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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영화는 삶에 빛을 비춰주는 작은 손전등 같은 거지- 배창호 감독 인터뷰 본문

영화일기

영화는 삶에 빛을 비춰주는 작은 손전등 같은 거지- 배창호 감독 인터뷰

Hulot 2008. 6. 1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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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이 영화판에 뛰어들어 당대의 스타 감독이 되기까지, 영화감독 배창호는 놀라운 에너지를 지닌 예술가였다. 그의 전작을 상영하는 배창호 특별전을 앞두고, 이를 기획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배창호 감독과 두 차례 만나 영화로 쌓은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 배창호 감독의 전작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처음 제안했을 때 그는 “뭐, 내가 회고를 할 때는 아니라고 봐요”라고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했다. 물론 나로서도 배창호 감독을 과거의 작가로 ‘회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시네마테크에서 간헐적으로 <러브 스토리>와 <정>을 상영하면서 조금씩 과거 그의 영화에 품고 있던 정이 새록새록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길>을 본 이래 그의 신작을 더 빨리 보고 싶었고, 달리 할 게 없는 나로서는 ‘특별전’으로 미약하나마 그의 영화작업에 경의를 표하고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다 배창호 감독이 영화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석에서 배 감독은 그런 돌연한 행동이 ‘배수진’이라 말했다. 그런 단호함으로 1978년 배창호 감독은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러니까 5월에 열리는 ‘배창호 특별전’은 대기업 종합상사의 잘나가던 사원이었던 한 젊은이가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무턱대고 영화계에 뛰어든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은 “이제는 내가 내 작품을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거 같아. 예전보다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다고 할까. 당대라는 것이 그렇잖아. 같이 휩쓸려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었지. 조금 망설여지고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 과거의 작품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게 느껴지지”라며 ‘특별전’의 감회를 밝혔다. 그는 앞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서도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특별전 관객들과 한 흐름으로 점검하고 싶다고 말한다. (김성욱)

김성욱:영화계에 들어온 것은 그러니까 1978년의 일입니다. 실제로 영화에 참여한 것은 1980년으로,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조감독을 맡으면서였죠.

배창호: 이장호 감독님을 뵌 건 1977년, 내 자작 시나리오를 써서 들고 갔을 때였지. 그때 이 감독님은 사건이 터져 일을 못하던 상태였고. 나는 언제가 됐든 그의 활동이 풀릴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 감독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계속 가졌어. 그러다 1978년에 케냐 지사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해 이장호 감독님이 활동을 재개한다는 얘기를 듣고 회사에 사표를 내버렸어. 그런데 이장호 감독님이 다시 일을 못하게 됐다더라고. 사실 일을 못하게 된 게 아니라 풀어주질 않은 거야. 나야말로 난처하게 된 거지. 그래도 이 양반 언젠가는 풀리지 않겠냐는 믿음이 있었어.

그러면서 충무로의 아웃사이더가 됐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충무로에 있으면서 충무로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된 거지. 이 감독님이 워낙 활동이 많은 분이니까. 그 당시 만화영화 배급도 하시고, 기획 쪽 강의도 하시고. 이 감독님의 이런저런 일을 도운 덕분에 영화계를 접할 수 있었지. 그래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하게 된 거고. 그 당시도 서열이라는 게 있어서 퍼스트 조감독을 하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아마 같은 아웃사이더였던 덕분인지 일약 퍼스트 조감독을 하게 됐어. 그게 80년이에요. 서울의 봄과 함께,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계를 다시 잇는 작품을 하게 된 거야. 당시엔 그런 소재를 다루기 어려웠기 때문에 검열을 피해나가면서 영화를 해야 했지.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은 검열이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공부에서 심의위원들이 하는 시나리오 심의란 게 있었어. 거기 통과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그전에 <어둠의 자식들>(이장호 감독)도 비슷한 걸 겪었거든. <어둠의 자식들>의 경우, 원작 그대로 하지 않고 창녀 이야기만 추렸기 때문에 영화화를 허락받았던 기억이 나네. 그런데 <꼬방동네 사람들>은 한술 더 떠, 문공부 심의 담당 부서 쪽에서 아예 ‘제목을 쓰지 말라’는 거야. 개작, 반려 지시가 여러 차례 왔었던 것 같아. 그 기간만 해도 7~8개월이었을걸. 마지막에 내주면서도 몇십 군데 수정하라 했고, 제목도 ‘검은 장갑’으로 바꾸라 했지. 그렇게 촬영을 시작했어요. 그 지적 사항 중에는 부부싸움 할 때 부인의 머리채를 끌지 마라, 방 안에 요강을 두지 마라, 경찰관이 일반인들한테 무례한 언사를 쓰는 장면을 넣지 마라 등등이 있었어.(웃음) 그렇게 되면 극중의 리얼리티는 아주 없어지는 건데 말이야.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이 이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데, 이후에도 감독님 작품에서는 이런 플래시백이 많이 사용됩니다.

