벌이는 집단 전투 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장면에서 세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같은 움직임을 서로 다른 거리와 각도로 촬영, 편집해 최후 격전의 냉혹한 분위기를 동적으로 그려낸다. 구로사와가 이런 기법을 활용한 것은 <7인의 사무라이>가 처음이었다. 그는 폭우 속에서 산적들이 농촌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종래의 방식대로 개별 장면들을 촬영할 경우 액션이 어떻게 반복되고 촬영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3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3대의 카메라로 3개의 앵글로 촬영해 전투 장면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시 할리우드도 놀랄 일이었다. 구로사와는 이 3대의 카메라를 각기 다르게 사용했는데, 가령 첫 번째 카메라는 롱 쇼트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위치에, 두 번째 카메라는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그리고 세 번째 카메라는 장면 전체를 따라 돌아다니며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러니 촬영 과정에서는 장면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영화 스태프들 또한 장면이 어떻게 편집될지 궁금해 편집 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편집에 우선권을 두는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감지된다. “나는 무언가를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무엇보다 내가 촬영하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결정되고 나면, 그 장면이 어떤 앵글로 촬영되어야 최선인지 생각한다. 소망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촬영감독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에게 그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함께 일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얻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구로사와는 또한 제작 디자이너를 두지 않았으며, 쇼트의 장면은 물론 영화에서의 동선을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그는 원래 화가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과 무사가 계급 간의 대립을 넘어 공통의 적에 맞서는 이야기이자 그런 공생의 한계를 또한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러한 점이 사극의 한계를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한다. 가령 이 영화가 공개되던 1954년은 일본이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해상자위대를 창설하던 때이다. 우익들이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제기하던 때이고,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당한 우익 지도자들을 포함한 우익세력들이 일본사회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영화는 보수파의 군비증강 프로파간다로 환영받기도 했다. 영화에 담긴 패배의식(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사무라이들은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패배했다고 말한다)과 상喪의 의식은 패전 후의 상실감, 직업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귀환병들의 부랑자적 상태, 냉전 시기의 불안감과 보수적 심리 등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7인의 사무라이들이 상대하는 적들이 단지 악한들로 묘사될 뿐 분명한 설명이나 표상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적과 아군의 단순한 논리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구로사와 아키라는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비가시적 표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 말하지만). 물론 이러한 구도는 반대로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대중에의 계몽적 시도의 패배나 이상적인 공동체에 관한 꿈의 붕괴로 비춰지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런 점에서 기묘한 보편성을 얻어 여전히 회자되는 영화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폴 토머스 앤더슨의 5년 만의 신작 <마스터>(2012)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한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이야기의 시대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두 가지 궁금증이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대중적 상상력을 끌어와 보수주의의 회귀를 시도했던 레이건-부시 시대에 영화를 시작했다. 그에게 그렇다면 80년대를 경유한 50년대, 즉 아버지의 시대란 어떤 것일까? 둘째,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의 귀환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나는 이러한 궁금증이 결국 동시대 작가에 대한 세대론적 질문이자 역사적 위치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번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www.dureraum.org)에서 열리는 ‘멜랑콜릭 시네마-동시대 미국 거장 3인전’은 이런 질문에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획전이다. 이 기획전의 세명의 작가들인 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토드 헤인즈를 연결하는 공통의 맥락은 어떤 것일까. 기획전이 준비한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첫째, 이들은 대체로 90년대 초에 등장해 산업적 시스템이 가장 완강한 미국에서 도리어 미국영화의 경이를 입증한 뛰어난 감독들이다. 둘째, 이들은 스타일과 작업 방식은 다르지만 장르적 관습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인들의 우울한 내면을 치열하게 탐구해왔다. 셋째, 이들은 60년대 반문화의 반격의 시기에 태어나 이제 40대 초반(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에서 50대 초반(토드 헤인즈)에 이르는 비교적 젊은 감독들이다.


나는 공통의 근거를 다른 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너무 최근의 작가들이긴 하지만 이들의 영화를 세대론적인 측면에서 한번쯤 역사화 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가령 이 세 작가는 모두 레이건-부시 시대를 거쳐 90년에 들어 장편 데뷔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레이건-부시의 미국이란 국가적 상흔(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으로 상실된 자신감을 회복하려 시도한 시대로 영화는 새로 등장한 신우파(이들은 젊고 상승지향적인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른바 ‘나’ 세대의 여피들이다)의 보수적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1950년대를 떠올리게 했는데, 이때 1950년대란 대중의 상상 속에서 목가적인 소도시의 풍요로운 미국식 낙원같은 것이다. 시계가 갑자기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가난, 범죄, 노숙자, 가족과 지역사회의 붕괴 등으로 미국이 꿈을 상실하기 이전으로 안내한다. 소도시의 풍요로운 미국식 낙원에의 기대. 영화사가인 존 벨튼에 따르면 레이건-부시 시대는 2차대전 뒤 시작된 인구 이동이 마침내 새로운 국가적 인구 분포를 만들어낸 때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나 농촌에 사는 인구보다 교외에 사는 인구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미국의 교외화(이른바 서버비아, suburbia)는 소도시 가치관의 회귀를 의미 했다. 레이건-부시 시대의 영화는 그런 전통적 체제를 다시 상상하면서, 파괴된 가족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물론 주류영화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들 세 감독은 그런 기류에 반대로 역류하는 서버비아의 작가들이다.

 

 

이를테면 토드 헤인즈는 장편 데뷔작인 <포이즌>(1991)에서 80년대의 보수화된 사회에서 더욱 폐쇄적이 되어 고립된 서버비아의 공포를 불온한 공기로 담아낸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포이즌>은 ‘세편의 동성애적인 위반과 처벌이야기’로 각각 ‘호모’, ‘영웅’, ‘공포’라는 세 가지 제목의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립된 감옥에서 사랑에 빠진 두 죄수,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친 7살 소년, 그리고 실험을 거듭해 괴물이 되어버린 과학자의 이야기는 게이, 질병, 서버비아를 공포의 회로로 연결한다. 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보수화가 에이즈의 공포와 연결되는 식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사는 주부 캐롤이 화학물질 과민증에 발작과 신경쇠약으로 시달리는 이야기인 <세이프>(1995) 또한 서버비아의 소박한 중산층의 삶을 질병과 연결한 80년대 사회의 불안을 그린다. <벨벳 골드마인> (1998)은 80년대 중반의 뉴욕에서 시작해 70년대에 발생한 영국 글램록 스타인 브라이언의 암살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출발점인 80년대란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결국 그들이 바뀌어버린 시대이다. 토드 헤인즈는 아름다운 교외 도시를 무대로 점점 천국에서 멀어져가는 미국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파 프롬 헤븐>에서 드디어 1950년대를 정면으로 다룬다. 물론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이 영화는 50년대 보수적인 사회의 억압을 멜로드라마로 표현한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뉴욕에 거주하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인 <리틀 오데사>(1994)로 주목받았는데, 그의 영화는 이후에도 꾸준히 도시의 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는 도시, 가족의 유대, 비극적인 운명을 즐겨 다룬다. 인물들은 그리스 비극 같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가령 <더 야드>(2000)는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뉴욕 브라이튼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세탁소를 도와주는 주인공 레너드(와킨 피닉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패로 끝난 그의 우울한 자살 시도는 가족, 자영업의 세탁소 영업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위 오운 더 나잇>(2007)은 제임스 그레이의 가장 야심적인 영화로 개봉을 놓쳤던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다시 보았으면 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8년. 세계 경계가 불분명해져가는 시기이다. 소비에트의 붕괴 전야. 뉴욕의 러시아 마피아들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경찰은 이들과 범죄와의 전쟁을 시도한다. 인기 절정의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밤의 세계를 살던 바비(와킨 피닉스)는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이제는 러시아 마피아를 일망타진하는 경찰 세계에 들어선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예기치 않게 가족이 붕괴하고 폭력을 경험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놓인 바비는 두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혼란을 겪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야말로 전형적인 서버비아의 작가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산 페르난도 밸리에서 성장했던 어린 시절을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자리잡은 산 페르난도 밸리는 전후 교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과거 유니버설, 월트디즈니, 워너브러더스 등의 영화사가 있었던 곳이다. 80년대 이래로는 포르노영화를 만드는 회사들이 자리한 지역(미국 내 포르노영화의 90%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이자, 80년대 중반에는 미 전역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포르노 업계의 내막, 섹스와 마약, 가족 이야기를 다룬 <부기 나이트>(1997)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그의 개인적 성장사가 반영된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변방과 황폐화된 도시 근교는 미국적 꿈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주인공인 덕 디글러는 붕괴된 가족 대신에 포르노영화의 스타가 되어 다른 가족을 발견하려 한다.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1996)부터 폴 토머스 앤더슨은(의사) 가족 문제를 자신의 영화 속 주제로 확고히 했는데, 이는 <매그놀리아>(1999)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 이르면 개인주의와 가족, 석유와 종교를 둘러싼 미국 자본주의의 창생기로 지극히 야심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폴 토머스 앤더슨만이 손으로 필름을 편집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사막에서 손으로 우물을 파는 장면은 그래서 그의 고독한 영화적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그렇다면 영화의 개척자인가? 동일한 질문을 아마도 다른 두명의 작가들에게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

*5월31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멜랑콜릭 시네마- 동시대 미국거장 3인전'을 소개하는, <씨네21>에 쓴 글이다.

 

 

고적에 풍미를 더하기

 

 

지난 2월말. 시네마테크의 관계자들과 대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매년 지역의 시네마테크 관계자들과 함께 해외의 영화관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때마침 올해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대만의 필름아카이브(국가전영자료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의 영상자료원보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카이브의 관계자가 지난 해 타이페이 당대예술관(MOCA)에서 '호금전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호금전은 서극과 오우삼 등에 영향을 미친 홍콩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지난해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았었다.

 

 

 

 

사실 아카이브보다 더 흥미를 끌었던 것은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두 곳의 영화관이다. 사진에서만 보았던 대만의 가장 오래된 영화관을 찾았다. 타이페이의 명동이라 불리는 시먼딩(西門町)의 한 복판에 1908년에 세워진 붉은 벽돌의 ‘홍루극장紅樓劇場’이 있다. 팔괘조형의 특이한 외형의 이 극장은 한 때 무협영화, 서양영화, 시대극을 상영해 저렴한 입장료로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60년대 홍루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당시 학생들의 공통의 추억이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도시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홍루극장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화재가 발생하는 시련을 겪었다. 새로운 도약을 맞게 된 것은 2007년 11월의 일이다. 당시 타이페이시 문화국은 시 문화기금회에 홍루극장의 운영 관리를 위탁해 문화적인 활동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했다. 극장은 물론이고, 전시실, 창작공방, 달빛 영화관, 노천카페 등의 다원적인 지구를 마련해 새로운 문화공간의 거점이 마련됐다. 이제 홍루극장은 영화관만이 아니라 창작의 중요한 공간이자 한 해 4백만명의 입장객이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또 다른 영화관은 단연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대표로 있는 ‘광점 타이페이 전영원光點台北電影院’이다. ‘대만전영문화협회’가 타이페이시 문화국의 위탁을 받아 경영과 관리를 하고 있는 영화관으로 1926년에 세워진 2층 건물의 흰 양옥 건물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미국 남부식민지 시대의 풍치가 돋보이는 이 건물은 1979년까지 대만주재 미국대사가 거주하던 공관으로 대만의 예술가나 작가를 초대했던 곳이기도 했다. 역사와 문화를 전하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였지만 대만과 미국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수 십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왔었다. 2002년에 타이페이시가 기업으로부터 문화기금을 제공받아 옛 대사관저의 건축물 본체를 수복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타이페이 마잉주 시장(그는 타이페이 영화제를 출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이 재직하던 시절이다. 2002년 11월 10일에 정식으로 개관해 대만영화문화협회가 경영과 유지를 위탁받아 영화 문화를 테마로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상영은 물론이고 감독과의 좌담회나 영화교육, 영화제, 감독과 관객과의 상호교류를 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들어서면 입구 오른편엔 예술가들이 만든 예쁜 물건들을 파는 ‘디자인 스팟Design Spot’의 공간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국내외 영화책과 DVD를 판매하는 작은 서점이 있다. 흰 벽면에 걸려있는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의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입구의 왼편에는 ‘가배시광’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다. 2층에는 강연이나 좌담회를 할 수 있는 다목적 홀과 회랑 전시관이 있고 ‘홍기구le ballon rouge’란 이름의 분위기 있는 와인바가 있다. 바깥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하며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차고와 발전실로 사용했던 공간을 개조한 미니씨어터는 88석의 영화관으로 매일 12시부터 저녁 12시까지 6편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마지막 상영이 대체로 9시에 한다.

