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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작가에는 권리가 없다, 다만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 본문

고다르 이야기

작가에는 권리가 없다, 다만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

Hulot 2013. 6. 22. 20:09






지중해를 항해하는 크루즈 호의 선상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마주한 한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유럽이여. 고뇌에 의해 정화되기보다는 고통에 상해가는 유럽이여. 되찾은 자유에 고양되지 못하고 도리어 모욕당하고 있구나’.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은 이렇듯 위기에 처한 유럽의 역사를 임종의 시선으로 되돌아보는 영화다. 3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전쟁과 문화, 유럽 통합과 글로벌한 세계, 예술과 문화의 등질화, 저작권 등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이미지와 소리가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그마와도 같은 이 영화를 여섯 개의 키워드로 살펴본다. 


제목: 필름과 소셜리즘

고다르는 영화를 만들 때 먼저 제목을 결정한다. 아이디어보다 제목이 앞설 때가 많다고 한다. 그가 마치 과학논문이나 실험보고서를 작성하듯이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제목은 그러므로 고다르 영화의 지표이자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서다. <필름 소셜리즘>이라는 제목은 곧바로 다음의 두 가지를 연상시킨다. 첫째, 고다르는 육중한 카메라를 동원해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던 지난 세기의 작가다. 물론 그는 들고 찍기에 편한 경량의 카메라를 선호했지만 말이다. 둘째, 그는 60년대 정치의 시기에 마오주의에 심취했고, 70년대에는 팔레스타인에 건너가 혁명영화를 만들었고, 80년대 이후에는 20세기의 역사(와 영화)를 되돌아보는 작업을 고독하게 진행해왔다. 그는 지난 세기의 필름과 소셜리즘에 매달려 있는 작가다. 가령, 영화의 한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행복한 유럽을 보기 전에, 러시아라는 단어와 행복이라는 단어가 다시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기 싫어요”. 여기서 러시아는 사회주의를 행복은 영화(필름)를 의미한다(‘행복’은 소비에트 시절의 영화감독 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이 만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식의 설명은 반쪽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촬영했다. 그러니 굳이 ‘필름’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이유는 없다. 실제로 고다르는 처음에 ‘소셜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소개용 책자를 만들기 위해 철학자 장 폴 쿠르니에에게 영화를 보냈을 때 착오로 제작사의 로고 Vega Fim이 영화제목과 붙어 그가 ‘필름 소셜리즘’으로 제목을 오인했고, 그 제목이 갖는 함의에 대해 쿠르니에가 고다르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제목이 결정됐다고 한다. 


디지털: 중심 없는 텅 빈 시선

레오스 카락스의 신작 <홀리모터스>에서 드니 라방은 디지털 시대에 육중한 무게의 카메라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필름 매거진을 장착한 무거운 카메라를 대신한 것은 고화질의 소형 카메라들이다. 카메라가 점점 작아지면서 이제는 카메라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됐다. 보이지 않는 카메라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도처에 시선이 넘쳐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시선들을 보라. 레오스 카락스의 말을 부언하자면 카메라가 소형화되면서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신중함도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카메라는 중심이 사라진 속이 텅 빈 시선과도 같다. 영화의 1막은 지중해를 항해하는 대형 유람선 내부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이 장면들은 모두 그런 다양한 소형 카메라들로 촬영되었다.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혹은 감시카메라들이다. 2막에서 방송국의 관계자들이 마르탱 가족을 인터뷰하기 위해 집을 찾았을 때, 우리는 그나마 촬영하는 자와 촬영되는 대상 사이에 카메라가 굳건하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1막의 장면들은 촬영하는 이가 불분명한 속이 빈 시선들이다. 이미지의 연결도 맥락없이 무차별적이다. 승객들이 식사를 하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도박을 하는 일상적인 순간들이 담겨있는데, 정작 도대체 이 영상들을 누가 촬영했고(간헐적으로 보이는 저해상도의 휴대폰 동영상은 특히 누가, 어떤 필요로 촬영한 것인지 궁금하다), 왜 촬영했는지 알 수 없다. 촬영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모호하다. 몇몇 중심적인 인물이 부각되는 순간들이 있긴 하다. 그 대부분은 그러나 이야기보다는 유명세에 따라 인식될 뿐이다. 가령, 알랭 바디우는 텅 빈 무대에서 기하학의 원리를 강연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특정한 주체가 어떤 대상을 촬영한다는 식의 자각 같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리댁티드>에서 모든 장면을 영화 속 군인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와 부대 도처에 설치된 CCTV 영상의 결합으로 만들어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느낌이 없는 장면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카메라의 기계적 시선이 포착한 이미지들. 1막이 보여주는 디지털 신천지 자본주의의 풍경이 그러하다. 

