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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특별전] 패닉: 시대의 불안과 위협 본문
이 목록들은 지극히 우연적인 선택의 결과다. 미국 영화들 중에서 최근 디지털 복원된 작품들 네 편을 추렸던 것이다. 시대는 제각각 다르다. 다만 선택의 과정에서 은연중에 ‘패닉panic’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패닉이란 알다시피 돌발적인 불안과 공포, 스트레스에 의한 혼란한 심리상태를 말한다. 혹은, 그에 따른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공황상태다. 이 단어와 함께 의식에 부상한 것은 도덕moral이란 말이었다. 그렇게 모럴과 패닉의 합성어가 만들어졌다. 이 개념은 1972년 영국의 사회학자 스탠리 코엔Stanley Cohen이 1960년대 영국의 매스미디어가 당시 모즈나 로커즈라는 거친 젊은이들을 어떻게 과잉 보도했는지를 기술할 때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도덕적 공황을 일컫는 말로 사회질서의 위협으로 간주된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발산되는 다수인들의 격렬한 감정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표현은 시대의 불안과 관련이 깊다. 어떻게 무분별한 시대의 불안이 사람들의 분노와 격노로 격해져 가는지, 치안에 대한 불안이 무뢰한이나 반문화집단을 배제하는 집단 공포와 집단 광기, 혹은 집단행동으로 전이되어 가는지를 말해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섹션의 작품들은 그런 ‘도덕적 패닉’의 전형성을 대표할 영화들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연적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목록이 적다. 다른 부제들을 관객들이 떠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만, 패닉과 시대적 모럴의 비틀어진 합성의 작품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영화 그 자체가 오랫동안 시대의 도덕적 패닉의 대상이 되어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극장의 어둠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보여주고 저급한 행동이 벌어질 수 있는 나쁜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언제나 무언가 은밀한, 음습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검열이 동원되고 극장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스크린에 전시되는 폭력과 섹스의 이미지에 과다한 반응이 생기기도 했다. 영화는 비도덕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장소이자 반사회적인 이미지들이 들끓는 곳이기도 했다. 영화는 그 시대의 모럴의 위기를 반영하고, 혹은 그 위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영화에서의 패닉과 모럴의 문제는 그러므로 그 시대의 정치학을 반영한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는 시대의 상상된 사회에의 위협을 표상한다. 이 네 편의 영화는 그러므로 각각의 시대에서 사회의, 혹은 사회에의 위협을 상상화한 작품들이라 말할 수 있다. 목록은 당연하게도 확장되고 넓어질 것이다.
그 첫 번째 작품은 프리츠 랑의 <인간 사냥>(1941)이다. 프리츠 랑, 더글라스 서크, 로버트 시오도마크, 에드워드 드미트리, 존 베리, 조셉 로지, 밀로스 포먼, 로만 폴란스키. 이름은 더 호명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시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제 나라를 떠나야 했던 망명의 작가들이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던 이들, 빨갱이 사냥 시대에 미국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건너가야만 했던 작가들, 혹은 공산권에서 망명한 작가들이다. 망명자들의 영화, 혹은 망명은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 흥미로운 사례의 처음에는 아마도 프리츠 랑이 자리할 것이다. 프리츠 랑은 나치 독일에서 망명한 작가이다. 프리츠 랑의 미국 시절(1934-1956)은 그러므로 독일의 우파Ufa 스튜디오에서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던 때와는 달리 실업을 피하기 위해 그가 얻을 수 있는 무엇이든 작업을 해야만 했던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피고용자 신분의 작업을 의미한다. <인간 사냥>은 이 시절의 초기에 만들어진 영화로, <사형수 또한 죽는다>(1943), <공포의 내각>(1944), 그리고 <클로크와 대거>(1946)로 이어지는 반-나치 영화의 첫 번째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하던 해는 1941년으로,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의 참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진주만 폭격은 이 영화가 개봉하고 반 년 후에 벌어졌다.
영화의 첫 시작부에서 우리는 영국인 사냥꾼 손다이크가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체포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동물을 죽이지 않고 단지 목적을 달성하는 영국식 사냥 스포츠를 즐겼을 뿐이라 답한다. 나치 장교는 그가 히틀러를 암살 기도했다는 조작 서류에 사인을 하도록 강요한다. 때는 영국과 나치 독일이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기 전인 1939년. 그는 죽음의 위협에서 탈출에 성공해 런던에서 아름다운 여인 제리에게 도움을 얻지만 얼마 후, 독일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는 히틀러의 암살을 위해 적진에 침투한다.