 

 

 

대만에는 각 지방의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관이 있는데, 그 수가 대략 273개를 넘는다고 한다. 각각의 문화관은 테마에 맞춰 전시품도 다양한데 ‘광점 타이페이’는 영화를 테마로 한 문화관이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대만전영협회가 이 공간을 운영하는데, 이 협회는 사실 서울아트시네마와도 인연이 깊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 협회의 후원으로 두 차례 대만영화제(Taiwan Film Festival 台灣電影展)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한 도시, 세 가지 이야기’라는 주제로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차이 밍량의 대표작을 망라하는 제1회 대만 뉴웨이브 영화제를, 2008년에는 대만 현대사에 대한 탐구 속에서 새로운 영화미학의 지평을 넓혀온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그 후예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제2회 대만영화제가 열렸다. 현재 허우 샤오시엔은 이 협회의 대표를 맞고 있다.

 

 

 

 

운영자들의 말에 따르면 타이페이시에서 무상으로 공간을 제공했기에 임대료 등의 부담이 전혀 없다고 한다. 매년 진행되는 영화제에 대한 예산 지원도 있는데, 대부분의 운영비는 극장의 수입보다는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등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들로 충당하고 있다. 대부분 18세에서 35세의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작지만 아름다운 이 공간은 가히 영화 관계자나 문화 예술을 좋아하는 시민들을 위한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사실, 대만에 관한 관광안내책자 한 구석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 영화관은 영화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타이페이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한번쯤은 들리는 명소이기도 하다.

 

 

대만의 두 영화관을 둘러보면서 마찬가지로 오래된 고적을 새로운 영화관으로 개조하는 파리의 사례가 떠올랐다. 파리시는 2003년에 룩소 극장Le Louxor이라는 아주 오래된 극장을 현대문화유산으로 인정해 사들였다. 1921년에 세워진 극장이니 무성영화부터 상영을 해왔던 곳이다. 1983년까지 이 극장은 그럭저럭 운영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기술적인 변화와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매머드급의 극장의 멸종은 불가피했다. 처음에는 댄스클럽으로 업종이 바뀌었다가 이 또한 1987년부터는 영업을 중단하고 룩소 극장은 폐관 절차를 밟았다. 룩소 극장의 새로눈 변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3년의 일로, 파리시는 이 오래된 시네마의 성전을 사들여 새로운 세기에 걸맞게 혁신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룩소 극장은 이제 세 개의 상영관, 전시공간, 테라스를 갖춘 카페로 구성된 복합영화관으로 바뀌었고, 올해 대망의 재개관을 맞을 예정이라 한다.

 

 

 

 

대만과 파리의 사례에 비추어보면 서울은 고적으로서의 영화관에 대한 인식이 미비하고 영화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도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영화관은 대중문화와 여가 활동의 중심적인 공간이었다. 저렴한 비용과 지근거리의 근접성으로 영화관은 상대적으로 다른 경쟁 상대를 갖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80년대 이래로 새로운 소비사회의 도래와 문화 활동의 다변화, 여가의 증가로 변화가 발생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을 대신한 텔레비전과 인터넷, 뉴미디어의 등장, 그리고 무엇보다 90년대 중반이래로 진행된 무차별적인 멀티플렉스의 확장이 변화의 주역이었다. 1998년 처음 강변CGV가 개관한 이래로 단관극장의 빙하기가 시작됐고 21세기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매머드 단관극장들의 절멸이 마무리됐다.

 

 

기억하건대 가장 끔찍하고 상징적인 사건은 2005년 12월에 일어났다. 굴삭기로 당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예정이던 스카라 극장의 기습적인 철거가 있던 해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경우 치를 복잡한 절차 때문에 건물 소유주가 극장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1935년에 건립돼 1946년에 수도극장으로 개명했고, 1962년에 스카라 극장으로 재개관한 후 근 40여년을 끌어왔던 스카라 극장이 그렇게 사라졌다. 스카라 극장을 마지막으로 한 때 서울의 명소였던 매머드 극장들(대부분 1000석이 넘었던 단관 극장들)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913년에 세워진 국도극장이 1999년 호텔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철거된 이래로, 1907년에 세워진 종로의 단성사는 2005년에 멀티플렉스로 개장했다가 폐관중이고, 그 옆의 피카디리 극장은 2004년에 멀티플렉스로 개장했다. 1956년 충무로에 개장한 대한극장은 당시 1,900석의 객석을 갖추고 70미리 영화를 상영했던 최고의 영화관 중 하나였다. 대한극장도 마찬가지로 2001년에 멀티플렉스로 변모를 꾀했다.

 

 

축제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일상의 연장안에 있던 영화관을 도시의 기억으로 유지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혁신을 이뤄내는 일에는 의지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마도 스카라 극장을 서울의 영화문화의 고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극장, 국도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혹은 명보극장도 가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새로운 영화의 공간을 찾고 마련해야만 한다. 대만의 경우 그것은 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평상시의 생활에 영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그런 장소에 공공성을 지닌 영화관이 마련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지난해 서울시의 영화관객수는 사상 최대로 5천 6백만을 넘었다. 일인당 5.5편의 영화를 본 셈이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400개가 넘는 스크린은 모두 멀티플렉스가 보유한 것으로, 독립적인 예술영화관의 스크린 수는 채 10여개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시민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형마트의 독과점보다 더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도시의 산책 중에, 친구와의 약속에, 책을 뒤적거리는 서점의 방문 후에, 혹은 늦은 퇴근 후에 식사를 마치고도 다양한 영화들과 만날 수 있는 영화관. 박물관이나 마을의 도서관처럼 공공성을 지닌 영화관. 서울시가 나선다면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문화재청 월간 소식지 《문화재 사랑》 3월호에 실었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1. 거시다 2013.04.05 01:53 신고

    흥미진진한 글입니다만, 실은 첫 문단에서 호금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하의 내용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호금전 회고전 어떻게 안 될까요ㅠㅠ

 

 

Editorial

 

지난 3월 22일. 서울시청 신청사 대회의실에서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시의 영화산업 및 영상문화 발전을 위한 청책워크숍’이 열렸다. 2006년 이래로 시네마테크는 꾸준히 서울시가 시네마테크에 관심을 가져주길 제안했고, 근 7년 만에야 처음으로 시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서울아트시네마 측은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마련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고, 연이어 정윤철 감독, 변영주 감독 등이 ‘감독들의 숙원사업’이라며 시네마테크 전용관 마련을 촉구했다.

 

 

서울에 안정적인 시네마테크 전용관 마련을 촉구한 것은 2002년 개관 이래로 진행된 일이지만 영화인들의 공식적 의견으로 모아진 것은 2006년 1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시작하면서이다. 그 결과 2007년에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 시네마테크가 함께 입주하는 ‘다양성 영화 복합상영관’을 영화진흥위원회와 서울시가 마련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자료실, 개인별 관람실, 세미나실, 카페, 서점, 레스토랑 까지 확보하는 대규모 복합상영관을 2010년까지 250억을 들여 지상 8층, 지하 4층 규모로 세우는 것이 당시 계획이었다. 하지만 2008년 새 정권의 등장과 그 해 5월, 4기 영진위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복합상영관 건설계획은 표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2009년에는 영진위와 서울시의 무관심으로 계획 자체가 무산되었다. 그런 가운데 부산에서는 시네마테크 부산이 이전하는 새로운 영화복합공간인 ‘영화의 전당’이 건립되어 2011년 9월에 개관했다. 2010년 1월에 3‘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된 것은 무산된 전용관 건립의 계획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2011년, 12월 20일에는 서울시의회가 영상진흥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통과시키면서 예술․독립영화, 시네마테크 전용관 지원에 대한 규정이 신설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해 서울시는 전용관 지원에 대한 아무런 후속조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뒤늦긴 했지만 이번 워크숍이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마련하기 위한 첫 번째 의미 있는 자리였기를 기대하고 있다.

 

 

3월말부터 서울아트시네마는 새로운 연속기획으로 영화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그의 주요작품을 함께 상영하는 ‘시네아스트의 초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프랑스 국영텔레비전(ORTF)이 제작한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Cinéastes de notre temps’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라바르트와 자닌 바쟁(앙드레 바쟁의 미망인)이 1960년대 초에 기획한 이 시리즈는 작가를 소개하고 그의 영화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첫 시작은 자크 리베르가 만든 장 르누아르에 관한 세 편의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을 가장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은 단지 장 르누아르에 대한 존경심 때문만은 아니다. 자크 리베트의 작업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3주간 르누아르와 시간을 보냈고, 이 작업에서 착상을 얻어 작가로서 그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미치광이 같은 사랑>(1969)을 만들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시네아스트의 초상’은 거장들의 작업비밀을 몰래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작가의 아틀리에에 관객들을 초대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1964 |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출연 니나 펜스 로데, 벤트 로테, 에베 로데

사랑에 실패한 여인은 40년 동안 고독이라는 짐을 홀로 견뎌낸다. 그럼에도 그녀는 친구에게 고통도 겪었고 실수도 저질렀지만 의심 없이 사랑이 전부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그녀의 말. “언젠가 당신의 방문은 단지 기억이 될 거예요. 때로 우리는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그 속에 빠져들겠죠. 나는 이제 막 소멸하는 불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게르트루드] 엔딩. 롱 굿바이 [무비위크]!

 

* 무비위크의 마지막호(571호)의 특집기사 '우리가 사랑한 엔딩신'에 썼던 글이다. 이 마지막 순간은 게르트루드가 문들 닫는 것으로 끝난다. 그녀는 문을 닫았고, 문 뒤에서 그녀가 전부라 말했던 사랑에 대한 신비로운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그 전까지 이미지가 배경으로 밀려나는 대신 말이 전경에 있었다면, 여기서는 모든 말들이 이제 뒤로 사라지고 하나의 이미지가 남았다.

