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THEQUE DE M. HULOT

제국에 대항하는 낭만적인 무법자들 본문

상상의 영화관

제국에 대항하는 낭만적인 무법자들

KIM SEONG UK 2011. 8. 24. 04:13

제국에 대항하는 낭만적인 무법자들
-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플라잉 더치맨’을 선두로 탐욕스런 동인도 회사의 선박들이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시시각각 몰려오는 상황에서 연맹회의를 개최한 해적들은 전투를 벌일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인다. 바르보사 선장이 해적들의 규약을 들먹이며 ‘전투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해적왕’이라 원칙을 고수하자 다른 해적 대표 한 명이 발끈하며 ‘규약 따위가 지금 무슨 소용이요’라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때 한 발의 총탄이 날아오고 그는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고꾸라진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흐르면서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말로만 전해졌던 해적들의 법률 위원장 티크 선장이다. 티크는 그 유명한 해적들의 법전을 들춰가며 적들과 전투를 벌일 것인가를 투표에 부친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기타를 연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최종편인 3편에서 이 장면은 그저 하나의 상황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특별한 순간을 연출한다. 티크 선장역으로 출연한 이가 바로 록 그룹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차드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니 뎁의 친구로 알려져 있는데, 조니 뎁은 이 영화에서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상당부분 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한다. 조니 뎁은 비열하고 뻔뻔하며 치졸하고 제멋대로이지만 화려한 룩에 눈가의 짙은 마스카라를 그린, 그나마 그 시절에 제대로 멋을 부릴 줄 아는 잭 스패로우를 ‘18세기의 록스타’로 표현한다. ‘버트 랭커스터처럼 연기해 달라’라는 제작자의 주문을 그가 뿌리쳤다고 한다. 무성영화시절 해적왕을 연기한 느끼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도 사뭇 다른 이 독특한 잭 스패로우는 <스파이더 맨>의 피터만큼이나 친근감을 준다. 무엇보다 그는 행동과 사고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키스 리차드 또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에 대해 ‘무엇보다 자유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풀어주어야 한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질서에 우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바 있다. 키스 리차드와 잭 스패로우, 그들을 연기한 조니 뎁, 이 다중이 캐릭터야 말로 정말 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독창적인 원천이다.  
<스파이더 맨>이나 <반지의 제왕>과 달리 새로운 세기의 관객들에게 테마파크에서 가볍게 즐길 법한 흥겨운 모험과 여흥을 체험케 하는 것이 <캐리비안의 해적>이 추구하는 주된 목표라면 제작자인 제리 브룩하이머나 감독 버빈스키의 시도는 정말 제대로 영화에서 관철됐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초반의 싱가폴에서 중국 해적들과 동인도 회사의 병사들이 벌이는 전투장면, 그리고 후반에서 바다의 여신이 일으킨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해적 연맹과 동인도 회사 병력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특히나 밧줄을 타고 곡예를 하듯 해적들이 배를 건너다니는 장면이 주는 쾌감은 <스파이더맨>의 도심 활공장면에 필적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액션 장면들은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실은 구성상에서 전채요리에 불과하다. 메인요리, 혹은 <캐리비안의 해적>의 진정한 독창성은 앞서 말했지만 새로운 세기에 어울리는 다중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점에 있다.
영화에서 잭 스패로는 18세기 드넓은 바다를 장악하며 제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다국적 동인도 회사의 탐욕과 맞서 싸우는 자유의 대변자이자 신대륙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개척자이다. 2편 ‘망자의 함’에서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와 윌(올랜드 볼룸)은 결혼 직전엔 동인도 회사의 하수인인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의 음모로 위험에 처한다. 탐욕스런 동인도 회사의 제국주의적 지배욕과 맞서 엘리자베스, 윌, 잭은 힘을 합하게 되는데 물론 이들의 선한 행동에도 어두운 욕망은 숨겨져 있다. 사실 2편 ‘망자의 함’에서 재미있던 것은 이들이 얻고자 하는 ‘망자의 함’, 즉 데비 존스의 심장이 욕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고통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데비 존스는 사랑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특별한 상자에 가둬두었다. 그런 점에서 협작꾼으로 온갖 술책을 부리는 해적 잭 스패로가 미워할 수 없는 반영웅이라면 수염처럼 마구잡이로 뻗은 문어다리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며 나름 우아하게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악인 데비 존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독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캐리비안의 해적>은 그 독특한 인물들의 정신세계가 그려낸 드라마가 스펙터클한 장면들보다 더 큰 흡인력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3편 ‘세상의 끝에서’는 절반의 만족만을 제공한다. 1편과 2편에서 흥미롭게 구축한 캐릭터들은 3편에서 어찌된 일인지 바다의 여신이 일으킨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그저 하염없이 사라져간다. 캐릭터들의 밸런스가 심각하게 불편해지고 이야기는 더 난삽해졌다. 1,2편에 이은 3편에의 기대는(물론 3편이 1,2편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세 편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구성의 밸런스를 말하고자 함이다.) 원래대로 하자면 잔가지들이 제대로 정리되면서 캐릭터들의 세계가 굳건히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3편은 전편들에 비해 더 난삽한 편이다. 싱가폴의 해적왕으로 출연해 느닷없이 죽어버리면서 뜬금없이 엘리자베스에게 해적선을 떠넘기는 주윤발의 캐릭터는 구성의 심각한 불균형을 예고한다. 결국 이야기의 군살이 정리되지 못한 채 종반을 맞이하는 꼴이 됐다. 
무엇보다 필요 이상의 등장인물이 넘쳐나고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이 전편들에 비해 과다하다. 전통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인물들이 명확한 선악의 구분에 근거해 전형적인 행위가 구축된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각 인물들이 시시각각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묘미가 제일로, 충분히 캐릭터로도 영화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3편에서 잭은 최종적으로는 <스타워즈>의 한 솔로 같은 조연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그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사실 잭의 매력을 더 끄집어낼 수 있었던 부분이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대치되면서 이 영화는 그저 롤플레잉 게임의 일부가 돼버렸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관련한 제작노트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본적 명제가 ‘왜 인간은 해적을 좋아하는가’에 있다며 ‘어른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규범에도 권력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원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유를 잃고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현대인의 삶이다. 그들이 극장에 앉아 자신이 해적이 되어 자유로움을 만끽해보는 것. 그것이 관객들에겐 하나의 신나는 해방구일 수밖에 없다'라 한다. 자유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모험은 실로 매혹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징후적으로 시대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3편에서 동인도 회사와 해적들의 격전을 보고 있으면 노암 촘스키가 <해적과 제왕>에서 든 예가 떠오른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해적에게 “넌 어찌하여 감히 바다를 어지럽히느뇨?”라고 묻자 해적은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감히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건가요?”라면서 “전 그저 자그만 배 한 척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도둑놈 소릴 듣는 것이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 짓을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고 불리는 것뿐이외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그만 배 한 척에 해골 깃발을 올리고 당당히 바다를 표류하는 잭 스패로의 모험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