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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무성영화 시대의 스필버그 - 해롤드 로이드 본문

영화일기

무성영화 시대의 스필버그 - 해롤드 로이드

Hulot 2023. 3. 18. 10:02

해롤드 로이드의 영화를 상영했던게 시네마테크의 낙원시절인 2007년 이맘때다. '미국 무성영화의 위대한 배우들'이란 제목의 특별전에서 해리 랭던, 버스터 키튼의 작품들과 함께 해롤드 로이드의 영화를 상영했다.  

 

미국 무성영화의 위대한 배우들' 특별전은, 후일 거장이 되는 프랭크 카프라 등과의 협업으로 천진무구한 개구쟁이의 이미지로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빈 초기 영화의 스타 해리 랭던, 루이스 부뉴엘이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마저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던 아크로바틱 개그의 위대한 배우 겸 감독 버스터 키튼, 그에 버금가는 속도와 서스펜스를 주특기로 채플린처럼 페이소스 넘치는 현대인 상을 그려낸 해롤드 로이드의 출연작들을 소개하는 귀한 기회입니다. 또, 이번 특별전에서는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릴리언 기쉬라는 걸출한 할리우드 빅스타들이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 라울 월쉬 등의 대가와 함께 작업한 걸작들도 함께 소개됩니다. 
- "특별전 - 미국 무성영화의 위대한 배우들" : 2007.03.13.Tue - 03.25.Sun

 

2007년의 특별전에서 상영한 해롤드 로이드의 작품은 <마침내 안전!>(1923), <신입생>(1925), 그리고 <스피디>(1928), 이렇게 세 편이었다. 모두 35mm 필름으로 상영했다. 시간이 흘러, 이번 '자크 타티 회고전'에서도 해리 랭던을 포험해 로이드의 영화를 몇 편 더 상영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필름으로 상영하던 그 시절보다 상영이 쉽지 않다. 아쉽지만, 이번 회고전에서는 <마침내 안전!>(1923) 한 편만을 상영한다. 2007년 특별전을 개최할 때 해리 랭던과 해롤드 로이드의 작품을 소개하며 짧은 글을 썼는데, 이번 회고전을 맞아 오래된 글이지만 다시 소개한다. 

 

미국 무성 코미디의 두 배우- 해리 랭던과 해롤드 로이드 

 

수줍은 어덜트 베이비 - 해리 랭던

 

해리 랭던이란 배우에 대해서는 사실 ‘미국 무성영화의 위대한 배우들 특별전’의 기획자로서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약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예외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발견’의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해리 랭던의 영화를 보라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채플린과 키튼, 로이드의 익살희극을 본 경험이 있는 관객들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제안이다. 달리 말하자면 해리 랭던의 독특함은 채플린, 키튼, 로이드와 비교할 때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쿵, 쿵, 쿵>을 (비디오가 아니라)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면 정말 해리 랭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다. 랭던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관객을 질리게 할 만큼의 어눌하고 느릿느릿한 행동을 초지일관 보여주면서 유아적인 순수성을 표현한다. 그는 일종의 ‘어덜트 베이비’와도 같은 캐릭터를 소화한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박차고 나온 해리 랭던은 집 문 앞에서 마치 세상에 던져진 어린 아이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오른쪽 길로 가려다 다시 돌아서 왼쪽 길로 움직이고, 다시 되돌아와 집 앞에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한참을 고심하다 침을 손바닥에 뱉어 점을 쳐서 떠날 방향을 결정하려다 결국 한 남자의 여정을 아이처럼 쫓아가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이 모든 장면이 단지 하나의 컷으로 이뤄져 있다.