[Feature] 내가 만난 스즈키 세이준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2002년 2월(18-25일)에 ‘문화학교 서울’의 주최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렸다. 기획자로서 나는 이미 팔순에 접어들고 있던 세이준 감독을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모두들 무모한 시도라고 여겼지만 결국 세이준 감독이 서울을 찾았다. 3박 4일 동안 그는 ‘삶의 원칙을 위반하는 예외적인 사건’이라면서도 기자회견과 강연,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감독들과 대담을 했다. 회고전은 성공적이었다. 2월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아트선재센터(아직 정식으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기 전이었다)를 대관해 개최한 회고전은 평균 객석점유율이 80%였고 6천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렸다. 단순한 흥행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저주받은 작가가 새롭게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 며칠간의 동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가혹한 조건을 딛고 태어난 새로운 영화미학은 어떤 기술이나 색다른 아이디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조금은 운명론 같은 아주 견고한 세계관과 태도 말이다.(김성욱)
 

창조의 원천,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린 첫 날의 마지막 회. <문신일대>가 상영된 후 관객들은 열광했다. 관객중의 몇 명은 영화를 보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상하게 웃긴다’고 말했다. 원래 세이준 감독이 유머가 있는 분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내용은 잘 이해가 안되더군요’라며 반문했다. 빨간 구두는 도대체 무엇인지, 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남자가 모래밭에 화투장을 뿌리며 경찰에게 끌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 남자가 살인에 연루되어 도피를 하는 장면에서 그를 뒤쫓는 빨간 구두의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그는 빨간 구두의 클로즈업으로 표현될 뿐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종의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우리의 시선은 매 순간 빨간 구두를 쫓아다닌다. 영화의 후반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빨간 구두는 또 다른 빨간 구두의 인물과 만나 멈칫 놀라고, 이내 관객들은 뒤집어진다. 도대체 빨간 구두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왜 빨간 구두여야 하는지는 대관절 알 길이 없다(물론 이 영화를 예민하게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무언가에 홀린 듯 빨간 구두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이다. 세이준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눈을 끌어당기고 당혹케 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창조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일지 궁금해 했다. 세이준을 만나는 것은 그런 비밀에 조금 다가설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그의 답변은 지극히 단순하고 솔직했다. ‘내 창조의 원천이 뭐냐고?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절에 대한 회상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문화학교 서울’의 초대에 응해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잠깐 주저했다. 서울에 올 때는 수행원과 함께 오겠지만 갈 때는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거기서 혼자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팔순에 접어든 그의 결정이 우리를 불안케 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지만 어쩌랴. 세이준은 반복을 싫어하는 감독이 아니던가. 갑자기 <동경방랑자>의 주인공처럼 기차에 몸을 싣고 유랑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고전이 열린 이튿날, 세이준 감독이 서울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도착한 그를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었다.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확 들어오는 할아버지였다. 털모자에 양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는 코닥 필름의 로고가 찍힌 긴 파카를 입은 그는 마치 이제 막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체류일정을 잠깐 확인한 후 함께 명동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매운 음식을 꺼려했지만 술과 담배를 즐겼고 백세주를 한 병 마신 후에는 한국 소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왜 <피스톨 오페라>에 <살인의 낙인>의 킬러 시시도 조를 기용하지 않았나요?” 예상대로 그건 비밀이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는 마치 ‘내 영화엔 비밀이란 없소. 네 멋대로 이해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이 다 닮았기에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심지어 인간의 노력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운명론자인가? 이름에 얽힌 비화를 들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본명은 스즈키 세이타로다. 그는 1950년대에 본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이름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친구들과 작명소를 찾아가 세이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8년, 그는 세이준이라는 이름으로 <암흑가의 미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작명소에 따지러 갔더니 새로운 이름은 10년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하게 10년 후인 1968년, 세이준은 닛카츠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씁쓸한 것일까.
<살인의 낙인>이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와 같은 해 개봉했고 짐 자무시가 나중에 <고스트 독>(1999)에서 이 두 편의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것에 대해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조금 지나서야 그는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 미국의 액션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했다. 샘 페킨파 감독을 말하는 것이냐 묻자, ‘그렇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좋은 감독 한 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문득 임권택 감독이 떠올랐다. <장군의 아들>에 관해 말했고 임권택 감독이 <유메지>처럼 화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자 그의 영화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감독들이 촬영소를 많이 활용하냐고 물었다. 세이준 감독에게 60년대 닛카츠의 촬영소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불행한 운명의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소는 미국의 3-4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처럼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월급을 받으며 매일 출근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고, 아침에 출근해 필요한 장면을 요구하면 전문적인 스태프들이 다 알아서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동시상영용 B급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는 전문화된 분업 체계를 통해 창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닛카츠에서 쫓겨난 후 독립 프로덕션에서 영화를 만들던 시절, 그에게 영화 만들기는 오히려 평범한 삶을 위배하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 되었다. 집에서 혼자 천장을 보거나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비현실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의 후기작들이 몽상적인 작품이 되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내 삶의 원칙과 위배되는 사건이다
그에게 예외적인 사건은 방한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공동기자회견이 있었다. 공동기자회견은 단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세이준 감독은 그런 자리를 원치 않았지만 자신을 초청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지난해에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이 열렸고 올해는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이 개최될 예정이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는 자신이 ‘오즈나 나루세처럼 이미 죽어버린 감독도, 예술 영화를 만든 감독도 아닌 그저 영화적 재미를 추구한 오락 영화를 만든 감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린 것에 대해 ‘아직 살아 있는데 회고전을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례식을 하는 기분’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기자회견장에서 세이준은 60년대의 일본 영화가 사양길에 있었고, 무국적 야쿠자 영화들이 만들어질 시기에 일주일에 두 편씩 상영하는 영화를 위해 20일에서 25일 정도의 제작기간 동안 영화를 만들었고, 오락 영화의 요소에 춤과 액션, 그리고 관객을 놀라게 하는 서스펜스를 섞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 기자가 ‘예술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예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화가 이렇다’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세이준은 기자 회견을 마치면서 자신은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런 식의 기자회견이 사실은 자신의 삶의 원칙을 위배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그에게서 무언가를 듣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세이준은 서울에서 자신의 삶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건을 단지 관객들을 위해 두 번이나 가졌다. 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세이준은 영화보다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공연장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적절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요일 오후, <살인의 낙인>은 일치감치 매진이 되었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갑자기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네마테크 서울이 개최한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 때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류학 입문>,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와 더불어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관객들은 사실 생뚱한 반응을 보였다. 이 예상치 않은 영화에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번 회고전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그때와 사뭇 달랐다. 주인공 시시도 조가 밥 냄새에 흠뻑 취할 때마다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이준은 <살인의 낙인>이 매진되었다고 말하자 정말이냐며 기뻐하면서도 당황했다. 이어 벌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이준은 내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한 관객이 ‘당신 영화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질문했고, 세이준은 ‘그건 버릇 같다.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말해 관객들을 감격(?)시켰다. 이게 정답이 아닐까? 정말 그는 그렇게 안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행사를 주관한 문화학교 서울의 스태프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세이준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분위기에 흥겨워했고, 요새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사무국장이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영화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자 ‘당신이야말로 진국’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때마침 그가 배우로 출연했던 영화 이야기가 나왔고, 세이준은 몇 해 전에 금성무가 출연한 <불야성>이라는 영화에서 야쿠자의 보스로 출연했다고 자랑을 털어놓았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당시 개봉 중이었던 <2009년 로스트 메모리스>에 잠깐 출연했다고 말하자 ‘대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어떻게 출연했을까’라며 농담을 했다.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을 보았냐고 누군가 질문했고 그는 처음엔 짐 자무시도 <고스트 독>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내 ‘영화 마지막에 지저분한 곳에서 주인공이 비참하게 죽는 영화가 그거냐’고 말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할 때 보았으며 짐 자무시와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자기라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을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최후를 맞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도 소주를 주문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스즈키 세이준은 2001년 유럽에서 영화 제작 제의가 있었지만 제작비 조달 문제로 영화 제작이 중지되었기에 ‘당장 계획 중인 영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시나리오가 준비된 영화가 무려 7편이나 있고, 그 중 한 편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보였다. 우리 모두는 그의 다음 영화와 즐겁게 만나고 싶었다. 한국의 노장 감독들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회고전에 참석한 스즈키 세이준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50여 년 동안 옹골차게 영화를 만들어온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한국에 팬이 많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데 왜 팬레터 한 장 없냐’고 물었고, ‘아마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와락 껴안는 등의 태도라도 있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 물론 그건 농담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끈질기게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은 어떤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그의 말을 빌자면 ‘영화에 의미가 없는데, 왜 의미를 만들려고 하냐’는 말처럼) 농담처럼 말한 본인의 버릇과도 같은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 말이 아니라 그런 태도들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스즈키 세이준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금요일 12시. 세이준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떠나기 전 그는 우리들에게 점심을 사먹으라며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그는 부산으로 가서, 그리고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이준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떠나기 전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겨주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렸던 2002년 2월, 영화주간지 '필름 2.0'에 썼던 글을 일부 수정해 다시 게재한 것이다.

 

 

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1989년 3월 존 사베츠에 관한 특집기사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의 사망을 기린 추모 특집판이다. 가장 흥미로운 글은 카사베츠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긴 마틴 스콜세지의 간결한 에세이였다. 그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던 시절에 나는 처음 <시민 케인>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충격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그림자들>이었다. 이어 나는 트뤼포, 고다르, 샤브롤, 안토니오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최고의 감독은 카사베츠였다. 그의 작품은 어떻게 에너지와 감정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물질적 어려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오슨 웰즈의 모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무 번 정도를 보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는 단지 한 번만 봤을 뿐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정감이 있고, 심리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내게 있어 카사베츠의 영화는 다양성과 현존, 삶 그 자체의 본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영화에서 삶을 포착하기를 바랐던 그러한 것이었다”.

 

 

레이 카니와 나눈 인터뷰를 읽어보면 존 카사베츠는 그의 영화경력 초기부터 인물의 마스크를 벗기고 배우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일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에서 가장 큰 실험이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만큼이나 무대화되고 인공적인 것이라 여겼다. 생생한 경험은 드라마틱한 경험만큼이나 관습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누군가를 연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으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적인 정밀함으로 얼굴을 노출시킨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그림자들>과 <얼굴들>에서 그는 마스크와 얼굴들을 드러내는데, 표면적으로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즉흥성은 인물들의 제멋대로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그림자들>의 즉흥성은 대략 18시간의 촬영으로 얻어낸 즉흥성이었다. <얼굴들>의 경우는 150시간의 테이크가 필요했다. 많은 횟수의 촬영이 그가 ‘완벽성’을 기하려 시도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카사베츠는 반대로 ‘불완전성’을 추구한 작가였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완성’이란 표현은 내러티브의 완결성,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 각본의 이야기를 얼마나 충실하게 영화로 구현해내는가에 달려있다. 이야기의 완성은 일종의 제도화 과정이다. 이야기가 그린 현실을 영화의 기법으로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가가 관건이다. 카사베츠는 다른 경로를 추구했다. 그는 작품의 완성에서 실패할 권리를 획득하려는 작가이다.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존 카사베츠를 ‘오슨 웰즈 이래 가장 눈부신 미국의 이단적인 영화감독’이라 불렀던 것처럼 카사베츠의 영화는 워낙 독특해 무시당했고, 종종 어설프고 조잡한 영화로 비판 받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연결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줄거리와 플롯은 느슨하고 인과관계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에 담긴 즉흥성과 서투름은 삶의 은밀한 비밀에 근접하기에 어울린다.

