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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유령이 떠돌고 있다 - 그리고, 베를린의 바빌론 키노 본문

베를린 다이어리

유령이 떠돌고 있다 - 그리고, 베를린의 바빌론 키노

Hulot 2020. 2. 2. 17:53

베를린 미테, 로자 룩셈부르크 플라츠역 근처의 바빌론 키노에서 2월 2일 오늘 저녁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무성영화 연주 상영회를 개최한다. ‘바빌론 오케스트라 베를린’의 연주로 열리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바빌론 극장이 지난해 개관 90주년을 맞아 설립한 무성영화 전문 관현악단이다. 16-21명의 전문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다.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해에 소니센터의 ‘아스날 키노’만큼이나 가장 자주 갔던 곳이 이곳 바빌론 키노이다. 극장 로비에 앉아 벡스 맥주를 마시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아스날 키노의 프로그램들도 마음에 들긴 했지만, 사실, 잘 꾸며진 현대식 건물의 극장보다는 오래된 이런 극장들이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베를린 도처에 있는 요크 그룹의 유서싶은 극장들, <아토믹 블론드>에 나온 키노 인터내셔널, 혹은 베를린 동물원 근처의 대형극장이나 인디 키노 계열의 극장들 스무 곳 이상을 자주 들렸지만 어떨 수 없이 바빌론 키노에 마음이 끌렸다. 불편한 좌석으로 관객들의 불평도 많았지만 10년을 있었던 낙원의 극장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것처럼. 단지 극장의 분위기의 건축학 때문만은 아닌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 원래 극장의 이상이 아니던가. 바빌론 키노의 건너편에는 폭스뷔네라고 해서 인민극장 건물이 있는데, 이 인민극장은 노동자 교육의 일환으로 노동자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다. 폭스뷔네에는 "Die Kunst dem Volke”라는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 앞의 아무렇게나 방치된 넓은 잔디에 누워 젊은이들은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무튼 1929년에 무성영화 극장으로 개관한 바빌론 키노는 원래는 1200석의 단관이었지만, 지금은 400석에 달하는 무성영화를 상영하고 연주하는데 최적화된 1관과-아르 데코 네오 이집티안 스타일의 1921년 개관한 파리의 룩소 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두 개관을 보유한, 여전히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에 속한다. 동독에 속했던 극장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한동안 방치되다가 독일 연방정부의 지원아래 513만 유로를 들여 리모델링을 했고, 지금은 프로그램 상영과 예술영화, 무성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고 있다.
바빌론 키노에서는 매주 토요일 12시에 ‘NULL Uhr – NULL Euro’라는 모토를 내세워, 이른바 영화 올빼미족을 위한 ‘영시, 영유로’의 무성영화 무료 연주상영이 열린다. 매주 토요일마다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공원산책 만큼이나 베를린에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는데, 12시에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어떤 날은 연주자가 상영시간 즈음에 느릿느릿 역에서 걸어오기도 해서, 대체로 12시 정각에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극장 앞에서 벡스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떤 날은 이십대의 젊은이가 다짜고짜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이어 에른스트 루비치를 아나며 이 극장 근처에 루비치가 살았다고도 했다. 극장 입구에 ‘루비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극장 안 객석에 루비치 동상이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 했다. 어느 날은 담배를 피다가 청소를 하던 영사기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녀는 바빌론 극장의 과거 1930년대 영사기사가 나치에 저항하는 비밀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다 체포되었다는 과거사를 말한다. 당시 극장에서는 나치 선전영화를 상영했고, 스크린 뒤에 유대인 가족이 숨어 있고, 영사기사가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니, 비록 파리 극장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타란티노의 <바스터즈>의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나온김에 말하자면, <바스터즈>의 극장 장면들은 파리가 아니라, 여름 별궁 상수시로 유명한 포츠담의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에서 촬영됐고, 극장의 영사실은 포츠담 영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 촬영 당시의 장면들도 살펴볼 수 있다.


바빌론 키노에는 앞서 언급한 전속 연주자 안나 바빌키나가 있는데, 그녀는 필립스사가 제작한 극장 왼편에 있는 오르간을 자유자재로 연주한다. 시크한 이 연주자는 팬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에도 손짓을 한번 정도 휘저을 뿐 어떤 감정을 내비친적이 없는데, 심지어 연주가 있던 날 관객들이 준비한 케이크와 깜짝 생일축하 노래에도 인사만 한 번 하고 오르간 앞에 앉아 묵묵히 연주만 했을 뿐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연주를 위해 극장에 올때의 예의 도도한 걸음 그대로 누구와도 인사 한번 안건네고 룩셈부르크역 저 멀리로 사라지곤 했다. 내가 볼 때만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태도와 연주는 특별한 인상으로 남았다.

베를린의 극장들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른 기회로 미루고 싶다. 말을 꺼낸 이유가 2월 4일 15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으로 로베르토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피아노 연주상영을 하기 때문이니. 영화는 “유령이 있어요. 어디서나 그들은 우리 주위에 있어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영화사가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는 특정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영화가 공개되던 무렵인 1920년에 뮌헨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창당 집회가 열렸고, 여기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 강령을 선포했다. 가령 4조의 내용, “게르만 민족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 종파에 관계 없이 게르만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은 민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며 배제를 분명히 했다. 집단적인 공포와 편집증적인 분위기, 당시 독일인의 독특한 내적 독백이 칼리가리라 지적한 것은 크리카우어였다. 현실이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없게 된 때의 불안. 당시 독일인들은 단순히 정치 선전과 공포의 결과로서가 아닌 쉽게, 전체주의적 지배에 순응했다. 그것은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이런 기묘한 수용 태세는, 어떤 합리적 의심보다 강력한 심리적 성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른바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칼리가리의 유령이, 이런 경구가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Du Musst Caligari Werden!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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