과거의 사연들이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런 구조를 채택하지 않았나 싶네. 그리고 또, 내가 그런 식으로 삶을 입체적으로 길게 그리는 걸 좋아해. 내 영화는 일대기가 많아. 타르코프스키도 그랬지, 일대기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해. 그래서 영화에 과거가 많아. <길>도 그렇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도 그렇고, <흑수선>도 그렇고, 긴 호흡으로 보는 걸 좋아하는 거지. 그걸 A, B, C로 하느냐, 아니면 영화적으로 편집하느냐는 그때그때 달라지는 거 같아.

<적도의 꽃>이나 <깊고 푸른 밤>이나 감독님 영화들을 보면 사막에 대한 강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막에 대한 시각적인 애호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난 것인지요? 현대적인 삶이나 현실이 사막 같다고 생각했나요?

그러고 보니 <적도의 꽃>도 그렇고, <깊고 푸른 밤>도 그러네. 현실 세계이면서도 상징화시키지 않은 채 테마하고 맞아떨어지는 장면을 미장센에서 찾다 보니까 모래가 있는, 어떤 허장성세 같은 앵글을 잡게 된 거지. <깊고 푸른 밤>에 나오듯이 미국엔 그런 곳이 많잖아. 일부러 그런 것들을 넣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테마를 부각하는 데는 도움이 되니까. 두 작품 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 혼재되어 있는 삶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런 사막이 나왔던 것 같아.

<깊고 푸른 밤>은 당시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흥행을 거치면서 감독님의 영화관도 변모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황진이>는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황진이>가 하나의 변환점이지. 스토리텔링이라는 구조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고, 뭐랄까, 짜여 있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그 인물의 인생에서 영화를 풀어내보려고 했던 게 가장 큰 변화였어요. 영화적인 면에서 자세한 설명이나 흥행, 대중성을 위한 카메라 움직임들은 다 빼려고 했어요. 자극적인 것들도 다 빼고. 스토리텔링에서도 인위성이 드러나면 빼려고 하고. 더 가다듬고 정제하기 시작했어. 흥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내 흐름대로, 내 식대로 결말을 내고 영화를 찍었던 거지. 흥행이 되길 바랐지만 흥행에 맞춰서 찍지 않았어. 아주 소수의 사람들 빼놓고는 다들 곤혹스러워했는데 돌아가신 정영일 선생이 “이 영화가 한국영화의 쿠데타인데 성공할지는 모르겠어요”라고 말씀하신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당시 젊은 영화학도들, 교수들, 그런 사람들이 영화언어, 롱테이크, 픽스 같은 측면에서 새로운 영화로 인정해줬지.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대한 것 때문에 입에 많이 오르내린 영화였어. 내용적인 것은 아주 소수에게밖엔 이해받지 못하고. 추석 때 굉장한 기대 속에서 개봉했는데 관객이 뚝뚝 떨어지더라고. 그래도 그해 흥행 8위는 했어. 워낙 처음에 많이 와서.(웃음)

<황진이>나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롱테이크를 쓴 것은 특별히 숏을 나눌 필요가 없을 땐 나누지 않겠다는 판단 때문이라 했는데요. 숏을 나누는 것과 관련해 감독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겁니까?

이유 없이 그냥 나누거나 하진 않죠. 미장센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혼재된 것을 잘 구분해내는 건데 말이지. 지금 이 시대는 영화언어가 실종되고 혼재되면서 막 비벼지게 됐어. 그걸 잘 나누고 취합했을 때, 영화 매체로서 균형 잡힌 솜씨가 나와요. 영화가 문학도 미술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잘 쓸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숏, 숏의 지속 시간이라는 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인 거야.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솜씨인 거지. 마치 그림에서 화가의 솜씨가 보이듯이 말이야. 그 솜씨를 지금은 잘 부리는 사람도 흔치 않고, 느낄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영화가 사실 그런 솜씨가 없어도 만들어지긴 하거든. 그렇지만 그걸 만드는 데 핵심적인 법칙이 있어. 나는 데뷔 때부터 숏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하게 다뤄왔어요. 그게 영화적인 솜씨니까. 글 솜씨가 없는 평범한 사람의 글이 진실성을 갖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게 문학일 수는 없는 거예요. 영화는 직접성이 있으니까 그냥 세상이 담기잖아. 그런데 그걸 매체성을 잘 드러내게끔 잘 표현하고 담아내는 것이 힘든 거지. <정>이다, <길>이다,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 기사에 난 줄거리만 보고 ‘아, 이 영화 진부하다, 지루하다’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소설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봐야지.