 

 

1958년 존 카사베츠는 그의 첫 작품 <그림자들>을 시나리오나 콘티 없이 즉흥적으로 완성했다. 그 순간에 고다르를 위시한 유럽의 작가들,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가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카사베츠는 과정과 생성의 작가다. 그의 영화의 마지막이 시작만큼이나 늘 열려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영화를 끝낼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의 행로>에서 '사랑은 흐름이예요’라 말하는 것처럼 흐름의 가능성을 화면에 기입하기 위함이다. <그림자들>에서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티에리 주스의 표현처럼 마치 폭풍 안을 포착하는 것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프리재즈처럼 즉흥적으로 감정과 리듬을 담아낸다. 살아있는 시간의 기입, 여기 그리고 지금을 보여주는 영화적 쇼트들, 불가능한 예측의 사건들,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대사의 즉흥성. 카사베츠의 영화에는 이러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영향아래의 여자>에서 주인공 지나 롤랜즈는 남편 피터 포크를 기다리다 알코올에 취해 감정의 흐름에 따라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 이 모든 과정은 그녀의 신체의 추락에 관한 퍼포먼스들처럼 보인다. 꽤나 길게 진행되는 스파게티 식사 장면들. 혹은, <사랑의 행로>에서 지나 롤랜즈가 동물들을 데리고 오빠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 공항에서 지나 롤랜즈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가방들을 들고 안내원에게 어설픈 불어로 심경을 털어놓는 순간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신체가 벌이는 퍼포먼스들로 카사베츠 영화에서 플롯을 넘어선 진정한 사건들이다.

 

 

 

 

 

카사베츠가 영화에서 시도한 것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그리고 쉽게 사라지는) 언어가 미치지 않는 사건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언어나 개념의 매개로는 표현되기 힘들거나 숨겨지는 진실들이다. 너무 흔해서 거의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들, 몸짓들, 습관들이다. 식사를 하거나 술주정을 부리거나 애정을 구걸하거나 하는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캐릭터는 시나리오에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효과로서 구축된다. 배우들의 몸은 그러므로 이중성 안에 놓여진다. 그들은 먼저 픽션의 기능 안에 놓여 있다. 다른 한편 배우들의 몸은 정의하기 어렵고 간파하기 힘든 감정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티에르 주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카사베츠의 목표는 흐름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많은 모습들을 취한다. 언어의 흐름들, 목소리들의 흐름들, 사랑의 흐름들, 그리고 알코올의 흐름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언제나 이러한 흐름들을 통해 감정의 순간들과 통찰의 섬광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시학은 이렇듯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견고한 형식을 고안하는 것에 있다.

 

 

2002년 12월, 서울독립영화제의 일환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을 상영했었다. 그러니까 이번 '존 카사베츠 회고전'은 시네마테크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존 카사베츠의 영화가 서울에서 처음 필름으로 공개된 10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그 이후 간헐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몇 차례 상영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11편의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카사베츠가 세상을 떠난 몇년 후, 프랑스의 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유는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의 판권을 구매해 프랑스에 개봉시킨 적이 있다. 그는 카사베츠의 열렬한 팬이었다. 제라르 드 파르디유 덕분에 카사베츠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재개봉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또 많은 젊은 영화인들에게 카사베츠가 선망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생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었다. 이제 우리가 그의 영향력을 충분히 느낄 시간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지난 4월 24일. 에이모스 보겔이 세상을 떠났다. 영화를 전복예술로 사고했던 영화사가이자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 큐레이터였던 이가 작별을 고한 것이다. 폴 크로닌의 <전복예술로서의 영화: 에이모스 보겔과 시네마16>(200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무슨 생각으로 뉴욕의 가장 중요한 영화클럽이었던 ‘시네마 16’을 시작했는지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뉴욕의 상황이 이랬다. "1940년대, 심지어 뉴욕에서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마음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러가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흥미로운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적은 규모에 개인적인 기획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험적인 작품이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곳은 없었다."

1947년, 에이모스 보겔은 상영될 기회가 없었던 ‘전복적인 영화들’을 관객에게 보여줄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시네마 16’이란 전설적인 영화클럽이 개관했다. ‘성숙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멤버쉽으로 운영하는 클럽이었다. 그는 대안적인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처음에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16미리 영화들을 선보였지만, 나중에는 폴란스키, 카사베츠, 클루게, 오시마 나기사, 오즈, 리베트, 레네 등의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모험적인 시도였지만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가 새로운 관객을 만든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마 16’은 이미 이런 영화들을 알고 있는 배타적인 소규모 집단의 매니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극장에 걸린 상업영화들이 영화의 전부라 여긴 관객들에게 그런 시시한 영화들보다 흥미있고 재미있는 중요한 다른 영화들이 이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다른 영화들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세상도 꿈꿀 수 있다. 존 카사베츠의 첫 번째 영화가 나오기 10년 전에(카사베츠의 <그림자들>도 ‘시네마 16’에서 소개되었다) 에이모스 보겔은 이미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모스 보겔의 사망소식을 들으면서 문득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던 2005년 4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해 서울아트시네마는 2002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안국동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낙원상가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The Last Picture Show’란 고별 프로그램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예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었다.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의 <시티즌 랑글루아>(1994),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도 이때 함께 상영했었다. 영화의 새로운 땅에 이주하긴 했지만 알고보니 우리에겐 입국비자도 영주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년만에 불법이민자처럼 추방을 당했다.

2012년, 5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낙원으로 이주한지도 이미 7년이다. 시네마테크는 그동안 다른 영화들을 꿈꾸었고 다른 세상을 원했다. 그 결과 무엇이 변했고, 우리들에게 어떤 것들이 남았는가를 생각한다. 에이모스 보겔은 극장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지면 영화의 전복이 시작되기를 원했다. 전복의결과, 우리는 다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곳은 입국비자가 필요없는 곳이다. 새로운 세계는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할 새로운 시민을 원한다. 영화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을 보고 자유롭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성숙한 영화의 시민이 필요하다. 되돌아보면 지난 10년의 시네마테크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국비자를 발급해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의 시민권을 획득하려 했다. 그 결과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영화시민이 되기위한  충분한 권리를 이미 획득했는가? 혹은, 우리는 영화시민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김성욱)

<파티 The Party> : 버블 헐리우드

 

‘핑크 팬더’ 시리즈로 유명한 피터 셀러즈는 불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요절한 희극배우였다. 그의 천재성은 철저한 변신술에 있다. 그의 생애를 그린 <피터 셀러즈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Peter Sellers> (2004)이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자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채색이기에 무슨 색으로도 어떤 모양으로도 물들일 수 있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파티>는 이 말의 완벽한 예증이다. 피터 셀러즈는 여기서 헐리우드에 불시착한 인도인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그가 전형적인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 <파티>에 스틸컷

 

 

<파티>는 인물에서 시작해서 인물로 끝나는 영화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정작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크 타티의 <플레이 타임>에서 윌로에 대해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일단 그는 초대받지 못한, 아니 초대받았다고 착각하는 인물이다. 인도의 배우 박시(피터 셀러즈)는 영화출연을 위해 헐리우드의 파티에 초대받는다. 그의 초대는 전적으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사소한 실수로 초대장이 잘못 전달되어 헐리우드 관계자들만이 모이는 파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가 문을 들어서는데 상당한 시간과 곤경을 겪는다는 점을 영화의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셀러즈의 개인기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박시는 헐리우드의 서부극을 동경해 멀리 인도에서 건너온 배우다. 현관에서 로비로 건너가기 위해 흐르는 물을 건너야만 하는 상황은 이를 코믹하게 풍자한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부족한 영어로 그는 자주 실수를 저지른다. 이미 그는 영화 촬영 중에 수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세트를 파괴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헐리우드 촬영소장은 그를 기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그를 비버리힐스의 파티로 안내한다. 최신식 시설로 구비된 저택은 그에게는 헐리우드 영화만큼이나 화려한 세계로 비쳐진다. 말하자면 파티장은 영화의 첫 장면만큼이나 화려한 할리우드의 이면이다. <파티>는 그런 박시가 파티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대 소동극을 코믹하게 그린다.

 

 

영화 <파티>에 스틸컷

 

 

두 가지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피터 셀러즈가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인도인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신분계층집단의 차별에 근거한 카스트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는 인도사회와 엄격한 차별과 배제로 구성된 헐리우드는 여기서 친밀한 풍자적 관계를 맺는다. 헐리우드의 중역들이 포진해 있는 파티장의 모습은 이러한 차별성의 전시장이다.

 

 

박시는 헐리우드의 문에 들어설 수 없는 인물이기에, 이 파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는 절멸의 천사이다. 단지 내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크 타티가 <플레이 타임>>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영화는 코미디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차별을 넘어선다. 영화의 장소에 입회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평등하게 처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레이 타임>의 레스토랑 장면에 필적하는 엄청난 파티장면이 여기에 있다.

 

 

둘째. 두 가지 상징의 충돌이 있다. 박시는 자국의 상징인 코끼리가 더렵혀진 것에 분노해 코끼리의 몸을 세척하려 하고, 이 때문에 파티장은 거품으로 뒤덮인다. 저택 전체가 거대한 거품으로 사라져버리는데, 이는 헐리우드의 허식이 거품이 되어버리는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헐리우드가 버블이 되어가는 상황.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파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성욱)

 

*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애서 '파열:고전영화의 붕괴'라는 섹션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의 한 편이다. 

우치다 도무田吐夢

인생극장

 

 

 

 

영화감독은 작품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지만 그럼에도 한 작가의 작품에 우리는 다른 것들을 덧붙일 수 있다. 이를테면 작품을 넘어 기억되는 작가의 이미지라는 게 있다. 종종 그것이 작품보다 더 거대해 보일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영화 천황의 풍모를 남겼다.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도 규모는 다르지만, 고유의 이미지를 남겼다. 작가는 고사하고 작품이라도 제대로 남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작가도 작품도 무명의 상태에 놓이는 경우다. 일본의 영화감독 우치다 도무가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우치다 도무의 무명세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증명해준다. 한 평자는 1970년, 우치다 도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국의 유명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서구에는 아직 덜 알려진 일본의 베테랑 감독이 사망했다’라는 짤막한 부고기사를 내보냈던 일화를 지적한다. 그 만큼 세계의 영화계가 우치다 도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후 4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한국에서도 그의 영화가 소개되는 일은 드믄 일이다.