서스펜스 스릴러처럼 전개되는 이야기가 꽤 복잡한 모럴의 문제를 불러오는 것은 영화의 중반 이후를 거치면서이다. 손다이크는 게임 사냥꾼으로 자신이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강변한다. 그는 죽이는 게 아닌 추적 과정에 그 맛이 있는 사냥이야말로 최고의 게임이라며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그의 운명은 나치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면서 그리고 한 여인과 만나면서 변하게 된다.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성냥갑이 그러하듯이 손다이크와 제리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은 활 모양의 머리핀이다. 이 둘의 관계에 어떤 낭만성이 없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랑은 둘의 로맨스 대신에 활 모양의 머리핀을 기호로 활용한다. 영화의 한 장면. 잃어버린 머리핀을 사기 위해 가게를 방문하는 장면은 어렴풋이 독일 시절 그가 만든 <엠>의 한 장면, 즉 연쇄살인범이 쇼 윈도우 앞에서 진열된 물건들에 사로잡힌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쇼 윈도우 앞에서 넋을 놓고 소비사회의 물건들을 쳐다보는 소녀에 은밀한 시선을 보낸다. 쇼 윈도우는 랑에게 현대적 도시, 시각적 호기심과 매혹의 이미지가 전시되는 장소다. 미국 시절로 넘어가면서 랑의 영화에서 쇼 윈도우는 도시적 소비문화가 양산한 강박성과 억압된 욕망의 기호들의 전시로 종종 등장하곤 했다. <엠>에서의 기하학적 패턴의 칼과 거울, 그리고 화살 모양의 장식들을 보고 있던 살인자는 곧이어 도시의 어둠의 사냥꾼들에게 추적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영화의 내러티브 중심에서 벗어난 꽤 예외적인 휴지부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러티브를 갱생하는 이미지의 논리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냥>에서 우리는 이 화살의 기호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 것인지를 앞으로 보게 된다. 제리는 하트 모양의 머리핀은 흔하니 화살 모양의 핀을 달라고 주문한다. 가게 주인은 크롬으로 만들어진 이 머리핀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멀쩡할 거라 말한다. 그녀는 그 말대로 희생자가 될 것이고, 머리핀은 남아 손다이크의 모럴을 자극한다. 동굴에서의 나치 장교와의 활의 싸움. 최종적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그의 시도. 비행기에 그려진 화살의 기호. 사랑과 죽음, 그리고 공포의 이미지로 기억될 기호들.
헨리 헤서웨이의 <죽음의 키스>(1947)는 로버트 시오도마크의 <킬러>(1946), 아브라함 폴란스키의 <악의 힘>(1948), 조셉 루이스의 <건 크레이지>(1949), 그리고 라울 월쉬의 <화이트 히트>(1949)로 이어지는 40년대 필름 누아르의 대표작이다. 이야기는 뉴욕의 크리스마스 날에 벌어진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지만, 운이 좋지 않은 이들, 특히 전과자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닉에게는 불행한 날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는 때에 다른 방식으로 선물을 사려 한다. 영화 초반의 돈을 터는 강탈 시퀀스, 그리고 이어지는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장면이 꽤나 초조한 긴장감을 불러올 만큼의 정교한 편집으로 흥미롭다. 이 영화는 범죄자 닉의 운명적 상황을 강조한다. 그의 범죄에 대한 뚜렷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에 이 사건은 순수하게 그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부각시킨다. 범죄가 크리스마스에 벌어지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그가 기독교적인 희생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리하여 유일한 방법으로 종교적 믿음과 희생에 도달한다. 영화는 당시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리얼 로케이션 촬영의 진수를 보여준다. 동시에 사회적 행동과 개인의 모럴의 희망 없는 상태, 무력함을 전시한다. 그 가운데 휠체어의 노파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신흥 범죄자 리처드 위드마크의 위협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 흥분된 에너지가 충격을 준다. 이 파괴적인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건 크레이지>와 <화이트 히트>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사회와 법이 시대적 불안과 공포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70년대 터프한 경찰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즉, 사회가 구제될 수 있고 구제되어야만 한다는 약속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더티 해리>와 <프렌치 커넥션>(1971)과 같은 영화에서 플롯의 전제이다. 자경단의 액션은 정신이상적인 형사의 과격한 폭력에서 구제를 찾기 힘든 사회의 몸서리치는 비전을 제시한다. 윌리엄 프리드킨을 유명하게 만든 <프렌치 커넥션>의 주인공, 뽀빠이 형사 지미(진 핵크만)는 활력이 넘치고 과격한 폭력을 불사하는 이로 범죄자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차를 몰고 범죄자를 추적하면서 도리어 거리를 패닉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마르세이유의 허름한 집에서 한 남자가 킬러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시작해, 브루클린의 뒷골목에서 뽀빠이 형사가 마약 판매원을 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영화는 법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목 하의 과다한 폭력에의 의존, 더 나아가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사회적 질서를 도리어 침해하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폭력과 살인을 종결시키려는 폭력은 뽀바이 형사와 같은 반영웅이 휴머니티를 반납하고 치러야만 하는 도덕적 부담이다. 