감독님 영화에는 사랑과 욕망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물론이고, <젊은 남자>나 <천국의 계단>에서도 그런 사랑과 욕망이 충돌합니다.

공통적으로 내 영화를 꿰뚫는 것이 있다면 인생을 보는 내 눈이야. 하나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그 반대적인 것, 욕망이 될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두 가지를 다루는 데 있어, 한 번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고 그것이 일깨워져야 할 모습을 보여주고 한 번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그랬지. 그런 것들을 대변한 것이 <깊고 푸른 밤> <젊은 남자>였고, 그 두 가지를 다 대변한 것이 <꿈>이었어. 나머지 영화들은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살더라도 우리가 추구할 것, 우리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영화라는 거울을 통한 작은 빛으로 비추어 일깨워주려는 거였고.

그런 의미에서 가진 자보다는 소외받고,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에 주목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시각으로 보려고 했어. 내가 의도했던 건 그 두 가지이지만, 나도 모르게 내 기질 속에서 나온 것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내 영화에서 보면 돌고 도는 리듬이 많아. 첫 신하고 라스트 신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생의 순환 같은 거.

감독님 영화를 보면, 집이 있고 집을 떠나는 여정이 있는데, 되돌아가고 싶은 귀향의 정서도 있습니다. 집, 여정, 가족이 감독님에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마치 웨스턴영화 같은 느낌도 들었고.

그건 처음 들어보는 지적인데, 그럴 수는 있겠네. 질문을 들어보니까 맞네. 글쎄 이 대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설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게 나온 근저에는 내가 삶의 방랑성을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거든. 나는 삶을 나그네로서 보는 경우가 많아. 방랑이라는 건 감상성이 있단 말이야. 나는 내가 센티멘털리스트라는 말을 부인하진 않아요. 그런 면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안주할 수 없다는 것, 참 존재, 가치를 찾을 때까지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나타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그런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로드무비도 몇 편 했고.

감독님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게 방랑하면서 주변 환경에서도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환경과 인물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요?

환경은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그게 감독이 세상을 보는 눈이니까. 내 영화에서 대부분의 환경은 인간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환경들이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예로 들어볼까. 원작에선 언니가 수지고 동생의 별명이 오목인데, 박완서 선생은 그 자매간의 질투를 모티브로 하셨다고 해. 질투 때문에 전쟁 난리통에 언니가 동생을 버려. 근데 나는 그걸 확 바꿨거든. 개인의 질투 때문이 아니라 전쟁 탓이라 설정한 거야. 그래서 언니를 욕할 수가 없게 됐어. 언니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동생을 부인하는 장면이 있어. 이처럼 환경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끔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아. 난 대중영화 감독이니까 그 삶을 느낄 때에는 보편성이 많은 쪽으로 취사선택하는 거지.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나요?

<길> 같은 경우. 결국 친구하고 통정한 것이 오해로 밝혀지는데, 그것도 오해라고 할 게 아니라 친구랑 사는 걸로 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고. 다음엔 그렇게 찍고 싶기도 해.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라스트가 나오겠지. 영화 속에서 두 시간 남짓의 삶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그런 두 가지 길이 다 열려 있을 때, 그 인간이 좀 더 본질적인 자기 모습을 찾아가게 되는 쪽을 선택하는 거지. 그러니까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거야. 물론 뭐 그렇지 않은 인간도 물론 있고.

<러브 스토리>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당시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황진이>만큼이나 대단한 파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꾸미는 영화를 안 찍겠다는 것이 내 모토였지. 물론 처음에는 전문 연기자를 쓰려고 했어. 그런데 이야기 자체가 담백한 영화, 사랑에 대해 환상을 주지 않는 진솔한 영화, 이런 것들이 떠오른 것은 사실 내가 집사람이랑 데이트하면서였거든. 데이트할 때 내가 5시간, 6시간을 있게 되는 거야. 나는 성질이 급해서 여자들이랑 오래 얘기 못하는데, 집사람이랑 연애할 때는 아침에 만나면 저녁까지 같이 있게 되더라고. 그래서 ‘아, 이걸 영화로 하면 좋겠다’ 싶었지. 마치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겠다는 동기와 비슷한 거 같아.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겠네요.