 

일본에서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고 한다. 우치다 도무는 1898년에 태어나 일본영화의 창세기에 활동을 개시했고, 1920년대 무성영화를 거쳐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였다. 하지만 그의 초기시절 걸작들은 일본에서도 좀처럼 상영되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주국제영화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무성영화 2편(<땀>(1929), <경찰관>(1933)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인 우치다 도무의 영화경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치다 도무의 상대적인 무명성은 그의 격렬한 삶에 따란 경력의 부침과 무관하지 않다. 인생역정이 작업의 단절과 공백을 초래했다. 우치다 도무의 영화경력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 째 시기는 1920-30년대의 청춘의 유랑시절이다. 그는 1920년에 영화사에 입사해 영화경력을 시작했지만,회사의 파산으로 배우들과 지방 순회의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어 니카츠 영화사에 입사해 감독의 길을 걸었지만 회사의 방침과 맞지 않아 새로 회사를 설립을 하는 시도를 하다 파산해, 영화작업의 려움을 겪었다. 부유한 사내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하층민의 고된 생활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그린 무성영화 <땀>(1929), 경찰관과 친구의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그린 <경찰관>(1933), 소작농의 빈곤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봉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한 <흙>(1939)이 시기 주요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전쟁의 발발로 영화작업이 중단되었던 시기다. 당시 우치다 도무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제작을 시도했는데, 일본이 패전하면서 이러한 시도도 무위로 끝나게 된다. 그는 종전후에도 8년간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로서는 공백기라 할 수 있는 단절의 시기였다. 하지만 전쟁의 비참과 방황의 시간이 이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창조를 위한 대기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후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다소 시니컬한 태도가 이 시기의 영향이다. 그는 모택동이 주창한 모순론을 드라마의 극적 구조에 시도하기도 했는데, 가령 드라마는 다른 인간의 감정, 성격, 사상, 입장, 이해관계가 뒤엉키고 상극과 모순으로 충돌이 발생하면서 최대의 모순점에서 대폭발이 발생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우치다 도무의 영화는 그런 격렬한 대폭발의 지점을 언제는 영화의 후반에 지니고 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이는 이점이 있다.

 

1953년 우치다 도무는 10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시기이자 새로운 전성기가 이때부터 시작한다. 대부분 시대극과 장르성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전후 복귀 제 일작인 <후지산의 혈창>(1955)은 전편에 감도는 살기로 가득한 뛰어난 사무라이극이다. 그의 사무라이 영화는 활극의 장쾌함과 격렬함이 특징이지만, 주로 약자에게 시선을 향하고 지배계급, 빈부의 차이에 분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활극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배우나 스태프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그의 사무라이 영화에서 뼈 굵은 인물들의 결기가 언제나 기억난다. 우치다 도무는 이 영화외에도 1950-60년대 시대극 왕국을 자랑하던 도에이 영화사에서 ‘대보살' 3부작(1957∼59)과 ‘미야모토 무사시’ 5부작(1961∼65) 등의 스펙터클한 시대극을 연출했다. 특히 ‘미야모토 무사시 5부작’은 무사도를 미화하지 않으면서 피투성이 지옥의 길을 표현하는 걸작이다.

 

전후 일본사회에 대한 우치다 도무의 비전은 두 편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패전 후 미군 점령기의 일본사회를 그린 <내면의 굴레>(1955)와 일본 하층계급의 원한의 감정을 소설로 썼던 미즈카미 쓰도무의 원작을 각색한 <기아해협>(1964)이 그것이다. 특히 <기아해협>은 우치다 도무의 절정의 작품아다. 전후 혼란의 시기. 극단적인 빈곤에서 작은 범죄로 전과자가 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방화, 절도, 살인이라는 범죄에 우연히 가담하면서 점점 더 큰 범죄자가 된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노형사가 있다. 범죄자인 남자는 시골의 창녀에게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영화에서 이 둘의 사랑은 그 어떤 낭만적인 사랑 장면보다 훨씬 더 절실한 마음의 접촉을 느끼게 한다. 현장검증을 위해 북해도로 압송되는 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마지막 사건이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더한다. 일본의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가 지적하듯이 전편에 패전 후의 일본의 황량한 세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한편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구원을 바라는 처참한 염원이 작품전체에 아름다운 비애감으로 흐르고 있다.  

 

우치다 도무는 일흔 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앞으로 10년은 더 살고 싶다. 이렇게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것이 많이 있는데’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1970년은 일본영화의 황금기가 이미 끝나던 시기였다. 그의 특별한 삶이 더 많은 작품들을 필요로 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말년에 그는 일생의 대작 ‘도슈사이 사라쿠’에 끝까지 집념을 불태웠지만 결국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번 특별전이 미지의 거장을 만나는 첫 번째 특별한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우치다 도무 특별전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상영작이 동일한 것은 아니기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 상영되는 초기 시절의 영화들을 보아야 제대로 이 작가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John Cassavetes Retrospective

 

 

 

 

 

5월 10일이면 서울아트시네마의 개관 10주년이다. 이미 10년이기도 하고, 벌써 10년이기도 하다. 창립 때부터 있었으니 나도 시네마테크의 삶 10년을 맞는다. 꽤 오랜 시간이기도 하고, 영화 백 십여년의 역사를 생각하자면 1/11의 생을 시네마테크에서 보낸 셈이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5월 8일부터 20일까지 '존 카사베츠 전작 회고전'을 개최한다. '빅 트러블'을 제외하면(존 카사베츠은 이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의 전작 11편이 상영되는 첫번째 회고전이다. 그러고 보면 2002년, 시네마테크가 안국동에 있던 시절 서독제의 특별전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튼 적은 있다. 5편의 영화를 상영했으니, 카사베츠의 특별전이 처음 열린지 10년만에 상영되는 셈이다.

 

 

카사베츠는 1959년 그의 첫 작품 <그림자들>을 시나리오나 콘티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그 순간 유럽에서는 장 뤽 고다르와 누벨바그 감독들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오시마 나기사와 같은 젊은 감독들이 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영화를 '발명'하고 있었다. 카사베츠는 그런 새로운 영화의 물결을 가장 독립적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었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상태를 지속적인 흐름으로 표현해낸 흔치 않은 감독이었다.

 

 

언젠가 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카사베츠에 관한 특집기사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의 추모 특집판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글은 카사베츠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긴 마틴 스콜세지의 간결한 에세이였다. 그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던 시절에 나는 처음 <시민 케인>을 보았다.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충격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그림자들>이었다. 이어 나는 트뤼포, 고다르, 샤브롤, 안토니오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최고의 감독은 카사베츠였다. 그의 작품은 어떻게 에너지와 감정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물질적 어려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오슨 웰즈의 모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무 번 정도를 보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는 단지 한 번만 봤을 뿐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정감이 있고, 심리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내게 있어 카사베츠의 영화는 다양성과 현존, 삶 그 자체의 본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영화에서 삶을 포착하기를 바랬던 그러한 것이었다”.

 


사랑, 진실, 불신, 고립, 즐거움, 슬픔, 흥분, 어리석음, 불안함, 취기, 쾌활함과 번뇌, 유머, 완고함, 두려움. 그리고, 존 카사베츠, 지나 롤랜즈, 벤 가자라, 피터 포크, 세이무어 카셀을 만날 시간.  

 

 

 

 

상영작(11편)

 

그림자들 Shadows(1959)

투 레이트 블루스 Too Late Blues (1961)
기다리는 아이 A Child is Waiting (1963)
얼굴들 Faces (1968)

남편들 Husbands (1970)
별난 인연 Minnie and Moskowitz (1971)
영향 아래의 여자 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 The Killing of Chinese Bookie (1976)
오프닝 나이트 Opening Night (1977)
글로리아 Gloria (1980)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애서 '파열:고전영화의 붕괴'라는 섹션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에 몇 편의 리뷰를 썼다.  

<파멸 La Rupture>
: 치명적인 보기의 매혹

 

클로드 샤브롤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다. 이상한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령, 적극적인 시네필이라도 <파멸>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대의 진실도 성립된다. 이런 영화의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샤브롤의 팬이라 부를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영화를 시작한 이래로 샤브롤은 매년 한, 두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든 놀라운 생산성의 작가였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실천했을 뿐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타협이 불가피했다. 누벨바그의 동세대 작가들과 달리 샤브롤은 제작사나 투자사의 요구를 따라 감사하게 주문 제작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작품의 수준도 천차만별. 태작과 범작, 졸작과 걸작을 오가는 불규칙한 궤도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한다.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파멸>은 물론 발견을 필요로 하는 진주처럼 반짝이는 작품이다.

 

 

샤브롤에게는 그래서 여전히 숨겨진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의 영화적 형식에도 적용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위장의 형식이다. 이는 불가피한 것이자 고안된 것이다. 겨울의 작가라 불린 샤브롤은 부르주아 가족이 불안에 사로잡힐 때, 혹은 사랑의 결핍으로 고통을 느낄 때 그들이 어떤 (변태적인) 행동을 하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세계가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차갑게 담아낸다. 가차 없는 세계의 표정이 샤브롤의 현미경적인 시선에 때로는 가혹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포착된다. 파열은 위선적인 표면과 불가해한 심층 사이에서 벌어진다. 제목처럼 <파멸>은 이런 특징을 예시하는 작품이다. 아니, 충돌과 파열이 주제나 내용뿐만 아니라 필름의 표층으로까지 진행된다는 점에서 샤브롤의 가장 야심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영화의 도입부가 꽤나 충격적이다. 관객들은 허를 찔릴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 이런 식이다(스포일러에 유독 예민한 관객이라면 다음의 한 단락을 그냥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평온해 보이는 중산층 부르주아의 저택 외부가 보이고 곧이어 아침을 준비하는 엘렌과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하루의 일상일 뿐이다. 짧은 장면이 지나고 음식을 차리기 위해 엘렌이 움직이는 순간 화면 뒤쪽의 문이 열리면서 환자 같은 남편이 등장하면 모든 것이 급변한다. 그는 갑자기 아내를 때리고 아들을 벽에 집어던진다. 사건의 진행 속도가 워낙 빨라 우리의 지각과 이해가 수습될 시간이 없다. 엘렌이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

 

 

차근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복기하려는 순간, 이어지는 장면들은 가히 점입가경이다. 사건 이후 여인은 병원에 입원한 아이를 지근거리에서 간호하려 방을 얻는데, 이 집에는 종일 타로 게임을 즐기는 정체불명의 3인조 아주머니들, 정신박약인 안경 쓴 소녀, 연극 대사를 읊조리는 배우 등 모두가 이상한 인물뿐이다. 엘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버린다. 반복되는 공원의 알록달록한 풍선들이나 시공감이 상실된 화면의 연결에 이어 순진한 소녀가 포르노 필름에 자극받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화면의 불온함은 극에 달한다. 사건을 이해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파멸>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들은 모두 어떤 흔적들과 지표들이다. 표식들은 인물만큼이나 관객들의 추론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거짓된 입장들을 난무하게 만든다. 인물들 또한 마네킹처럼 텅 빈 내면을 지녔다. 그들은 변화와 순환성 안에서 기호들처럼 계속 대치되거나 치환되어 버린다(가령 여기에는 두 명의 엘렌이 있다). 영화의 라스트는 가히 명불허전이다.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필히 보는 것으로 말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김성욱)

 

<프랑켄슈타인과 지옥에서 온 괴물
Frankenstein and the Monster from Hell>
: 지옥의 프랑켄슈타인

 

원혼들이나 괴물들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간혹 작가들도 귀환한다. 시작한 사람이 무언가를 종결짓기 위해 작가들은 되돌아온다. 가령, 프리츠 랑은 세 가지 시대(무성, 유성, 텔레비전의 시대)에 서로 다른 마부제 박사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것을 변화하는 시대에 완결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1957)로 영국 해머 공포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테렌스 피셔 Terence Fisher는 프랑켄슈타인의 일곱 번째 작품이자 유작인 <프랑켄슈타인과 지옥에서 온 괴물> (1973)에서 시작한 것을 끝내려 했다.