 




쿠오바디스: 유럽은 어디로 가는가? 

1막의 첫 부분에서 ‘돈은 공공재야’ ‘그러면, 물 같은 거네’라는 남녀의 대사가 나온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1막의 지중해 바다에 떠 있는 호화여객선은 돈 위에 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왜 그런데 영화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나? 고다르가 최근 유럽이 위기와 관련해서 그 기원을 그리스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2막의 가족 이야기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인물들의 원형, 그리고 2막에서 다루는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것들은 그런데 그 기원을 그리스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2막에 선행하는 1막은 지중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되었다. 호화여객선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향하는데, 그 여정에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데사(러시아), 그리스, 나폴리 등을 거친다. 6개의 장소는 인류의 역사와 관련되고 현대 유럽의 민주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기원들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 여정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희미하지만 거의 유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6년. 스페인 공화정부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밀매해 그것의 대가로 대량의 황금을 바르셀로나에서 출발시켜 오데사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하게 한다. 그 여정에서 대량의 황금이 분실된다. 1막에서는 반세기전의 미해결 사건의 관계자와 그것을 쫒는 수사관이 배에 동승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이 배가 결국 어디로 향하는가(혹은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어디를 거쳤는가)는 불분명하다. 3막의 장면들을 보자면 미래는 비관적이다. 고다르는 2막에서는 프랑스 작은 마을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질문하고, 3막에서는 팔레스타인 분쟁, 전쟁 범죄, 그리고 글로벌리즘으로 향한 세계의 위기를 거론하며 유럽의 역사를 비판한다. 

 

민주주의: 진보는 우리를 타자로 이끈다

소셜리즘이라고 했지만 고다르의 사회주의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들은 이를 예시한다.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모두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언어를 통한 인간적 대화란 결국 불충분하다. 다른 소통의 방식,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영화의 한 장면에 인용되는 이러한 대사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진보는 우리들을 타자에게로 이끈다”. 만약, 소셜리즘이 진보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일 게다. 2막의 내용은 이를 다룬다. 프랑스의 시골 마을. 주유소를 경영하는 마르탱가의 부친이 글로벌한 현대사회를 한탄한다. 이어 아이들은 선거에 입후보하려 한다. 두 명의 아이는 모두 8월 4일에 태어났다(이들은 봉건적인 특권을 폐기한 1789년 7월 8일, 즉 프랑스 혁명의 자식들이다). 아이들은 선거권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에 한 아이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중에 프랑스 부채의 30%를 아이들이 짊어지게 될 터인데 왜 아이들이 선거를 할 수 없나요?”. 틀린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권리는 미래형으로 말해져야만 한다. 그렇다고 고다르의 아이들이 국가권력을 찬탈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다르가 80년대 이래로 꾸준히 제기하는 바, 국가는 언제나 독존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규칙을 강요하고 국민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세계 또한 그러하다(글로벌화, 자본의 국제화와 자유로운 이동, 유럽연합의 추구 등등). 하지만, 소셜리즘의 개인의 꿈은 둘이서 함께 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다르에게 예술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규칙에 저항해 언제나 예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가의 권리는 없다

