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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지아니 아멜리오의 '아이들 도둑'과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 본문

영화일기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지아니 아멜리오의 '아이들 도둑'과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

Hulot 2015.08.02 02:59



 

 

두 편의 '아이들' 영화를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에서 상영한다지난해 베니스 인 서울에서 <용감무쌍 L'intrepido>(2013)을 소개하면서 지아니 아멜리오 감독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작품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그의 전작을 소개하는 일은 아직 요원하지만 이번에 상영하는 <아이들 도둑>을 통해 그의 작가적 세계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베니스 인 서울'에서 소개한 지아니 아멜리오의 '용감무쌍'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  http://cinematheque.tistory.com/434 )

영화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어머니로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한 11살 소녀 로제타와 그의 동생 루치아노가 젊은 경찰에 끌려 고아원으로 호송되어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힘든 현실에 노출되어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경찰이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밀라노에서 시작해 시칠리로 향하는 여정으로 그려진다

아멜리오의 작품은 원제가 암시하듯이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리게 한다내용적으로는 데 시카의 또 다른 두 편의 영화 <아이들이 보고 있다 I bambini ci guardano >(1942) <구두닦이 Sciuscià>(1946)와도 어울린다네오리얼리즘과의 연계를 따지자면 밀라노를 배경으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루키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현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며비전문 배우의 기용과 로케이션의 활용드라마틱한 구조를 넘어선 보고와 산책의 형식이 분명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유산을 느끼게 한다. <자전거 도둑>에서 자전거를 잃어버린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아들의 교감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것처럼 이 영화 또한 경찰 안토니오와 두 아이들의 감정의 교류가 영화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정서이다물론 차이는 있다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자전거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노동자의 삶에서 중요한 물질적 수단이다반면아멜리오의 영화에서 자전거를 대신한 아이들은 물질적 대상도 아니며 반대로 모두가 원치 않는 사회가 버린 이들이다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들을 어떻게 포착하는가이다유일하게 도둑질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영화 후반부프랑스 여행객의 손에 들린 카메라인 것은 사소한 설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이 카메라로 프랑스 여행자들은 소녀의 얼굴을 몰래 촬영했고이들은 나중에 소녀가 매춘에 가담했던 사실을 알고는 동정을 표한다로제타는 이를 거부한다

 

 

 

 

밀라노에서 시작해 시칠리로 향하는 로드무비의 여정은 세 가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영화는 도시에서 바다로, 그리고 열린 공간으로 향한다. 이러한 공간적 이전은 물리적 이전이자 동시에 정신적 이전, 영혼의 순례에 가깝다. 이는 무엇보다 출발점에서의 아이들의 상태에서 그들이 정신과 영혼을 회복해가는 이야기의 설정이다. 아이들이 놓인 환경과의 관계가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에서 열린 자연적 환경으로 확장되어 간다. 그리하여, 여름빛으로 가득한 해변가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아이들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게 될 장면이다. 이는 처음, 밀라노의 아파트, 범죄가 저질러지는 풍경과 사뭇 다르다.

둘째, 이 여정은 그들의 기원, 즉 시칠리가 고향인 그들의 고향, 근원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안토니오의 고향 또한 시실리 근처, 칼라브리아다. 이들이 시실리 해변에서 휴양을 하는 것은 그러므로 의사 가족적 관계, 즉 정서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변은 또한 그녀가 고민하던 문제, 즉 영혼의 순화와 연결된다. 일종의 제의적 여정이다.

셋째, 동시에 이 이동은 이탈리아의 역사, 말하자면 전후 이탈리아에서 시칠리 등 남부에서 북부 공업지대 밀라노로의 이민의 역사, 이주의 역사를 반대의 방향으로 거슬러 가는 것이다. 아이들의 여정은 90년대의 시점에서 이탈리아 역사의 과정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덧붙이지만, 아멜리오 감독 또한 칼라브리아 출신으로, 1962년에 로마로 이주해 텔레필름의 작업을 거쳐 1982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여정은 그러므로 감독의 자전적 여정과 닮았다.