 

 

남자두명과 여자한명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있다

 

 

테렌스 피셔는 1950년대 공포영화의 산실이었던 해머영화사의 간판 감독이었다. 영화를 빨리 찍고 싸게 찍는 것을 미덕으로 테렌스 피셔는 미라, 늑대인간,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돌연변이, 배스커빌가의 개와 같은 독특한 캐릭터를 창안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해머 룩’이라 불리는 전거를 마련한 영화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한 피터 커싱, 괴물 역할의 크리스토퍼 리, 음악을 맡은 제임스 버나드는 이후 대부분의 해머 공포영화에 참여해 열광적인 팬을 거느렸다.

 

 

피셔는 1969년 <프랑켄슈타인이 죽이기> 를 마지막으로 잠정적으로 스튜디오를 떠났었다. 해머영화사가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70년대 초부터 해머영화사는 고전적인 공포영화에서 탈피해 젊은 층들을 겨냥해 섹스와 누드가 첨가된 일련의 뱀파이어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연인들>(1970), <버진 뱀파이어>(1971), <뱀파이어 서커스> (1972) 등이 이 시기의 주요작품들이다. 피셔의 귀환은 이런 식의 영화들에 대한 냉혹한 반응의 표현이다.

 

 

프랑켄큐타인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무덤가에서 누군가 땅을 파고 있다. 경찰이 그를 심문하자 재빨리 그는 도주한다. 이윽고 경찰은 젊은 의학도 시몬이 사체를 의학 실험용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몬은 재판에서 자신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흠모자임을 숨기지 않고 의학적 탐구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판사는 그를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거기서 그는 음흉한 소장과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 정신병원의 실질적 지배자는 죽었다고 알려졌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이다.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다. 완벽한 신인간을 창조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미 무용한 것으로 판명되었기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은 괴물들로 가득하다.

 

 

마지막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울적한 정신 병원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정신병원은 불온한 영혼들의 집적소이며 세계에서 격리된 곳이다. 사회성을 상실한 창조자의 열정은 여기서 광기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게다가 그는 양손에 화상을 입었기에 자신의 손을 사용할 수 없다. 젊은 시몬이 그를 대신해야만 한다. 통합되어야 할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여기서 요점이다. 창조자와 손의 분리, 사회와 공간의 분리, 몸과 영혼의 분리 등이 그러하다.

 

 

닫힌 공간에서 정신 병원 환자들을 실험대에 올려놓고 부질없는 생명 창조에 정열을 태우는 프랑켄슈타인의 광적인 모습은 피셔가 만든 시리즈 중에서 가장 냉혹하고, 구제의 순간을 찾아볼 수 없다. 뇌를 절개하는 차가운 의술의 장면을 길게 담아내는 장면이나 예술가의 뇌를 이식받았지만 고릴라의 몸에 합지증의 손을 지닌 괴물이 바이올린을 더 이상 연주하지 못해 울적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괴물은 이제 프랑켄슈타인 박사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제목은 이런 식으로 읽혀져야만 하다. 영혼에 사로잡힌 괴물들과 지옥에서 온 프랑켄슈타인! (김성욱)

 

* 2012 전주국제영화제의 '파멸'이라는 섹션에서 상영하는 영화다.

<캐슬 오브 블러드 Castle of Blood>
: 죽음의 무도

 

 

‘죽음의 무도’라는 책에서 스티븐 킹은 공포물이 진정으로 어떤 춤, 움직이며 리듬을 타는 탐색이 된다고 썼다. 공포물은 문명화된 방들을 그냥 춤추며 통과해 지나갈 뿐이며, 다른 장소를 탐색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잘 만든 공포이야기는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한가운데로 가는 길에서 춤을 추면서 우리 자신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믿었던 방의 비밀의 문을 발견하도록 한다. 스티븐 킹의 공포에 관한 생각은 안토니오 마르게리티 Antonio Margheriti 의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스티븐 킹의 책의 제목과 동일한 ‘Danza Macabra’ 즉, ‘죽음의 무도’이다.

 

 

한여자가 앞을 보고있다 그리고 뒤에서 다른여자가 앞에 여자를 응시하고있다

 

 

어둠이 자욱한 런던의 거리. 마차가 도착하고 한 남자가 술집에 들어선다. 테이블에 앉아 큰 소리로 자작의 시를 낭독하는 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 에드가 알렌 포우이다. 타임지의 기자인 앨런 포스터가 단독으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았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포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이 실재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앨런은 의문을 제기한다. 삶은 죽음과 함께 무덤에서 끝난다며, 포우의 소설에서처럼 죽은 자가 삶의 세계로 귀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의 말을 옆에서 경청하던 포우의 친구 블랙우드 백작은 앨런에게 은밀한 제안을 내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귀신 들린 성이 있는데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라는 것이다. 오늘 밤이 바로 사망자의 밤으로, 사망자가 되살아나 과거의 참극을 반복하는 밤이기 때문이다. 앨런은 주저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수습할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유령저택에 도착하고, 거기서 과거에 일어난 참극을 유령들과 함께 체험한다.

 

안토니오 마르게리티는 마리오 바바처럼 일종의 직공감독으로, SF, 호러, 서부극, 형사 드라마, 전쟁 스펙터클, 액션 코미디, 서스펜스 등의 다양한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영화의 작품 수준도 천차만별인데, <캐슬 오브 블러드>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여정에서 시작한다. 앨런은 런던에 도착한 이방인이다. 게다가 그는 저택에 호기롭게 들어선다. 여정이란 경계선의 개념을 동반하는데, 근본적으로는 금지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첫 부분이 보여주는 바이다. 그가 저택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꽤나 길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이성에서 광기의 상태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저택에서 과거가 반복되는 장면에서 나온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유령들이 하나 둘 씩 앨런의 눈앞에 등장해 과거의 참극을 연기한다.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기괴한 시각성이 이런 출현과 사라짐의 순간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런 식이다. 앨런은 엘리자베스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는데 그 여인은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에게 살해당하고, 앨런은 곧바로 그를 뒤쫓지만 이들은 사라져버린다.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인이 다시 등장한다.

 

밤마다 저택에 출현해 죽음에 이른 비극을 재연하는 유령들, 그들이 벌이는 파티는 스티븐 킹이 지적한 죽음의 무도를 떠올리게 한다. 움직이며 리듬을 타는 다른 장소, 즉 비밀의 문으로의 탐색이 요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탐색은 영화의 본성과도 맥을 같이 한다. 유령들은 그 곳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가시화한다. 보이는 세계에 부재하는 사건을 드러내고, 인물을 부재하는 곳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영화에서 죽음의 무도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김성욱)

 

* 전주국제영화제서 '고전영화의 파멸'이라는 섹션에서 상영하는 영화다.

시네마테크, 필름의 소셜리즘을 위하여

 

프랑스의 음악애호가인 제임스 클레망은 13,788개의 MP3파일을 불법 다운로드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기소됐다. ‘다운로드는 시민의 권리’라 클레망은 주장했지만 온라인 저작권 보호법은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사안의 성격상 언론의 주목을 끌만한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고다르가 나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해 클레망은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가 재판비용의 용도로 1,000 유로를 자신에게 기부했노라고 발표했다. 고다르는 이미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온라인 저작권법에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다르는 인터뷰에서 “지적 재산권이란 없다. 창작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예술가에게 작품에의 권리가 없다는 고다르의 발언은 영화에 관한한 현실이기도 하다. 작품의 저작권은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혹은 투자자)에게 귀속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 결과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 해, 알랭 레네의 <잡초>(2009)를 시네마테크의 특별전에서 상영하려 했을 때, 프랑스의 제작사는 상영과 관련한 동의를 내주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테렌스 멜릭의 <뉴 월드>(2005) 또한 제작사의 허락을 받지 못해 상영이 불가능했다. 호평을 얻었던 작품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내가 아는 한 한국의 영화제에서도 제대로 상영된 적이 없다. 작가가 동의하더라도 제작사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다. 단순하고 깨끗한 논리다. 작가는 영화의 저작권자가 아니며 상품으로서의 영화에 지적 재산권이란 없다.

이런 사례도 있다. 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모 감독의 작품은 저작권의 상속자들이 터무니없는 고액의 상영료를 요구해 상영을 포기해야만 했다. 작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작권이 도리어 영화 상영을 불가능하게 하는 꼴이다. 

저작권 분쟁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네마테크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위함이다. 시네마테크는 단순하게 작품의 수집, 보존, 복원, 상영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가 구상한 상상의 영화박물관은 필름을 수집하는 아카이브이자 영화를 상영하는 박물관이었다. 두 가지 과정이 있다. 첫째, 과거와 현대의 새로운 영화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아카이브가 구축된다. 둘째, 영화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상영으로 영화의 역사가 박물관에서 새롭게 형상화된다. 그런데 아카이브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박물관은 결코 역사를 완결시키는 곳이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영화 상영은 그래서 관객에게 시간, 장소, 기원의 연대기적인 질서에서 탈피한 생산적 혼란을 자극해야만 한다. 역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노력! 고다르가 “시네마테크가 왜 좋은지 아는가? 거기서 당신은 영화를 뒤범벅으로 볼 수 있다. 1939년의 조지 쿠커의 영화를 1918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함께 볼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선구자였지만 행운아이기도 했다. 193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의 초창기였던 시절에 상업적 가치를 잃어버린 영화들은 폐기처분되고 있었다. 저작권은 분명치 않았고 노고를 동반하긴 했지만 훔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랑글루아 자신은 영화 저작권자에게 항상 경의를 표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아카이브에는 불법적인 복제본이나 수집들이 즐비했다.

그가 모은 컬렉션에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 로봇이 있었고,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입었던 드레스도 있었다. 미국인 관광객들이 ‘이 드레스가 왜 여기에 있지’라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한국의 직지심경이 파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박물관은 일종의 국제작물 전시장으로 도둑질은 박물관의 본성이기도 하다. 누벨바그는 영화 박물관의 아이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본 영화를 인용해 훔치는 도둑들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화를 가질 권리가 없었던 그들은 남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영화를 훔쳐야만 했다. 

좋은 시절은 이제 지나가버렸다. 저작권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는 영화는 쉽게 훔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 영화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적 관점에서 영화에는 상품의 가치가 있다. 영화는 오락, 산업, 비즈니스의 대상이다. 저작권, 지적 소유권은 상품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적용된다. 둘째, 영화는 20세기에 개발된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의 유산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의 선언이 말해주듯 유산은 보존되고 전승되고 보여져야만 한다. 문화유산은 4대강처럼 공공적인 것이다. 유산적 가치를 지닌 영화는 학문적 연구를 위해 연구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문화를 누리기 위한 대중이 쉽게 접근 가능해야만 한다.

이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공공도서관에 책을 납본하듯이 영화도 상품적 가치가 소실되었다고 필름을 태워버리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상품을 지키기 위한 저작권은 매섭게 지켜지고 있지만, 공공적 접근을 위한 원칙과 제도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불균형이 영화에서 발생하고 있다. 국민적이고 국제적인 법이 제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나서지만 대중들이 영상의 유산적 가치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상업적 가치를 보호하는 동일한 저작권이 사실상 재정적 이윤이 불가능한 영화에의 공공적 접근을 방해한다.