어느 날인가 내가 크랭크인 준비하고 있는데, 날 아끼던 황기성 씨라는 분이 나를 불러 대낮에 술을 사주셨어. 그분 생각에 이건 반드시 망하는 영화였지. 다른 사람들 보기엔 흥행은커녕 반드시 망하는 영화라도,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면 ‘잘하면 덜 망할 수 있다’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드는 게 보통이거든. 그런데 그분이 “배 감독, 빚지면 정말 고생해. 지금 얼마나 찍었어? 계약은 했나?” 하고 물어보시는 거야. 정말 날 걱정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느껴졌어.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해. 그래서 이후에 내가 편지를 썼어.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제 길을 가야겠습니다’라고. 결과적으로는 그분 예측이 딱 맞았지. 그런데 개봉 전날 그분한테 전화가 또 왔어. “배 감독 광고 잘 봤는데, 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겠지” 그러시더라고. 사실 처음에 만든 광고는 미국식 로맨틱 코미디 식으로 갔는데, 우리가 뭐 직업 배우도 아니고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그런 건 다 뺐지. 광고까지 담백하게 갈 수밖에 없었고, 신문 광고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나중에 다 빼버렸어. 홍보하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시선을 끌기 위해서 그런 거였으니까. 황기성 씨한테 또 전화가 왔지. “광고 잘 봤는데, 뒷수습을 침착하게 잘 해야 해” 하시더라고. 그 말이 나중에 보니까 명언이더라고. 영화 제작이라는 게 흥행이 끝나고 나면 돈 줘야 할 일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청구서가 많이 날아오더라고. 그때 ‘아, 이게 뒷수습이구나’ 깨달았지. 그래서 하나하나 다 해결해나가고. 개봉 끝나고 나서 더 힘들었어.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이 급변하고 있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내가 건너야 할 길이구나, 산비탈 길이구나, 내가 고생을 너무 안 했구나.’ 사실 그전까지 정신적인 고통은 많았지만 경제적인 고통은 없었으니까. 이런 고통을 통해서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겠구나, 그리고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 돈도 빌려보고 아쉬운 소리도 해보고, 돈 빌리기 위해 연기도 해야 했고.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더 성숙해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들고 시사할 땐 기분이 좋았는데, 개봉 때는 경제적인 난관 때문에 객관적으로 잘 못 보겠더라고. 순간순간 드는 후회들, ‘아 내가 저걸 왜 했지 싶은’ 하는 생각들. 허허.

<정>을 독립영화 제작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젊은 남자> 때만 해도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하는 추세였는데 <러브 스토리>를 하고 나니까 창투사 같은 금융 자본이 들어오며 더 영리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됐어. 그렇게 제작 환경이 바뀐 걸 목격한 거야. 그때 미국에서 재미교포를 다룬 영화를 만들려다 IMF를 맞아 달러가 오르고 예산이 올라가는 바람에 포기하게 됐지. 당시 미국에 있을 때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 제도권을 떠나 있는 영화를 해야겠다, 나 아니면 안 되는 영화, 내가 하고 싶었던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한 영화가 <정>이었어요. 구상은 이미 예전에 해뒀던 거고 이 영화는 한참 뒤에나 하겠다 싶었는데, 그런 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서 제작이 앞당겨진 거지. 이럴 때 오히려 내 목소리를 내는 영화를 독립영화 방식으로 해야겠다, 라고 미국 땅에서 느끼고 귀국하자마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 그게 97년 말이고, 98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한 거야.

<정>의 제작 과정이 꽤 힘들었던 것으로 압니다.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나요?

제작비는 정말 초심 이상의 열정과 인내력과 의지로 했어. 나중에는 영진위의 제작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지원 여부가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신념만 가지고 했어. 정말 수중에 돈이라곤 없었어. 시나리오 다 써놓고 막상 촬영을 하려니까 돈이 너무 없는 거야. 근데 돈이 없다고 해서 영화를 포기하면 안 되겠더라고. 이거 신념을 가지고 해야지 하는 생각에 다시 또 주위에 돈을 꾸게 됐어. 나와 신념을 함께하며 나랑 같이 일해줬던 스탭들한테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으니까 도와달라면서 같이 하게 된 거지. 내가 인심을 잃지 않아서인지, 내 열정을 느꼈는지 다들 참여해줬어. 그때 대관령에 초가집 한 세트를 찍어야 하는데, 그때 있는 돈만 딱 들고 미술감독을 찾아갔어. 그리고 “가진 돈은 이거밖에 없으니 이걸로 세트를 지어주세요” 했지. 근데 그분 말씀이 정말 고마웠어. “이것도 적은 돈이 아니지. 해봅시다” 하면서 세트를 지어준 거야. 간신히 첫 촬영을 했지. 제작 과정이 힘들었어. 배창호 프로덕션 경리부 직원들의 월급을 따져보니 일 년이면 비용이 꽤 되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경리일을 했어. 경리 장부를 두고 정산하고 회계처리하고. 진짜 일당백이었지. 제작부들은 사무실 옥상에서 라면 끓여 먹기 일쑤고. 촬영은 눈물겹게 했지만 철칙만큼은 ‘영화에 빈티가 나선 안 된다’는 거였어.