자경단은 그러므로 다크 나이트의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의 매력은 그의 모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에 있다. 탐정으로서의 그의 절차적 능력, 범죄자를 쫓는 탁월한 드라이빙의 재능, 그리고 파이터로서의 몸의 파워. 경찰의 자질은 법 질서의 집행이 아닌 절차적으로 숙달된 능력에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공들인 유명한 장면들은 모두 추격의 시퀀스들이다. 그리고 이 추격의 상황이야말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선과 악의 판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무차별한 액션의 롤러코스트를 만들어낸다. 최선의 사내는 결국 최고의 추격자여야만 한다. 고도로 스타일화된 추격 장면은 그러므로 가장 사실적인 것으로 포장된다. 아니, 사실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프렌치 커넥션>에 따라붙은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이란 비록 이 영화가 경찰들의 세속적인 일과들을 강박적으로 전시하고 있음에도, 지극히 양식적인 것들로 원인을 지워가면서 그들의 대담한 행동에 주목하게 하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법 질서 확립의 권위를 상실한 사회에서 경찰은 사회적 질서를 대변하는 단독자로 나서기 위해 그의 모든 능력을 미화시켜야만 한다. 뉴욕은 더럽고 추하고 사악하다. 모럴은 그러므로 사회가 처한 물리적 위험보다 덜 중요해진다. <프렌치 커넥션>은 정치적 주장을 슬며시 피하면서(가령 뽀빠이 형사의 적수는 부패한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사업가이다) 흑백의 인종적 갈등을 법 질서와 경찰의 하위문화의 관계로 치환한다. 나중에 우리는 로드니 킹 사건에서 현실의 파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기말의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1999)이 있다. 공개 시에 폭력적인 영화이므로 상영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영화다. 실제로 <파이트 클럽>의 초기 예고편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 파시스트적이라거나 무책임한 영화로 비난받았고 영화의 극단적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사회적으로 무책임하고 불쾌하다는 평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폭력이 흥미로운 것은 그 방향이 타인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후반부의 집단적 테러리즘의 경우로 치닫는 경우를 제외하자면), 자기 파괴적인 폭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맞는 것에 의해서 아픔을 안다는 것, 아픔을 느끼는 것으로 살아있다는 실감을 맛보는 것. 통증을 통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래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가령, 빌딩의 술집 지하를 파이트 클럽으로 전용한 테일러에게 격분한 주인이 찾아와 그를 후려질 때, 테일러는 전혀 반격하지 않고 맞는 것을 기뻐한다. 그 반응에 불길함을 느낀 주인은 결국 사용을 허락하고 자리를 떠난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후반부에 내레이터(내레이션을 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주어져 있지 않다)가 미모의 청년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리는 분노의 폭력이다.
내레이터인 에드워드 노튼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에서 빠져나와 타일러와 만나면서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스러운 탈영토화의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 이들의 폭력은 소비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공격의 대상으로 한다. 그들은 캘빈 클라인의 속옷 광고와 잘 만들어진 근육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항하는 저항으로 자기 파괴적인 폭력행위를 신봉한다. 파트리샤 피스터르스가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에서 지적하듯이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분열증-운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타일러가 내레이터에게 어떻게 비누와 폭탄을 만드는지를 가르쳐 줄 때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우아한 문화의 하나인 지방흡입 병원에서 사람의 몸에서 나온 찌꺼기인 지방 덩어리를 훔쳐 글리세린 비누와 니트로글리세린 폭탄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판매하는 비누는 백화점 매장에 진열되고, 폭약은 나중에 신용카드 회사와 자본주의 상징물들을 폭파시키는 데 활용된다. 지방 찌꺼기는 소비 상품으로 전화하고, 결국에는 전체 체계에 대항하는 니트로글리세린 폭탄이라는 파괴적인 무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지젝의 말을 빌자면 이러한 파괴는 위반으로서의 전복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전복 자체를 전복하는 것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특별섹션으로 상영중인 네 편의 영화에 대한 글이다. 아쉽게도 상영작 중에서 프리츠 랑의 <인간 사냥>은 상영본의 문제 때문에 결국 상영이 취소되었다. 다른 기회에 다른 작품들의 목록을 포함해 다시 이런 주제의 프로그램을 기획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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