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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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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대만 뉴웨이브가 남긴 것

Hulot 2008. 6. 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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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가능성과 희망을 쫓다

2005.09.14 / 김성욱(영화평론가)

* 마찬가지로 2005년 '대만영화제'에서 참석한 허우 샤오시엔, 차이밍량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 개별적인 만남등을 바탕으로 당시 열렸던 영화제에 관해 썼던 글입니다.  


허우 샤오시엔과 차이밍량 감독이 '대만뉴웨이브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기자 회견, 마스터클래스, 심포지엄 등에 동행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두 감독과 대만 뉴웨이브의 오늘을 말한다.

지난 8월 24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대만뉴웨이브영화제’에서 가장 기대했던 순간은 허우 샤오시엔과 차이밍량을 만나는 일이었다. 각종 영화제를 통해 두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다. 이번 영화제는 대만영화의 상징적 작품들을 차분하게 관객들에게 소개할 기회였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들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로부터 대만 뉴웨이브의 비밀을 들을 수 있을까? 미리 말하자면 나는 3일간의 만남을 통해 영화에 관한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듣고 싶지 않았거나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두 감독에게 영화는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내게 남은 것은 어떤 경험과 교훈이다. 그것은 '영화는 현실'이라는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진실이었다.

영화는 실제로 간단하다

8월 27일 오후, 허우 샤오시엔과 차이밍량이 서울에 도착했다. 허우 샤오시엔은 파리에서 대만을 거쳐 프랑스 영화 비평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를 대동하고 서울에 도착했다. 피곤한 기색이었던 그는 인사동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끝낸 뒤 바로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다. 몇몇 관객들은 검은색 점퍼에 모자를 눌러 쓰고 가방을 어깨에 멘 그를 김기덕 감독과 혼동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사회로 진행된 ‘마스터클래스’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자신이 체험한 사실과 체험에 근거한 내용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허우 샤오시엔은 관객들에게 삶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진정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만 뉴웨이브에, 허우 샤오시엔에게 영화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이 질문에 그는 ‘망고나무 이야기’로 답했다. 유년기, 허우 샤오시엔은 남의 집 망고를 몰래 훔친 적이 있었다. 가지도 많고 열매도 무성한 나무였던지라 동네 아이들의 표적이 되곤 했던 망고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망고를 따서 황급히 도망갔지만, 그는 망고를 따서 일단 배불리 먹고 다시 망고를 한아름 따 집으로 돌아가는 대담성을 보였다. 때문에 그는 종종 무성한 나뭇잎에 몸을 숨기기 위해 나무 위에 머물러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러한 경험이 바로 영화가 주는 전율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바람이 불고, 매미 소리가 들리고, 이런 것들에 예민한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그는 말했다. 허우 샤오시엔에게 영화는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 정서를 확대시키고 또한 응집시키는 것이다. 그는 영화가 우리의 삶을 프레임 안에 담아 보여 주는 예술이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행위하고 움직이는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숨겨진 의미, 즉 심도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풀어내는 풍부한 예화를 듣다 보면 그의 영화가 탁월한 관찰 능력과 순간의 직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대만 뉴웨이브 또한 이러한 특성에서 시작된 것이라 말한다. 대만 뉴웨이브는 '영화가 현실'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이들 영화가 이전과 구별되는 지점은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대만 뉴웨이브는 일종의 실험이었고 끊임없이 현실을 발견하는 영화였으며, 관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뒤로하며 감독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고하는 영화였다.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뒤에도 허우 샤오시엔은 오랜 시간 동안 관객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강조한 요지는 ‘영화에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 너무 많은 정보가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현실과 만나는 새로운 접점이 없다"고 말한다. 영화 또한 그래서 삶과 유리돼 버렸다. 소비 문화와 수많은 정보 때문에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과 관련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석에서 그는 대만과 한국의 ‘영화 합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합작을 하려면 대만영화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그럴 만한 대만영화는 없다. 합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조언을 남겼다. "감독이 되려면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 먼저 행동을 해야 한다. 삶을 실제로 느끼고 관찰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는 실제로 간단한 것이다."

제발 내 영화를 눈으로 보라!

허우 샤오시엔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이야기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면 차이밍량은 선동(!)하는 듯한 열정적인 어조로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차이밍량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 가령 그가 자신의 영화를 대만에서 상영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눈물 겨운 이야기를 여러 기사를 통해 접한 나로서는 그를 만나는 게 무척이나 조심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차이밍량은 영화제 내내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그의 신작 <흔들리는 구름>이 대만에서 13만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차이밍량은 새로운 자신감에 부풀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이밍량은 자신이 오기 전, 한국배우 배용준이 대만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수차례 언급했다. 한류가 아시아를 정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관객들에게 주시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영화관계자들이 한류 때문에 일종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들 경쟁하며 한류와 같은 붐을 아시아에서 일으켜야만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 그런 분위기가 현재 만들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만영화는 매우 활발했는데, 그 이후 점차적으로 대만영화가 자국 시장에서 실패하며 위기가 조성되다 설상가상으로 한류 때문에 현재 몰락 직전에 있다는 것이다. 대만영화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그가 고안한 것은 직접 영화를 들고 관객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프로모션이다. 차이밍량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대만의 거의 모든 대학을 방문했고, 당시 100여 곳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서너 명의 관객이 있는 곳에 가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김소영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마스터클래스’에서 차이밍량은 영화와 관련한 세부적인 문제들을 언급하는 대신 현재 대만영화가 처한 상황과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하기 전 갖은 사전 만남 자리에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분석보다는 시장과 배급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싶다고 말했다. 차이밍량은 영화가 보는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영화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외면당해 왔었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이기도 하다. 가령, 그는 동시대 관객들이 영화가 ‘보는 예술’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신의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알려고 할 뿐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려는 대신 이야기를 알려고 할 뿐이기에 자신의 영화에 대해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 영화의 시사회장은 다른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대부분의 시사회장에서는 영화가 끝난 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있거나 야유가 뒤따른다. 하지만 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대부분 느리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차이밍량은 "제발 나의 영화를 눈으로 보아 달라"고 호소한다. 이런 반응들 때문에 차이밍량은 영화가 무엇이며, 영화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고민한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생활에서 경험한 곤혹스러움과 문제들에서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자신의 영화 안에서 관객들은 그 어떤 답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영화는 답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답안은 결코 주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감독으로서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실제 삶의 경험을 영화를 통해 표현할 뿐이라 말한다.

