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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카메라가 혁명을 만나다 -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 Joris Ivens Retrospective 본문

영화일기

카메라가 혁명을 만나다 -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 Joris Ivens Retrospective

Hulot 2021. 5. 27. 22:38

 

코로나 감염확산으로 미뤄졌던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이 마침내 6월 9일부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립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요리스 이벤스가 열 네살에 만든 <불타는 화살>을 포함해 <다리>, <파도>, <비>등의 초기 단편에서 <필립스 라디오>, <콤소몰-영웅의 노래>, <스페인의 대지>, <미스트랄>, <위도 17>,그리고 유작 <바람의 이야기>까지, 그동안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던 영화를 포함해 모두 스물 다섯 편의 영화를 상영합니다.

 

카메라로 바람을 길들인 혁명가 


요리스 이벤스의 <바람의 이야기>(1988)는 기존의 다큐멘터리와는 사뭇 다른 사실과 허구를 조합한 독특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80년에 구상을 시작해 4년간 중국에서 촬영한 영화로 결국 망백의 나이였던 요리스 이벤스의 유작이 되었다. 이벤스는 <바람의 이야기>로 격동의 한 세기를 마감했고 자신의 영화 인생 또한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바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대단히 이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카메라로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만한 것들을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진력한 작가였으며, 바람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혁명의 바람을 타고 세계를 돌아다닌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이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요리스 이벤스는 불가능한 것을 찍는 작업을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 여겼다. 바람과 중국, 대지의 숨결과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 이 둘은 이벤스의 삶에서 가장 친근한 대상이었다. 그는 바람의 기운을 타고 세계의 국경을 넘어다녔고, 장르의 경계, 진실의 경계, 그리고 영화 그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런 점에서 요리스 이벤스는 ‘위대한 월경의 작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노래
요리스 이벤스가 끊임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도록 바람을 불어넣은 것은 물론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의 혁명적 기운이었다. 이벤스의 움직임은 20세기 격변의 역사와 맥을 같이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그의 카메라에는 지난 세기의 정치, 문화, 역사, 노동, 그리고 자연이 담겨져 있다. 탁월한 여행자였던 그를 두고 혹자는 ‘심미적인 서정 시인’이라 부르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정치적인 대변자’ 또는 ‘혁명가’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벤스의 영화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오손 웰스와 헤밍웨이가 내레이션을 맡은 <스페인의 대지>(1937)는 ‘전쟁 르포르타주’라는 새로운 형식을 빌어 스페인 내전을 다룬 경이적인 영화이며, <다리>(1927)와 <강의 노래>(1954)는 인상주의에 근거한 전위적인 영화의 대표작이며, <발파라이소>(1963)나 <센느가 파리를 만나다>(1953)는 도시의 일상에 관한 에세이이자 분석적인 다큐멘터리이고, <위도 17도>(1968)와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1967) 같은 작품은 죽음을 무릅쓰고 촬영한 혁명적인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이런 대조적인 성격의 다큐멘터리의 근원에는 늘 대지와 역사의 숨결에서 시대의 바람을 읽어내려는 이벤스의 열정이 숨어 있었다.
요리스 이벤스는 사진가인 아버지로부터 들은 “아마추어 사진작가는 찍는 소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대중의 악취미의 굴레에 빠질 염려가 없다”는 말을 젊은 시절 신념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1920년대 당시 좌익 전위파의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서 제르멘 뒬락과 같은 아방가르드 감독들과 만나면서 전위영화 운동에 심취했고 이후 좌익 혁명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는 기술적 변화에도 관심을 보여 놀라울 정도로 작고 휴대성이 뛰어난 키나모(Kinamo) 카메라로 영화제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고, 1920년대 말, 움직임이 없는 다리에서 역동적인 리듬을 끌어낸 <다리>와 암스테르담에 내리는 비에 관한 한 편의 도시 교향악인 <비>(1929) 같은 다큐멘터리로 전위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이어 1931년에는 네덜란드 최초의 유성영화이자 필립스사의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담은 <필립스 라디오>(1931)를 통해 20세기 초의 산업 사회의 진보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기술에의 관심은 이탈리아 관영 석유 회사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이탈리아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1960) 같은 작품에서 또한 엿보인다.