그렇다고 공간의 이전이 풍요로운 것만은 아니다. 여정과 더불어 이탈리아 전역에 놓인 사회의 문제가 겹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범죄적 환경, 로마 테르미니역 근처의 노숙자들, 집시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로제타는 여기서 노숙자의 술을 한잔 몰래 훔쳐 마신다. 게다가 불관용은 도처에 있다. 안토니오의 고향, 칼라브리아에서 친척들이 보이는 불관용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아이의 과거 사실을 폭로하는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들. 사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갈 곳이 없다. 칼라브리아에서의 불관용은 마찬가지로 동시대, 알바니아인들의 이탈리아 남부로의 대량이주의 역사와도 맞물린다. 1994년작인 <라메리카>는 알바니아 이민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모든 뛰어난 영화가 그러하듯 우리는 다른 잠재성의 순간들을 지켜볼 수 있다. 가령, 아이들의 만남. 그들만의 방식의 시선의 아름다운 교환의 순간이 있다. 가령, 가령, 아이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수녀원에서 동생 루치아노가 천천히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교실을 둘러보고 병원에 혼자 누워 있는 여자아이인지 남자애인지 알 수 없는 병약한 아이와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병실의 아이는 손거울을 보며 혼자 노래를 부른다. “나는 아주 작은 물고기를 보았네.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더러운 물에 병들었지만, 병원에는 그 물고기를 위한 방이 없었다네.” 루치아노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도둑과 연결되는 것이 카메라인 것은 꽤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본다, 만난다, 마주한다와 대비되는 것이 카메라와 연결된 사진의 이미지들이다. 그것은 처음 잡지에 실린 아이들의 모습이다. 로제타는 사진을 극도로 거부한다. 보도에는 아이들에 대한 묘사의 추악함이 있다. 영화는, 원래 실제로 신문에 실린 십대 매춘에 대한 아이의 사진에서 촉발했다. 영화에서 잠깐 잡지의 커버가 나오기도 한다. 아멜리오의 시도는 아이의 존엄을 회복시키고 그녀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되돌려주는 것에 있다. 그것이 이 여정의 진정한 목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여정은 아이로 향한 관음증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로제타는 단지 매춘을 했다는 과거적 사건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이 아닌 잡지의 퍼블릭한 이미지에 감금되어 있다. 관음증의 시선, 불관용의 시선, 매스미디어의 퍼블릭한 선정적 시선에서 벗어나 감독은 아이의 (도둑질 당한)이미지를 되돌려주려 한다. 아이에게(혹은 아이를 바라보는) 정당한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러니 사회적 차원의 해결이 결말로 제시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로 향한 물리적 폭력과 사회적 불관용의 시선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두 아이가 진정으로 함께하는 순간을 영화의 마지막에 보게 될 것이다.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는 아멜리오의 영화와는 다른 방향에서 아이들을 담아낸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보다는 그에게는 몸짓을 그려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목할 만한 롱테이크에서 요점은 테크닉이 아니라(물론 타무라 마사키의 촬영은 그 자체로 뛰어나다 할 수 있다. 그는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의 촬영감독이자,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즈카 시리즈의 다큐를 촬영했던 장인이다), 그 긴 지속에 담긴 아이들의 실존이다. 서툴러도 상관없다. 흔들려도 상관없다. 움직임의 지속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얼굴을 분별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는 개별화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몸짓들, 움직임의 긴 여정을 무엇이라 말해야만 할까?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지리적 여정을 거듭하고, 유괴당한 아이를 찾겠다지만, 이 여정은 그 목표와는 상관없이, 가능한 방향의 모든 흔적들을 탐사한다. 부모와 가족이 사라진, 마찬가지로 아이 같은 야쿠자 어른들은 어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없는 세계를 통과해나간다




영화의 긴장은 매번 아이들의 서투른 분노에서 나오는데, 이는 80년대 동시대 액션의 설계와는 사뭇 다른 길이다. 가령, 숏들의 연결에서 나오는 폭력의 리듬을 대신하는 것이 그 반대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소마이 신지의 관심은 인물의 실존, 그가 놓인 상황, 그리고 시간을 거듭해가는 변형의 과정, 말하자면 변형의 지속을 담아내는 것에 있다. 클로즈업과 컷 어웨이, 혹은 명상적 장면들 대신에 끈질긴 롱테이크가 있다. 이는 우아한 안무와는 사뭇 다른, 장애물을 뛰어 건너야만 하는 허들 경주자의 몸짓처럼 끈질기게 이어가는 액션이다. 서투르지만 어떻게든 이어가는 지속의 몸짓. 여기에 예기치 않은 행동들과 갑작스런 중단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왜 아이들은 그렇게 뛰고 달리는가? 미지의 무엇이 부르는 육체의 뒤틀림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다른 쪽으로 몸을 움직여 간다. 컷의 반응에서 나오는 액션 게임은 그러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부와 외부의 게임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로 이끌리는 몸의 움직임을 그려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요코하마, 아타미, 나고야, 오사카로 향하는 지리적 여정 외에 장소 밖의 부름, 공간의 흔들림이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중단의 신호에도 장애물을 넘어서서 가려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놀랍고도 고통스런 경험이다.

납치된 아이를 찾아가는 모험이 전시하는 것을 이렇듯 아이들의 특별한 힘의 실천이다. 영화의 몹시 감동적인 순간은 강둑에서 벌어지는 액션신이다. 수차례 아이들이 물에 빠지고 뛰어내린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꾸 던지고 내던진다. 물의 흔들림과 나무들의 진동이 있다. 도달하고, 달리고, 안 빠지려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총격의 순간이 있다. 이 경험이 그들을 변형한다. 통과의례의 긴 시퀀스를 거쳐 그들이 살아남는 것은 결국, 살아가는 것의 신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살아가야 한다. 2014년, 4월 이후,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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