생각 대신 행동하라

8월 28일, 대만의 영화 관계자와 한국의 영화 관계자들, 그리고 허우 샤오시엔과 차이밍량이 참여한 ‘심포지엄’은 ‘대만과 한국의 영화합작’이라는 딱딱한 주제(이 주제는 대만 측에서 제안한 것이다) 대신에 두 감독들이 교육과 영화 배급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자리가 됐다. 허우 샤오시엔은 대만영화가 한때 발전했다가 왜 쇠락하게 되었나를 고민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영화가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이러한 발전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만 뉴웨이브는 주류 영화계의 운동이 아니었다. 중앙전영공사의 적극적 지원, 해외에서 돌아온 영화인들, 그리고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뉴웨이브를 형성했고 형식과 표현에서 이전의 대만영화와는 다른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 뉴웨이브는 주류가 아니었고,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도 없었다. 허우 샤오시엔은 여기서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주장했다. 시장을 겨냥하는 정책보다는 교육에 더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적 환경만 조성된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많은 영화 인력이 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밍량은 시장과 배급 등의 실질적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언급했다. 영화는 돈을 버느냐 혹은 문화를 배양하느냐의 이중적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대만 뉴웨이브는 시장과 관련해,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관객과 관련해 곤란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2001년부터 자신의 영화가 처한 답답한 현실을 직접 타개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내가 감독인데, 왜 시장을 고려해야 할까?"라고 의문을 품었지만, 그럼에도 점점 대만 시장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결심했다. 왜 관객들은 내 영화를 보지 않는가? 내 영화가 그렇게 나쁜가? 아님 관객들이 바보인가? 영화는 돈을 벌어야만 한다. 그런데 시장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에 빠지면서 차이밍량은 직접 관객을 찾아나서는 모험을 벌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표를 파는 행위"에 나선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위가 "적극적인 대항 행위는 아니지만 영화 환경을 개선하고 관객과 만나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행위"였다고 말했다.

허우 샤오시엔은 차이밍량과 달리 "표를 파는 행위가 창작자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만영화 시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는 예전엔 홍콩영화가 대만영화 시장을 장악했지만, 결국 비슷한 배우와 동일한 이야기에 질린 관객들이 더 이상 홍콩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만영화가 현재 관객과 접점을 찾지 못해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많은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와 단편을 만들어내고 있고 또한 대만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이러한 영화를 찾고 있다고 한다. 차이밍량 감독은 ‘표를 파는 행위’가 단지 표를 파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 운동이며 관객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행위라 말했다. 시장만을 고려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대만영화는 자국의 시장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문화가 배양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차이밍량은 무협영화의 예를 들어 이를 설명했다. "수없이 많은 무협영화가 과거에 홍콩과 대만에서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영화는 호금전의 무협영화뿐이다. 이 영화에는 날아가는 장면도, 특수 효과도, 스타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드라마와 문화와 사상이 들어 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영화가 문화를 바꾼다

‘대만뉴웨이브영화제’는 한국 관객들에게 과거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두 감독과의 만남에서 느낀 것은 그들의 영화에 담긴 특별하고 심오한 미학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만 뉴웨이브의 미래와 현재 대만 영화가 처한 현실에 대해 매우 피부에 와닿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만의 일부 영화 관계자들이 한류의 경험을 토대로 대만영화 산업 육성을 궁리하고 있을 때, 정작 대만 뉴웨이브의 주역들인 허우 샤오시엔과 차이밍량은 더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차이밍량은 "스타를 위주로 한 한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현재는 배용준이지만 그 또한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20년간의 대만 뉴웨이브의 누적된 역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왜 이 따위 영화를 만들고 있냐며 따지던 관객들이 이제는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며 기뻐했다. 차이밍량이 관객에게 표를 파는 행위는 그런 차원에서 사회 운동이자 문화적 행동이다. "나는 관객들을 만나 표를 파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차이밍량은 자신의 영화와 이강생의 영화가 다음에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될 수 있는 기회가 닿기를 소망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며 사진을 찍는 관객들이 정작 자신의 영화를 보지 않은 역설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극장 앞에서 수차례 한국 관객들과 사진을 함께 찍어야만 했다. 결국 차이밍량의 바람은 한국에서 시네마테크의 '영화 보급 운동'이 지향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바라건대, 그가 애절하게 강조했던 바, 영화를 보여 주고 관객과 만나는 실천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문화 운동이 되었으면 싶다. 대만 뉴웨이브가 일으킨 새 물결이 있었다면 바로 그 변화의 가능성과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