 


요리스 이벤스가 영화에 빠져들던 20세기 초, 영화는 군중, 조직화된 인간 집단, 산업 사회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오직 영화만이 이런 현대 사회의 변화를 기록하고 산업화와 도시화, 대중의 등장을 이미지 안에 흔적으로 기입할 수 있었다. 영화에 의해 파악된 군중은 근대의 특징인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탄생한 ‘대중’이었는데, 영화는 이 대중을 사회주의 이상에 구체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혁명적 대중(소비에트), 대량 생산 대량 소비와 도시적 생활 방식을 체현한 대중(미국),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열광하는 대중(독일)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벤스는 이런 국가 중심적 영화의 전진과는 상반되는 길을 탐험했다. 그는 20세기의 대중, 하지만 억압받고 고통받는 대지의 민중들에게 자신의 카메라를 향했다. 이는 산업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발전과 더불어 진행된 영화의 불균등성에 대한 이벤스 자신의 도전이기도 했다.
20세기 초의 신 발명품이었던 영화는 이 시기 미국, 프랑스, 독일, 소련, 혹은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군림하고 있었다. 영화는 이러한 열강 국가들에 의해 제도화되고 도용되어 대중을 통제하고 있었고, 신음하는 세계의 다른 부분들은 비가시적으로 은폐되어 황홀한 빛을 감싸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요리스 이벤스는 이런 제도화된 영화와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탈도구화’하는 데 관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카메라가 이 격변의 20세기 어느 장소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비록 그의 정치 사상이 영화 제작을 향한 열망과 동시에 진화했지만, 변화의 이미지는 소비에트 여행과 <필립스 라디오> 이후 산업 발전에 대한 매혹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열정을 결합시킬 기회를 얻게 되면서 시작한다. 첫 소련 여행의 결과로 그는 소련에서의 영화 제작을 의뢰받았고, <콤소몰-영웅의 노래>를 통해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시대의 바람을 타고 달려간 곳은 당대 가장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스페인, 그리고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신음하던 중국이었고, <스페인의 대지>와 <4억의 사람들>(1939)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곤경에 처한 민중의 고통을 보여 주었다. 다큐멘터리는 물화된 대중에 순응하던 극영화를 거부하며 영화 산업에 대항하던 전위파 작가인 이벤스의 유일한 무기였다.

 


정열에 근거한 신념
요리스 이벤스는 1950~60년대에 중국, 쿠바 등의 사회주의 국가를 돌아다니며 사회주의 진보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 시절 이벤스가 만든 일련의 다큐멘터리 작품 속에는 약소국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인간들이 담겨 있다. 특히 이벤스는 아시아와 남미 국가의 사회주의 혁명에 고무돼 있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에 카메라를 무기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1964년 아옌데에 대한 지지를 담은 <승리의 기차(Le Train de la victoire)>(1964)나 베트남에 대한 일련의 다큐멘터리인 <위도 17도>,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와 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 이벤스의 정치 참여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물론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벤스는 좀 더 서정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센느 강변을 배경으로 강을 산책하고 일광욕을 즐기고 수영을 하는 파리지앵들의 일상을 그린 <센느가 파리를 만나다>, <발파라이소>, <미스트랄>(1965)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위도 17도>는 이벤스가 처음으로 16mm 동시 녹음 카메라를 사용해 만든 영화로, 미디어를 통해 최초로 전쟁의 상황이 보도되던 시절 텔레비전과 달리 직접 베트남의 현지에 뛰어들어 시대의 진실을 카메라에 담아낸 혁명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의 군사 경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열됐고, 1965년부터는 미국이 베트남을 향한 폭격을 개시했다. 전쟁 초기 이벤스는 베트남인 스태프들과 함께 북위 17도선 경계 지역의 작은 마을에 들어가 미국의 폭격과 그곳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기록했다. 이는 텔레비전에 의해 비가시권으로 밀려나 있던 베트남 민중들의 실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금 보아도 놀라운 작품이다. 지하 10m의 굴에서 3개월간 혁명 전사들과 생활하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이 영화는 단순히 현실의 충실한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생활하며 시간을 들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러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진전과 희망에 복무하려 한 이벤스의 열정에 근거한 신념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종종 이벤스의 다큐멘터리를 두고 객관성을 상실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활력과 감동이 순수하게 그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알게 되겠지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에는 20세기의 역사가 담겨 있다. 영화가 탄생하던 1898년에 태어나, 청년기에 러시아 혁명을 겪었고, 사회주의의 붕괴 직전에 바람처럼 대지에서 사라진 그는 마치 역사와 더불어 삶을 마감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벤스가 영화의 무대로 삼은 세계는 격변을 겪었던 20세기의 대지였다. 그는 혁명의 기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카메라에 세기의 희망과 절망을 담아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세기 격변의 시기에 사람들에게 비가시적이고 은폐되어 있던 대지와 민중의 얼굴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무기였다.
<위도 17도>에서 반미 항전을 벌이는 베트남 민중들에게 전달되어 읽히는 신문마냥 그의 영화는 세계 곳곳에 혁명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매체였다.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문서이자 기록이 되어버린 그의 작품과 만나는 것은 그래서 대단히 뒤늦은 일이긴 하지만 20세기의 역사가 아직 우리에게 전달하지 못한 소식과 진정으로 대면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보이지 않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내려 했고 바람의 기운을 제어하려 했다. 이벤스의 유작인 <바람의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 노인은 1898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바람을 길들이려 했다. 카메라를 든 그가 본 것은 우리 시대의 폭풍 같은 역사였다. 우린 바람을 찍는 데 미쳐 있었다. 불가능을 찍은 것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기에. 난 평생 바람을 길들이려 했다. 바람이 불면 알게 되겠지. 우린 카메라로 바람을 길들이게 될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2004년 6월, 일주아트하우스에서 개최한 첫 번째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에 맞춰 당시 영화잡지 『필름2.0』에 게재한 기사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헬렌 반 돈젠 Helen van Dongen(1909. 1. 5 ~2006. 9. 28) 


