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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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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영화관

[에세이] 시네마테크, 필름의 소셜리즘을 위하여

Hulot 2012. 4. 18. 02:33

시네마테크, 필름의 소셜리즘을 위하여

 

프랑스의 음악애호가인 제임스 클레망은 13,788개의 MP3파일을 불법 다운로드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기소됐다. ‘다운로드는 시민의 권리’라 클레망은 주장했지만 온라인 저작권 보호법은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사안의 성격상 언론의 주목을 끌만한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고다르가 나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해 클레망은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가 재판비용의 용도로 1,000 유로를 자신에게 기부했노라고 발표했다. 고다르는 이미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온라인 저작권법에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다르는 인터뷰에서 “지적 재산권이란 없다. 창작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예술가에게 작품에의 권리가 없다는 고다르의 발언은 영화에 관한한 현실이기도 하다. 작품의 저작권은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혹은 투자자)에게 귀속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 결과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 해, 알랭 레네의 <잡초>(2009)를 시네마테크의 특별전에서 상영하려 했을 때, 프랑스의 제작사는 상영과 관련한 동의를 내주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테렌스 멜릭의 <뉴 월드>(2005) 또한 제작사의 허락을 받지 못해 상영이 불가능했다. 호평을 얻었던 작품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내가 아는 한 한국의 영화제에서도 제대로 상영된 적이 없다. 작가가 동의하더라도 제작사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다. 단순하고 깨끗한 논리다. 작가는 영화의 저작권자가 아니며 상품으로서의 영화에 지적 재산권이란 없다.

이런 사례도 있다. 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모 감독의 작품은 저작권의 상속자들이 터무니없는 고액의 상영료를 요구해 상영을 포기해야만 했다. 작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작권이 도리어 영화 상영을 불가능하게 하는 꼴이다. 

저작권 분쟁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네마테크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위함이다. 시네마테크는 단순하게 작품의 수집, 보존, 복원, 상영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가 구상한 상상의 영화박물관은 필름을 수집하는 아카이브이자 영화를 상영하는 박물관이었다. 두 가지 과정이 있다. 첫째, 과거와 현대의 새로운 영화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아카이브가 구축된다. 둘째, 영화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상영으로 영화의 역사가 박물관에서 새롭게 형상화된다. 그런데 아카이브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박물관은 결코 역사를 완결시키는 곳이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영화 상영은 그래서 관객에게 시간, 장소, 기원의 연대기적인 질서에서 탈피한 생산적 혼란을 자극해야만 한다. 역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노력! 고다르가 “시네마테크가 왜 좋은지 아는가? 거기서 당신은 영화를 뒤범벅으로 볼 수 있다. 1939년의 조지 쿠커의 영화를 1918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함께 볼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선구자였지만 행운아이기도 했다. 193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의 초창기였던 시절에 상업적 가치를 잃어버린 영화들은 폐기처분되고 있었다. 저작권은 분명치 않았고 노고를 동반하긴 했지만 훔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랑글루아 자신은 영화 저작권자에게 항상 경의를 표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아카이브에는 불법적인 복제본이나 수집들이 즐비했다.

그가 모은 컬렉션에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 로봇이 있었고,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입었던 드레스도 있었다. 미국인 관광객들이 ‘이 드레스가 왜 여기에 있지’라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한국의 직지심경이 파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박물관은 일종의 국제작물 전시장으로 도둑질은 박물관의 본성이기도 하다. 누벨바그는 영화 박물관의 아이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본 영화를 인용해 훔치는 도둑들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화를 가질 권리가 없었던 그들은 남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영화를 훔쳐야만 했다. 

좋은 시절은 이제 지나가버렸다. 저작권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는 영화는 쉽게 훔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 영화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적 관점에서 영화에는 상품의 가치가 있다. 영화는 오락, 산업, 비즈니스의 대상이다. 저작권, 지적 소유권은 상품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적용된다. 둘째, 영화는 20세기에 개발된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의 유산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의 선언이 말해주듯 유산은 보존되고 전승되고 보여져야만 한다. 문화유산은 4대강처럼 공공적인 것이다. 유산적 가치를 지닌 영화는 학문적 연구를 위해 연구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문화를 누리기 위한 대중이 쉽게 접근 가능해야만 한다.

이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공공도서관에 책을 납본하듯이 영화도 상품적 가치가 소실되었다고 필름을 태워버리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상품을 지키기 위한 저작권은 매섭게 지켜지고 있지만, 공공적 접근을 위한 원칙과 제도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불균형이 영화에서 발생하고 있다. 국민적이고 국제적인 법이 제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나서지만 대중들이 영상의 유산적 가치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상업적 가치를 보호하는 동일한 저작권이 사실상 재정적 이윤이 불가능한 영화에의 공공적 접근을 방해한다.

손쉬운 방안이 있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수많은 영화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천국이 있지 않느냐고. 도둑질은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나쁜 결과들이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고 역사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불법적인 수단을 통한 영화보기가 불가피해진다. 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의 사적 전유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이제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왜 영화는 공공급식처럼 무상으로 공급되지 못하는가. 군대는 무료인데, 왜 극장과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만 하는가. 영화는 문화인가 아니면 복지인가. 지금 시네마테크에 부여된 미션은 그리하여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다. 시네마테크는 필름의 소셜리즘을 추구해야 한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지난해 11월, 동국대학원신문(169)에 기고했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