<정>부터 영화에서 긴 역사의 시간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흑수선>도 그렇고, <길>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길>에 와서는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시대가 일대기처럼 펼쳐집니다.

내가 일대기를 좋아해. 그게 본격적으로 <정>부터 나타난 거지. 어떻게 보면 내가 시대를 역행한 거랄까.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을 보면, 디테일을 강조하면서 세밀해졌어. 인물도 부분을 잘라서 세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고. 또 그런 영화들이 평가받는 시대였지. 하지만 <정>은 뭐 독립영화고, 대중들에게 그렇게 주목받지 않은 영화였으니까. 이를테면 호흡이 긴, 벽화적인 분위기가 난다고나 할까. 세밀화는 그 나름대로 부분적인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고, 벽화는 듬성듬성 선이 강한 그림이야. 나는 그렇게 벽화를 그려도 흥행이 될 줄 알았는데, 관객들은 그 시대에 맞게 세밀화를 요구했던 거지. <흑수선>의 경우에도 극중 배역과 연기자들의 나이가 잘 안 맞아 보이는 면이 있는데 벽화 같은 호흡이라면 같은 연기자가 계속 연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당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았던 거지.

감독님은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거나 현실을 영화에 담아낼 때, 중요한 것은 외관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인 특질을 포착하는 것이라 종종 말씀하시는데요.

우리는 내면의 리얼리티를 더 보지요. 그 감정이나 심리가 리얼한가, 아닌가. 그런 캐릭터 속에서 저런 심리나 행동이 나오겠구나 하며 내면의 진실성을 더 보는 거고. 물론 이것이 외부적인 것까지 맞으면 더 좋겠지. 예전에 <유리동물원> 같은 연극을 보면 거긴 소품도 없거든. 지문만 있어. 차 마시는 흉내를 내면서 인물의 마음을 느끼는 거야. 지금은 리얼리티의 선을 넘어서서, 표피적인 리얼리즘에 매이는 거 같아. 그때 영화는 창조가 아니라 카피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내 영화처럼 선이 굵은 영화들은 지금 같으면 그때 제작비의 열 배를 써서 찍든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거지. 벽화를 어떻게 세밀하게 다 그리겠어. 몇십 년에 걸친 역작이 아니라면. 그런데 그거까지도 세부를 다 보려고 하는 시대가 된 거지.

<정>이나 <길>을 보면서 인간 사이의 ‘정’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감독님의 믿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수론 적지만 있긴 했지. 과거에는 더 많았겠지만. 없는 것은 아니에요. 없는 것은 허위가 되고 과장이 되지만 이건 있는 사실이니까. 이 영화들은 삶의 조건들이 사람을 힘들게 해도 사람 안에는 ‘정’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사랑의 메시지야. 우리 고유의 정서를 ‘한’이 아닌 ‘정’으로 바꾸고 싶었거든. 내가 테마로 다뤄온 사랑의 한 형태인 거지. <황진이>가 선이 뚜렷한 사랑이었다면, <정>은 생활 속에서 더 평범한 여인이 겪어야 했던 사랑의 길이야. “영화란 밤하늘에 유성이 떨어진 뒤 어둠을 밝히는 어느 여 안내원의 손전등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바쟁이 말했는데, 나도 내 식으로 그 삶에 빛을 비춰주고 싶은 거지. 정이라는 것들이 자기 속에 있는데 영화를 통해서 확인되고 일깨워주는 것, 그게 내 기쁨이고 영화감독으로서의 사명감이야.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과거에서 더 영화 소재를 찾는지도 모르지. 과거에 그런 인물들이 더 많으니까. 거기에 하나의 믿음을 갖고 있는 거지.

영화가 치료이자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영화가 위안을 주긴 하지. 그런데 어떻게? 현실 도피로, 진정으로, 쾌락으로 마비로? 이 중에서 내가 주고 싶은 위안은 당신 안에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있다는 것, 자연치유력이 있다는 것, 일깨우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게 지금까지 내가 영화에 담아낸 것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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