 

다른 장면에서 해리 랭던은 이런 유아적인 특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 해리 랭던은 광고판의 여자사진을 쳐다보다 갑자기 자신 곁에 그녀가 서 있음을 깨닫고는 안절부절 못해 벤치에 앉았다, 일어났다, 여자를 쳐다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저 멀리에 숨었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뒤로 숨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일어서 그녀의 곁에 다가 선다. 이 장면 또한 고정된 카메라로 지속시간이 긴 숏으로 표현돼 있다. 1920년대라는 속도의 시대에 순진무구한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하게, 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여자에게 윙크하기 위해 얼굴표정을 변화시키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릴 법한 인물이 바로 해리 랭던이었다.

 

다른 장면에서 그는 우연히 수면제를 먹게 되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잠이 드는 순간을 정말 코믹하게 연기한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데 그의 눈꺼풀이 감기면서 잠에 드는가 싶더니, 다시 소스라치게 놀라듯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서서히 눈이 감기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결국은 침실의 바닥에 쓰러지듯 고꾸라져 잠들어버린다. 아이들이 졸 때 보여주는 표정과 제스처 딱 그대로를 연기하고 있다.

 

랭던의 캐릭터는 자신이 벌이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지 못한다. <쿵, 쿵, 쿵>에서 레이스에 참가한 랭던은 딴 짓을 하다 엉뚱한 길에 들어서는데 거기서 수많은 양떼에 둘러싸여 탈출구를 찾는다. 그러다 ‘출입금지’라는 표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벽의 문을 넘다 낭떠러지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때 그의 옷이 우연히 문의 못에 걸려 추락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게 된다. 그는 이 순간 아주 천천히 대담하게도(혹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내 문에 박힌 못을 빼내 자신을 지탱하는 옷에 못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씩 못을 문짝에서 빼낼 때마다 문짝이 휘청거리기 시작하다 결국 그는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쳐진다. 이때의 추락액션 장면은 마치 버스터 키튼의 <일곱 번의 기회>의 돌을 피해 계곡을 뛰어 내려가는 키튼의 그 유명한 액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물론 결과는 사뭇 다르다. 우연치 않게 벼랑 아래로 떨어진 문짝이 레이스의 길을 가로막아 우연히 그는 레이스의 선두에 서게 된다. 랭던의 코미디를 결정하는 법칙은 이렇듯 신의 가호가 함께 하는 우연의 법칙인 것이다.

 

해리 랭던은 ‘웃음제조공장’인 맥 세네트의 ‘키스톤 영화사’가 발굴한 배우였다. 그는 영화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보드빌 최고의 연기자’라는 유명세를 치렀고, 이어 ‘채플린을 능가하는 위대한 코미디 배우’로 포장돼 영화계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 전례 없는 작은 체구의 느릿느릿한 배우와 함께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감독은 별로 없었다. 그를 구제한 사람 중의 한 명이 프랭크 카프라였다. 카프라-랭던 콤비는 꽤나 어울렸는데, 무엇보다 카프라가 랭던에게서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카프라의 <강자>에서 랭던의 캐릭터는 도덕 이전의 단계로서의 아이의 부주의한 방종과 파괴적 행위, 공격적인 여인으로 표현되는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소심증, 부조리함, 진한 메이크업의 표면 아래 가려진 멜랑콜리를 극명하게 표현한다. 랭던은 사실 부조리한 사회에 겁을 집어먹은 수줍고 어두운 인물이었던 셈이다. 프랭크 카프라는 그런 랭던의 유일한 협력자가 ‘신’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가 침묵의 마법에서 풀려날 때 신은 랭던의 편이 아니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필버그 - 해롤드 로이드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서도 해롤드 로이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오해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채플린이나 키튼보다 그가 덜 유명하고 관객들에게 덜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라는 시대를 고려할 때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오해라 할 수 있다. 채플린이 이 시기에 단지 1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면 로이드는 대략 25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키튼의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했던 것과 달리 그는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얻었다.

