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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오락영화라 치부하며 간과하는 영화들이 있다. 혹은 지나칠 정도로 모든 미국영화를 정치적인 영화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9.11 테러 이후의 미국영화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모든 할리우드의 제작자들, 감독들은 그럴 경우 시대의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는 민감한 정치영화감독들로 둔갑한다. 미국영화를 미학적으로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회정치적 시각으로 영화들을 바라보는 이런 편중된 시선은 대신 아시아 영화들이나 유럽영화들을 볼 때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상할 정도다. 반대로 말하자면, 미국영화는 그렇다면 유럽영화가 그러지 않았던 것과 달리 언제나 시대의 민감한 표상작용을 했던 것일까.    

일단 <트랜스포머>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트랜스포머>를 보며 들었던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가 매직 랜턴이래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제공해 왔던 환상성의 즐거움을 순수한 형태로, 그러니까 기계와 영성의 기괴한 결합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성은 물론 현실에 불가능한 상상을 추가하고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상이라 여긴 것을 현실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 상상은 그러나 현실의 일부라 말할 수 있겠는데, 이를테면 주로 어린 시절의 달콤했던 기억처럼, 유년 시절에 잠자리에 들 때 머리 맡에 두었던, 혹은 놀이의 대상이자 소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장난감들과 맺었던 친근한 감정들 같은 것이다. 언제든 만지작거리며 상상의 세계를 키워나갔던 장난감 로봇들 말이다.

머리 맡이라는 친근한 거리가 표현하듯 이런 장난감들은 우리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변에 머물러 있는 애완동물같은 것으로 가끔은 유모처럼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 줄 것만 같은 보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사물들과의 친근한 거리는 유년시절과 같은 순수성의 상태에서 가능한 것으로, 일찍이 스필버그는 <E.T>에서 그 극한을 보여주었다. 그가 <트랜스포머>의 제작에 참여한 것은 꽤나 어울리는 일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귀재라 불리는 마이클 베이는 그 친근한 꿈을 금속성의 기계와 결합한다. 유년성의 흔적을 영화의 한 장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셉티콘의 로봇들이 신비한 에너지의 원천인 ‘큐브’를 손에 넣으려는 시도를 좌절시키려 오토봇이 지구를 방문하는데 이들은 마치 천사들의 강림처럼 거대한 빛줄기를 타고 대지로 하강한다. 이를 본 꼬마아이가 탄성을 내지르며 한 말은 영화의 핵심적인 유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혹시, (당신들은) 장난감의 요정이 아닌가요.’
 
<트랜스포머>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이의 환상과 같은 상상의 세계에 디즈니세계의 달콤한 생명체들이 거주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좀더 날카롭고 경직된 움직임의 기계 로봇이 자리를 차지한다. 금속의 삐꺽거림이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것에 매혹과 신비함, 더 나아가 영성을 부여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E.T>와 같은 상상에 <터미네이터>나 <로보캅>과 같은 기계-표피를 입었다고나 할까. 경직된 근육, 하드한 신체성을 지닌 로봇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의 기계적 분절적 움직임에 초자연성과 정신성을 기입하는 것이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샘은 그가 흠모하는 미카엘라를 어렵게 자신의 차에 태우는데 그 때 그녀는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내가 좀 근육질 남자에게 약한 것 같애. 가슴이 울퉁불퉁한 그리고 알통이 있는 남자에게 약하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미카엘라의 말은 이 영화의 본성을 짧게 요약한다. <트랜스포머>의 매혹성이 바위처럼 단단한 신체성, 금속 기계의 ‘하드’한 바디에 있다는 점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더 언급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 카타르에 있는 미군기지가 미확인 괴물체에 의해 습격을 당하는 순간 기지에 있던 일군의 용맹한 병사들은 괴물에 대항해 격렬한 저항을 벌이는데, 전투가 끝난 후에 이들 중 한 명은 이상한 경험을 느꼈다며 동료들에게 토로한다. “난 그런 종류의 무기 시스템은 일찍이 본 적이 없어. 온도 감지센서로 봤는데 그 녀석에게는 보이지 않는 포스들이 골격 주변을 덮고 있어 이상한 아우라가 느껴지더군.” 카메라는 실제로 그가 괴물과 조우했던 순간에 온도감지기계를 관통하는 그와 괴물체의 시선의 교환을 다소 혼란스럽게 표현한다. 다른 친구가 그의 말에 동의 할 수 없다는 듯이 “그건 불가능해. 그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야”라고 핀잔을 주자 그는 “‘어머니가 그런 능력이 있었지. 나도 그 힘을 물려받은 거야. 마법과도 같은 주술적 힘이라 할 수 있지”라 덧붙인다.
 
주술적 힘과도 같은 신비로운 체험은 주인공인 샘 윗윅키가 중고자동차를 사러 갔을 때 보다 분명한 표현의 기회를 얻는다. 중고차 판매인은 샘에게 “사람이 차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차가 사람을 고른단다. 인간과 기계의 신비로운 결속이 여기에 있지”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영화의 주제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기계와 인간의 신비로운 결속은 영화가 진행될 수록 샘과 가디언 덤블비의 교감에서 오토봇과 병사들의 교감으로 확장된다. 영화의 라스트에서 오토봇의 로봇들은 희생이 따른 전투를 끝낸 후에 “우리는 용맹한 전사를 잃었다. 하지만 새로운 용사들을 얻었다”고 근엄하게 말한다.

희생과 용기, 그리고 믿음의 결속으로 이어지는 <트랜스포머>의 서사는 사실 극단적인 구석이 있다. 인간과 로봇의 교감은 유년기적 상상에 근거하는데 이는 영화의 모토이기도 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계의 형상으로 모습을 숨기다가 위기의 순간에 인간을 지키는 거대 로봇으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거대 줄기인데, 이런 ‘비가시적 유대’는 희생이 뒤따르는 전투를 벌인, 이른 바 전우애라 할 수 있다. 가령, 범블비가 비밀경찰에 끌려갈 때 오토봇의 기동전사들은 “그는 용맹한 전사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다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도 이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라며 덤블비를 구출할 생각을 포기한다. 디셉티콘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오토봇의 리더인 옵티머스 프라임은 샘이 죽음을 불사하고 ‘큐브’를 사수하려는 행동을 본 후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신을 희생할 결심을 한다. 이런 결속은 유년기적 교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나 있을 법한 전사적 유대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런 전사적 유대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인물이 대통령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 그러했듯이) 정치적 대변자로서의 대통령의 위치를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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