손쉬운 방안이 있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수많은 영화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천국이 있지 않느냐고. 도둑질은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나쁜 결과들이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고 역사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불법적인 수단을 통한 영화보기가 불가피해진다. 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의 사적 전유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이제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왜 영화는 공공급식처럼 무상으로 공급되지 못하는가. 군대는 무료인데, 왜 극장과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만 하는가. 영화는 문화인가 아니면 복지인가. 지금 시네마테크에 부여된 미션은 그리하여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다. 시네마테크는 필름의 소셜리즘을 추구해야 한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지난해 11월, 동국대학원신문(169)에 기고했던 글이다.

  1. ipe 2012.04.18 12:46

    에세이 즐겁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메가업로드 소송에 관해 크게 부곽된 다운로드 문제에 관해 연관지으면서 읽었습니다.
    필름의 소셜리즘에서 필름의 유산적인 가치를 얘기할때, 이윤과 저작권에 연연하는 기관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중들의 소비권을 충당해주는 "불법다운로드"가 있다면, 대중들의 창작적인 욕구와 그에 상당한 공급자가되고픈 욕구를 해소구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테크놀로지의 전체적인 배포로 인해 한결 쉬워지고 값이 싸진 film-making 에서 해결책을 찾을수있을까요?

<양 도살자>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와의 시네토크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라온 세대인 만큼 주인공인 백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이 주변 인물이 아닌 주인공인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칼라 퍼플>이나 최근에 나온 <헬프> 빼곤 얼마 없을 것이다. 이번 특별전 '친밀한 삶'에서는 그렇게 영화 속에서 조차 소외되었던 흑인들을 포착한 미국의 독립영화 <양 도살자>를 스크린 위에 걸어놓았다. 지난 4월 5일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 상영 후 이어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와의 시네토크 현장을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이번 특별전 제목을 ‘친밀한 삶’이라 붙인 이유와 관련된 작품이 방금 보신 영화 <양 도살자>다. 처음 봤을 땐 흑인의 문제를 다룬 영화여서 강렬한 이야기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비추는 방식과 다르다. 워낙 영화가 갖고 있는 정서적 측면이 뛰어나기 때문에 짧지만 효과가 컸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흑인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들은 그동안 많이 소개되진 않았었다. 작품은 77년도에 제작되어 79년도에 공개되었고, 81년도에 베를린 영화상을 받으면서 알려졌다. UCLA 필름 아카이브에서 제작, 보존하였다. 찰스 버넷 감독은 자신이 성장했던 LA 빈민가 와츠에서 매 주말마다 영화를 촬영했는데, 1년 동안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여 만불 이하를 들여 제작했다. 이야기 전개가 헐겁고 느슨하며, 에피소드적인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흑인 가장과 노는 아이들의 두 세계가 영화의 주된 이야기이다.  이후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뉴욕 타임즈 평론가는 당시 이 영화를 아마추어적인 지루한 영화라고 평가했었다. 미 의회에서 국가적 유산으로 남길 영화 50편 중 하나로 선정해서 이 영화를 보존했지만,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블루스 곡들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공개될 수가 없었고, 대신 16mm 필름으로 대학가에서 간헐적으로 상영했었다고 한다. 저작권료로 15만불이 필요해서 스티븐 소더버그가 7만 5천불을 지불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서 보여드린 마일스톤즈라는 영화사에서 배급했다. 2007년도에 UCLA 필름 아카이브에서 이 영화를 35mm로 복원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공간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찰스 버넷 감독이 LA 근교의 빈민가 와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도 근처인 UCLA에 다녔다. 1965년 흑인 빈민가 폭동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는데, 백인 경찰이 흑인을 과잉 단속한 것에서 시작해 폭독으로 확장되었다. 엿새 동안 폭동이 벌어졌고 약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4천여명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60~70년대 흑인 문제가 전면적으로 부상하였다. 흑인, 아프리카 아메리칸들을 어떻게 영화 이미지 안에 담아낼지에 관한 문제도 함께 등장하였다. 찰스 버넷은 1934년생으로 폭동이 있은 후 10년이 지난 시기에 영화를 만들었다. 즉,  감독은 77년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10년 전의 과거 시위 흔적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상에 남아 있는지를 영화로 포착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볼 수 없는 역사를 온전한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찰스 버넷은 일상적인 빈민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환경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지와 시각성, 음악과 말, 블루스 가사를 더해서 그 역사를 표현했다.


찰스 버넷은 UCLA를 졸업한 후 새로운 흑인 영화 만들어내는 그룹인 LA 스쿨에 들어가 영화를 시작하였다. LA 주변 지구에서 영화를 만드는 한계성은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로 흑인 인권운동이 있었고, 반식민담론들과 브라질, 쿠바 등의 제3세계 영화가 당시 LA 스쿨에 깊은 영향을 주었었다. 

 

 

이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담는 네오리얼리즘적인 미학으로 많이 불리지만, 내가 보기엔 중후기적인 네오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본다.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 수법은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던한 안토니오니의 영화세계에 더 가깝다. 영화의 첫 시작은 느닷없다. 가정 내부의 공간에서 꼬마아이가 아버지에게 꾸지람 받은 뒤 엄마에게 따귀 맞는 걸로 당돌하게 시작한다, 시공간은 모르지만 가족 내부의 긴장이 느껴진다. 여기서부터 근본적으로 영화를 둘로 가르는 선이 발생하는데, 그 하나는 어른들의 삶이다. 주로 집안 내부에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중심인 거리의 삶이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방치되어 각자 방식대로 논다. 그들은 행동적으로 제스처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어른들은 말로써 내면을 표현하는데, 그들이 있는 내부의 공간은 대부분  정적인 느낌이다. 반면, 아이들이 노는 거리의 외부는 동적인 움직임과 행동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영화 라스트에는 어느 정도 어른과 아이가 조우하는 느낌이다.

 

남자애가 도끼 빗을 만지작거리다가 동네에서 TV를 남자 둘이 훔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비극적인 사회의 단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영화적인 주요 특징 두 가지를 본다면 멀리서 찍혀진 롱 쇼트가 많다. 플롯과 드라마틱한 순간보단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환경을 잡아내는데 유용하다. 다른 하나는 내부적 공간을 보여줄 때 정적이면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롱 테이크이다. 같은 시간 내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관찰적인 방식으로 보게끔 하는데 효과적이다. 공간 안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환경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표현해나가면서 사람들을 공간의 증인처럼 등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과 공간들을 비판적이거나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개 가면을 쓴 아이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양과 인간이 결합된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아이 둘이 조형적으로 비슷하면서도 모방하는 것 같다. 무의미해보이면서도 둘이 조우하고 있는 사태이다. 이렇듯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은 일상적인 순간들을 담아내는 데서 나온다. 흑인 폭동 이후 그러한 사건이 현재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줬는가? 그 문제를 플롯, 관습적인 방법 등 보편적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포착하였고, 단독적인 순간들을 에피소드처럼 담아낸 것이 영화의 주요 전략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 많다. 옆에서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면 아이는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와 아빠가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분리되어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디테일들을 미니멀하게 담아내었다. 영화 안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또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는 구조이다. 영화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얘기되어지는데 실제로는 궁극적인 사회 문제가 없다. 사회에 저항하는 인물이 없고, 이들이 겪는 근본적인 빈곤, 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이 처한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현실을 비추고 있다는 말이 틀리진 않지만 무엇이냐고 구체적으로 되짚었을 때 애매하다. 인물들이 놓인 환경 안에서 경험하는 바를 전달해주는 것, 드라마틱한 전달보다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서 관객들이 그 부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일반적 의미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특정한 화면과 배치하는 구성, 조형성, 영화적 경험의 장치들을 이용해 그들의 삶의 경험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로는 즉각적으로 느끼고 영화적으로 들어가게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적 경험의 과정에 중심을 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한다. 윤리적인 태도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의 사회적 경험을 치룬 흑인들에게 10년 후 상황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정서적인 문제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공감하기가 어려운데, 주변의 경험적 느낌들과 정서적 상황들을 관객들에게 영화적 형식을 통해 전달할 때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다. 예로 블루스의 정서적 느낌, 하나의 화면과 또 다른 화면과의 병치, 인물과 환경과의 관계, 미니멀한 내러티브의 일상적 디테일들, 영화의 형식이 제공하는 관계성 안에서 관객이 젖게 만든다. 또한, 시각적 표현 양식이 사건 묘사보다 강조되어있는 느낌이다. 자전거 바퀴를 여자 일진들(!)에게 뺏기고 도망가는 장면은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심플한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형식적 장치인 롱쇼트는 멀리서 관조하듯 포착해나간다. 순간에 빚어지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어른들의 행동을 아이는 구경하고, 성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로 구분된다. 그 세계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말하거나 표현하진 않아도 시각적으로는 증인 같은 위치에 있다. 그들의 시선 안에서 보이는 세계들을 중계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3개의 세계가 있는데, 성인들이 있는 가정 공간과 놀이와 연결된 거리 아이들의 세계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놀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양 도살장의 공간이다. 세 번째 공간이 영화의 제목과 연결되면서 윤리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양 도살과 지구에서 흑인들이 처해진 삶의 조건들이 연결된다. 양이 갖고 있는 순수한 느낌과 아이들을 연결하고, 도살장 풍경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두 장면 정도가 특별한 순간을 이뤄낸다. 전반부에 스탠이라는 중심 인물이 친구와 대화 하다가 잔을 자기 볼에다 비비는 씬이다. 장면 구성에서 보자면 두 남자를 보여주고 주인공과 반응하는 사람, 지켜보는 사람으로 넘어가면서 관계망들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가 과거의 아내와 느꼈던 감정적 관계가 지나가버렸고 그 상태는 다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불안전함을 일상적 차원에서 호소하면서 주변적인 상황과 관계 안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영화 속에 놓여진 사람들이 주변적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와 감각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영화가 정확하게 보여줄 순 없지만 어떻게 전달해나가는지 집중하는 게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후반부에 보면, 카메라는 고정되어있고 어두운 거실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녀 주인공이 낭만적으로 비춰진다. 몸을 맞닿고 있는 것은 잔에 볼을 부비는 순간의 느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은 두 사람이 그런 관계를 이루지 못하여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창문에 기대어서 뒤돌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관계가 지닌 비통함과 감정적 손실을 영화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화 라스트는 영화 제목과 어우러져 있는데, 원거리 숏과 망원 렌즈로 숏의 합으로 연속적이 아니라 분절되어서 표현되고 있다. 현실성의 단면들을 쫓기 보다는, 다른 방식의 촬영을 따라서 한 순간을 포착해나간다. 영화의 정서성, 느낌, 공간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진 것은 아니나 형식성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효과들을 통하여 인물들의 정서적 상태에 근접하려는 시도들이 돋보인다. 중요한 대사 진행 대신 일상적 제스처들로 구성되어있다. 사건의 측면에서 보면 크지 않지만, 구성형식으로 보면 두 명의 아이가 빠지고 아이가 들어오는 걸 엄마가 지켜보는 식의 관계의 망으로 구현되어 있다. 두 부부가 앉아서 다정하게 몸을 만지는 걸 딸이 지켜보는 장면에서도 관계를 지켜보는 시선을 통해서 가족 내 관계들을 재구성한다. 