 

이를테면 1924년에 미국에서 발간한 ‘팬 매거진’의 설문조사를 보면 키튼이나 채플린을 제치고 배우투표에서 ‘탑10’에 오른 유일한 코미디 배우가 해롤드 로이드였다. 신기한 것은 배급업자들이 꼽은 영향력 있는 배우 ‘탑10’에서는 해롤드 로이드가 글로리아 스완슨, 루돌프 발렌티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메리 픽포드와 같은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이 차이는 코미디 배우들이 흥행결과와는 무관하게 고전적인 스타들에 비해 저열한 평가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혹독한 고통을 감수하는 배우들을 어찌 천상의 자리에 위치시킬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돈 잘 버는 배우였다. 1927년 미국오락산업의 가장 부유한 인물 스무 명을 조사했을 때 유일하게 배우로 20위 안에 꼽힌 인물이 해롤드 로이드였다. 그는 1920년대 가장 부유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코미디 배우였다. 해롤드 로이드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티븐 스필버그였던 것이다.

 

1920년대 무성코미디를 보고 있으면 이 시기에 기존의 슬랩스틱 전통의 물리적 코미디에 어떤 변경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익살희극이 두 릴짜리 단편에서 장편으로 변화하면서 이제 코미디는 이야기와 인물, 적절한 시추에이션을 필요로 했고 점점 현실, 혹은 실제 세계에서 가능한 인물들과 결합을 시도해야만 했다. 해롤드 로이드는 변화의 시대에 채플린이나 키튼보다 아주 영리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변화시킬 줄 알았고 그것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1918년에 로이드는 자신의 코믹 페르소나에 변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전의 어릿광대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뿔테 안경을 쓰고 중산계급의 노동자 청년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1920년대 그는 안경을 쓴 우등생 타입의 산뜻한 슈트를 맵시 있게 입은 청년의 모습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채플린보다 마임 연기에 뛰어나지 않았고 키튼보다 아크로바틱에 덜 능숙했던(하지만 그가 <마침내 안전!>이나 <스피디>에서 보여주는 표현적 몸짓과 곡예에 가까운 액션은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 그는 <도깨비 유령>이란 영화에서 촬영도중 소도구의 폭탄이 폭발해 오른쪽 손가락을 잃었지만 <마침내 안전!>에서 빌딩을 올라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로이드가 익살희극에서 나름대로 갖고 있었던 장점은 그래도 견실해 보이는 마스크에 패기 있는 젊은이를 연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금은 젊은 시절의 우디 앨런을 떠올리게 하는 뿔테 안경을 낀 이 청년은 이빨을 내보이며 채플린과는 다른 도회적인 웃음을 선보인다. 그는 영화가 대중을 필요로 하기에 대중의 욕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익살희극의 주인공이 무엇보다 대중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웃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배우다. 대도시에서 택시와 전차를 몰고(<스피디>), 마천루 빌딩을 기어오르고(<마침내 안전!>), 대학 생활과 미식축구를(<신입생>) 즐길 줄 알았던 인물. 그 곁에는 늘 거대한 대중이 있었다.

 

<마침내 안전!>은 로이드의 이런 특징을 아마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로이드는 우연치 않게 마천루를 기어오르게 되는데, 한 층 한 층 그가 빌딩의 외벽을 기어오르면서 새로운 사건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위층에서 누군가 흘린 팝콘이 그의 양복 안으로 들어가면서 비둘기가 그에게 달려들거나, 열린 창문으로 무서운 개가 짖어대는 통에 그는 시계탑에 가까스로 매달리게 된다. 2층까지만 오르려 했던 로이드의 시도가 결국 마천루의 옥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속사정이야 어떻든(대중들은 그를 빌딩을 기어오르는 ‘신비한 사나이’로 여긴다) 지상에서 그를 쳐다보는 대중들의 성원과 갈채 때문이었다. 층이 더 높아질수록 공포와 위험은 더해가지만 웃음과 대중들의 갈채는 더 커진다. <슈퍼맨>의 피터 파커와 같은 존재가 무성영화시절의 배우 해롤드 로이드였던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