영화의 크레딧에는 「TEXTOS」 「VIDEOS」 「AUDIOS」라는 특별한 단어들이 나온다. 각각, 문장, 영상, 음악의 출처들을 밝히는 부분으로, 고다르는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앙리 베르그송, 크리스타 볼프, 자크 데리다의 텍스트들, ECM의 음반들(90년대 고다르는 만프레드 아이셔와의 협력으로 ECM 음반들을 자유롭게 영화에 쓸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에이젠슈테인, 로셀리니, 안토니오니, 존 포드, 파솔리니 등의 영화를 인용한다. 고다르식 인용이란 기존의 텍스트를 새로운 맥락에서 재사용하는 것으로 원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에 있다. 특히 3막에서 영상들의 배치는 이러한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고다르적 인용은 또한 예술의 소유권이라는 관념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시도이다. 고다르가 인터넷의 불법다운로드를 규제하는 저작권법인 프랑스의 아도피법에 반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고다르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이나 과학에서의 인용은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반면, 영화에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노먼 메일러의 헨리 밀러에 관한 책은, 거의 80퍼센트가 헨리 밀러의 것이고 단지 20퍼센트만이 그의 글이다. 과학자들은 동료가 고안한 공식을 이용하는데 로열티를 지불하는 법이 없다. 단지 영화만이 허용되지 않는다. 작가의 권리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고다르의 주장은 이렇다. 작가는 권리가 없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유의 관념과 무관하다. 그는 만약 보마르셰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내가 피가로를 쓴 사람이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말이 ‘피가로는 나의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고다르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직접 제작한 광고영상(트레일러)에서도 나타난다. 인터넷에 공개된 <필름 소셜리즘>의 트레일러는 모두 여섯 편으로, 그 중 하나만이 통상적인 의미의 트레일러이다. 나머지는 음악과 일부 자막만이 다를 뿐 영화 전체를 고속으로 2분 내외에 보여준다. 이 트레일러들은 저작권이나 통상적인 배급, 광고 마케팅에 저항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필름 소셜리즘>의 마지막은 통상적인 FBI의 경고문(허락을 받지 않은 상영은 법적 제재를 받는다는 문구)에 다음과 같은 자막이 겹쳐지면서 끝을 맺는다. ‘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 정의는 법보다 앞선다’. 이렇듯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은 예술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희망: 소망의 이미지

영화의 3막은 최종장이다. 여기서는 1막과 2막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인물도 스토리도 사라진다. 대신 전쟁과 폭력의 지난 세기의 모습들이 펼쳐진다. 거기에 철학, 민주주의, 비극, 기하학 등의 서양 문명의 근원을 이룬 그리스로 향해진 시선은 최근의 경제위기와 관련해 서양 문명의 임종을 시사한다. 죽음과 마주한 기원의 탐색은 그러나 역사의 가능성인 이후를 말하기 위해 이전의 흔적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그 가운데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의 숙명의 역사가 거론된다. 고다르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빈사상태로 죽어가던 유태인들이 모습의 닮음 때문에 회교도Muslim라 불렸던 것에 착안해, 수용소의 영상 위에 ‘유태인’과 ‘회교도’라는 문자를 교차해 보여준다. 이 둘은 역사 속에서 적대적이지만 또한 닮았다. 둘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이 자막의 바로 전에 고다르는 아네스 바르다의 <아네스의 해변>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해변가에 설치된 서커스 그네를 타는 남녀의 모습이다. 고다르는 이 장면에 코란과 탈무드를 낭송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기입한다. 고다르는 이 장면이 중동의 평화와 관련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라 말한다. “만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이렇게 함께 서커스를 시작하고, 그네를 함께 탈 수 있다면 중동에는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의 개봉시에 <씨네21>에 썼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