가족 공동체의 회복, 빈곤한 사람들의 희망 소유 여부 가능성보다는 가족 내부에서 갖고 있는 충돌, 어른들이 갖는 고독과 분리, 아이들의 시선, 남자 중심적인 인물들을 반복되어지는 형태로 관계성 망 안에서 포착하고 있다. 독립적 형태로 새롭게 관계 맺는 느낌으로, 드라마 차원에서 보면 희망은 없으나 형식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관계성이 채워지고 있다. 한 여자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손으로 보이지 않는 제스처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애가 태어난다는 건 보여줄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의 상태를 가시화한 것이다. 양을 도살하고 있는 장면과 병치될 때, 희망이나 미래가 열려있지만 한편으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절차 안에 포섭되어있는 느낌을 준다. 비극적이고 희망없음과 온화한 느낌들을 동시에 전달해주고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가 성취하는 건 일상의 영역을 인물의 정서나 감각의 상태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인 영역 안에서 보여지는 제스처나 에피소드 안에 단지 즉각적으로 포착하기 보단 그 안에 내재되어지는 과거, 진행될 미래적 상태, 가시화되지 않는 공동체의 과거나 역사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영화적 기법들은 영화적 조형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안에서 정확히 환기될 수 없는 과거의 흔적들이 이들 삶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고 표현되고 있는가. 영화의 강력함은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생생함에도 있지만 아직 볼 수 없는 것들에도 있다. 배경 음악인 블루스는 이들의 오랜 과거를 환기시킨다. 현재적 상태에서 강력하게 말해지진 않지만, 그 부분들을 영화라고 하는 장치들을 통해서 경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측면들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들이다. 찰스 버넷이라는 감독이 만든 데뷔작이고, 이 영화가 시도하는 특징들이 지금보다도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생생한 느낌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형식들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 내의 소수자, 흑인들을 담아내는 그들을 이미지로서 표현해나가는 고민을 영화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70년대 이래로 흑인들의 표상, 여성들의 표상, 제3세계를 관습적인 영역 안에서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미지를 공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양 도살자>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보여 지는 정서적 느낌과 인물들이 놓인 상황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온전하게 체험되었다면, 영화가 시도하는 바가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추어적이고 아무런 일도 없으니까 지루하게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당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영화 중 한 편으로 남아있다.

 

정리: 윤서연(관객에디터) | 사진: 최미연(자원활동가)

몬테 헬만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저주받은 작가였다. 프리웨이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자유의 이차선>(1971)은 <이지 라이더>(1969)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로드무비의 숨겨진 걸작이지만, 흥행부진 때문에 몬테 헬만은 할리우드 영화사로부터 방출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자유의 이차선>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무엇이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진 남자 Hell-Man’라 불리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작가주의를 주창한 ‘카메라-만년필론’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비평에서 시작해 영화감독이 된 첫 번째 비평가로 누벨바그(특히 고다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드물게 이스트먼 컬러로 촬영한 <여자의 일생>(1958)은 그러나 누벨바그 태동기에 개봉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미국적 재래라 불린 찰스 버넷의 혁명적인 데뷔작 <양 도살자>(1979)도 필름으로 만나기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몇 년 전에야 35미리 필름으로 복원되어(한국에서는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 ‘복원전’에서 처음 복원된 영화가 상영되었다)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자크 베케르의 <황금투구>는 지금은 그의 대표작이 됐지만 개봉 당시에는 시네필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환대받지 못했다. 영국의 린제이 앤더슨이 그의 영화를 옹호하는 편지를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쓰는 일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큰 수난을 겪었던 이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이다. 타르코프스키를 두고 종종 ‘영화의 순교자’라 말하지만 파라자노프야 말로 말 그대로 순교자였다. 워낙 독특한 개성덕분에 그는 영화만큼이나 평생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68년에 완성한 <석류의 빛깔>(원래 제목은 ‘사야트 노바’였다)은 영화의 역사 그 어디에도 빚지지 않는 독특한 영상과 수법으로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적인 아름다움을 도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소련의 검열을 당해야만 했다. 동시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알렉산더 루블료프>(1966)가 상영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지만(이 영화는 1971년에야 상영이 될 수 있었다) 파라자노프의 작품은 작품이 훼손되는 과정을 거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첫 상영은 의미가 있다. 파라자노프는 이미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5)에서 고대적인 전통과 민족적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화계의 이단자로 취급받았었다. 파라자노프는 오랜 시간동안 고초를 겪었고,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영화제작을 준비하던 1990년, 66세의 나이로 파라자노프는 세상을 떠났다.

 

<석류의 빛깔>의 첫 시작부에 나오는 문구처럼 파라자노프는 삶과 영혼에 시달린 시인이었다. 고다르는 그를 ‘이미지, 빛, 그리고 현실로 구성된 영화사원의 사제’라 말했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삶’이라 붙인 이번 특별전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사원에 자리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회다. 봄날의 산보자처럼 한가로이 19편의 작품들로 장식된 영화의 사원을 거닐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제국에 대항하는 낭만적인 무법자들
-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플라잉 더치맨’을 선두로 탐욕스런 동인도 회사의 선박들이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시시각각 몰려오는 상황에서 연맹회의를 개최한 해적들은 전투를 벌일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인다. 바르보사 선장이 해적들의 규약을 들먹이며 ‘전투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해적왕’이라 원칙을 고수하자 다른 해적 대표 한 명이 발끈하며 ‘규약 따위가 지금 무슨 소용이요’라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때 한 발의 총탄이 날아오고 그는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고꾸라진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흐르면서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말로만 전해졌던 해적들의 법률 위원장 티크 선장이다. 티크는 그 유명한 해적들의 법전을 들춰가며 적들과 전투를 벌일 것인가를 투표에 부친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기타를 연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최종편인 3편에서 이 장면은 그저 하나의 상황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특별한 순간을 연출한다. 티크 선장역으로 출연한 이가 바로 록 그룹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차드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니 뎁의 친구로 알려져 있는데, 조니 뎁은 이 영화에서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상당부분 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한다. 조니 뎁은 비열하고 뻔뻔하며 치졸하고 제멋대로이지만 화려한 룩에 눈가의 짙은 마스카라를 그린, 그나마 그 시절에 제대로 멋을 부릴 줄 아는 잭 스패로우를 ‘18세기의 록스타’로 표현한다. ‘버트 랭커스터처럼 연기해 달라’라는 제작자의 주문을 그가 뿌리쳤다고 한다. 무성영화시절 해적왕을 연기한 느끼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도 사뭇 다른 이 독특한 잭 스패로우는 <스파이더 맨>의 피터만큼이나 친근감을 준다. 무엇보다 그는 행동과 사고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키스 리차드 또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에 대해 ‘무엇보다 자유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풀어주어야 한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질서에 우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바 있다. 키스 리차드와 잭 스패로우, 그들을 연기한 조니 뎁, 이 다중이 캐릭터야 말로 정말 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독창적인 원천이다.  
<스파이더 맨>이나 <반지의 제왕>과 달리 새로운 세기의 관객들에게 테마파크에서 가볍게 즐길 법한 흥겨운 모험과 여흥을 체험케 하는 것이 <캐리비안의 해적>이 추구하는 주된 목표라면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나 감독 버빈스키의 시도는 정말 제대로 영화에서 관철됐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초반의 싱가폴에서 중국 해적들과 동인도 회사의 병사들이 벌이는 전투장면, 그리고 후반에서 바다의 여신이 일으킨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해적 연맹과 동인도 회사 병력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특히나 밧줄을 타고 곡예를 하듯 해적들이 배를 건너다니는 장면이 주는 쾌감은 <스파이더맨>의 도심 활공장면에 필적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액션 장면들은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실은 구성상에서 전채요리에 불과하다. 메인요리, 혹은 <캐리비안의 해적>의 진정한 독창성은 앞서 말했지만 새로운 세기에 어울리는 다중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점에 있다.
영화에서 잭 스패로는 18세기 드넓은 바다를 장악하며 제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다국적 동인도 회사의 탐욕과 맞서 싸우는 자유의 대변자이자 신대륙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개척자이다. 2편 ‘망자의 함’에서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와 윌(올랜드 볼룸)은 결혼 직전엔 동인도 회사의 하수인인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의 음모로 위험에 처한다. 탐욕스런 동인도 회사의 제국주의적 지배욕과 맞서 엘리자베스, 윌, 잭은 힘을 합하게 되는데 물론 이들의 선한 행동에도 어두운 욕망은 숨겨져 있다. 사실 2편 ‘망자의 함’에서 재미있던 것은 이들이 얻고자 하는 ‘망자의 함’, 즉 데비 존스의 심장이 욕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고통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데비 존스는 사랑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특별한 상자에 가둬두었다. 그런 점에서 협작꾼으로 온갖 술책을 부리는 해적 잭 스패로가 미워할 수 없는 반영웅이라면 수염처럼 마구잡이로 뻗은 문어다리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며 나름 우아하게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악인 데비 존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독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캐리비안의 해적>은 그 독특한 인물들의 정신세계가 그려낸 드라마가 스펙터클한 장면들보다 더 큰 흡인력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3편 ‘세상의 끝에서’는 절반의 만족만을 제공한다. 1편과 2편에서 흥미롭게 구축한 캐릭터들은 3편에서 어찌된 일인지 바다의 여신이 일으킨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그저 하염없이 사라져간다. 캐릭터들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불편해지고 이야기는 더 난삽해졌다. 1,2편에 이은 3편에의 기대는(물론 3편이 1,2편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세 편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구성의 밸런스를 말하고자 함이다.) 원래대로 하자면 잔가지들이 제대로 정리되면서 캐릭터들의 세계가 굳건히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3편은 전편들에 비해 더 난삽한 편이다. 싱가폴의 해적왕으로 출연해 느닷없이 죽어버리면서 뜬금없이 엘리자베스에게 해적선을 떠넘기는 주윤발의 캐릭터는 구성의 심각한 불균형을 예고한다. 결국 이야기의 군살이 정리되지 못한 채 종반을 맞이하는 꼴이 됐다. 
무엇보다 필요 이상의 등장인물이 넘쳐나고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이 전편들에 비해 과다하다. 전통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인물들이 명확한 선악의 구분에 근거해 전형적인 행위가 구축된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각 인물들이 시시각각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묘미가 제일로, 충분히 캐릭터로도 영화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3편에서 잭은 최종적으로는 <스타워즈>의 한 솔로 같은 조연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그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사실 잭의 매력을 더 끄집어낼 수 있었던 부분이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대치되면서 이 영화는 그저 롤플레잉 게임의 일부가 돼버렸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관련한 제작노트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본적 명제가 ‘왜 인간은 해적을 좋아하는가’에 있다며 ‘어른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규범에도 권력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원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유를 잃고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현대인의 삶이다. 그들이 극장에 앉아 자신이 해적이 되어 자유로움을 만끽해보는 것. 그것이 관객들에겐 하나의 신나는 해방구일 수밖에 없다'라 한다. 자유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모험은 실로 매혹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징후적으로 시대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3편에서 동인도 회사와 해적들의 격전을 보고 있으면 노암 촘스키가 <해적과 제왕>에서 든 예가 떠오른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해적에게 “넌 어찌하여 감히 바다를 어지럽히느뇨?”라고 묻자 해적은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감히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건가요?”라면서 “전 그저 자그만 배 한 척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도둑놈 소릴 듣는 것이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 짓을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고 불리는 것뿐이외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그만 배 한 척에 해골 깃발을 올리고 당당히 바다를 표류하는 잭 스패로의 모험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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