요리스 이벤스의 초기 다큐멘터리의 성공 뒤에는 헬렌 반 돈젠이라는 창의적인 여성 편집자의 협력이 있었다. 그녀는 초기 다큐멘터리 세대에게 깊은 인장을 남긴 선구적인 영화 편집자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예술의 위대한 공헌자이다. 1909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그녀는 십 대의 나이에 사진/광학 회사인 CAPI에 취직했고, CAPI의 기술부 책임자였던 요리스 이벤스와 만나 <다리>(1928)와 <비>(1929)의 제작에 참여했다. 그녀는 이벤스와 함께 네덜란드 시네클럽을 설립했고, 영화제작자 동료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발전시켰고, 사운드가 도래하자 파리와 베를린의 UFA 스튜디오에서 사운드와 영화 편집을 배웠고, 이어 모스크바에서 에이젠슈테인, 베르토프, 푸도프킨과 함께 공부하며 편집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후 이벤스와 함께 <보리나주>(1934), <스페인의 대지>(1937), <4억의 사람들>(1938), <전력과 대지>(1940) 등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그녀의 복잡하고 창의적인 사운드 작업은 이후 로버트 플래허티와 함께한 <땅>(1942)과 <루이지애나 스토리>(1948)와 같은 작품으로 확장되었다.

 

이벤스와 인도차이나, 베트남, 그리고 중국

 


요리스 이벤스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이어 변화의 열정을 불태워 자신의 이상, 즉 사회의 진보와 약소집단을 향한 억압에 반대하는 메시지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자 다음 해 이벤스는 중국에 건너가 로버트 카파와 합류해 <4억의 사람들>(1939)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공포와 절망, 인간의 비참과 용기, 전투, 사망자, 황폐화된 대지 등 전쟁의 모든 국면을 보여준다. 이후, 네덜란드 정부의 임명으로 동인도 영화감독관으로 부임한 이벤스는 네덜란드 정부가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자 그 자리에서 사임한 뒤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네시아의 목소리>를 제작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정부와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했으며, 1985년에야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1964년, 이벤스는 베트남을 첫 방문했고 새로운 정치적 열정에 이끌려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또한 베트남 영화 산업을 위해 장비를 기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 현지에서 직접 영화 작업을 시도한 유일한 감독으로, 고다르, 바르다, 마르케 등과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의 제작에 참여했으며 미군의 폭격이 쏟아지는 최전방에서 <위도 17도>(1968)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대지>처럼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공격해 오는 적들과의 투쟁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의 목소리> 이후 1957년까지 동독에서 영화를 제작한 이벤스는 이후 프랑스에서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을 만들었고, 1958년에는 베이징 전영학원에서 일하면서 영상시 <중국에서 온 편지>(1958)와 이른 봄과 문화혁명 이후의 삶을 탐구한 12시간에 걸친 대작 <우공이산>(1976)을 만들었다. 중국은 그의 마지막 영화 <바람의 이야기>(1988)의 배경이기도 했다.

 

카메라가 혁명을 만나다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 Joris Ivens Retrosepctive

6월 9일(수) ~ 27일(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발파라이소(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