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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안나 카리나, 고다르의 여신이자 영화적 젊음의 원천 본문
* 1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씨네21 데일리(2008.10.02일자)'에 부산에 온 안나 카리나를 위해 쓴 글입니다. |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우연히 보지 않았다면 안나 카리나와 만날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깝다. 안나 카리나가 없었다면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덜했을 것이다. 혹은 우리가 누벨바그(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젊은 영화작가들에 의한 전위적인 영화운동)라 말하는 고다르의 영화경력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다르의 작가적 연대기에서 누벨바그의 시기(1959-1967)가 종종 ‘안나 카리나 시절’이라 불릴 만큼 그의 영화에서 카리나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고다르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도 중후기 영화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의 만장일치로 초기의 고다르를 좋아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그의 영화에서 젊음의 기운이 넘쳤기 때문인데, 그 발랄함과 신선함은 모두 안나 카리나의 행운의 선, 허리의 선, 도주선, 운명의 손금선 덕분이었다. 안나 카리나는 고다르의 영화적 젊음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안나 카리나에의 매혹은 동시대 프랑스 여배우들, 이를테면 카트린 드뇌브, 델핀 세리그, 혹은 브리지트 바르도와 같은 여배우에게 품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일단 그녀가 감독과 맺는 관계가 달랐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 그녀의 말 하나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물론 이는 그녀를 담아낸 작가에게서 사랑이 넘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이는 그리피스가 릴리언 기쉬에게, 조셉 폰 스턴버그가 마를린 디트리히에게, 로셀리니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안토니오니가 모니카 비티에게 했던 헌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 명의 영화감독이 한 배우의 육체에 감동해 그녀가 지닌 모든 능력들을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헌신한 영화의 역사 말이다. 고다르가 예술에 빠진 피그말리온이었다면 안나 카리나는 그가 만들어낸 조각상 갈라테아인 셈이다. 안나 카리나가 출연한 비누 광고의 이미지에 현혹돼 고다르가 그녀에게 무턱대고 자신의 첫 작품 <네 멋대로 해라>(1959)에 출연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파리로 건너와 <엘르> 등 잡지의 모델을 거쳐 피에르 가르뎅의 모델로 활동했던 안나 카리나(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이 예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는 고다르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녀와 카리나가 조우한 것은 두 번째 작품인 <작은 병정>(1963)에서이다.
<작은 병정>에서의 안나 카리나는 자신을 ‘베로니카 드레이어’라 말한다. 이 기이한 표현은 그녀가 어떤 흔적을 담아내는 이미지를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를테면 그녀는 은밀함 속에서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폭로자이자 계시자이다. 고다르는 덴마크에서 온 안나 카리나에게서 <잔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드레이어의 흔적을 발견하려 했고 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비가시의 사고와 영혼을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남자 주인공 브뤼노 포레스티에는 그녀를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촬영할 때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영혼을 촬영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안나 카리나의 얼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카리나의 얼굴에는 순수함, 그만큼 쉽게 깨질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녀가 머리를 귀로 넘기면서 정면을 쳐다보는 모습에서, 그녀의 어깨의 곡선에서, 그녀의 평온한 시선에서, 신비로운 미소에 아름다움이 있다.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1988~98)에서 마네의 그림에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기입하는 것은 그래서 적절한 것이다. 카리나의 얼굴에는 회화적 이미지로 향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치명적이라 함은 그녀의 얼굴이 영화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포즈에서 발산되는 매혹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 속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 배우의 육체의 매혹을 발산하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그 아름다움은 사진을 찍는 브뤼노 포레스티의 표현을 빌자면 ‘1초에 24번의 죽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녀의 첫 이미지는 이를테면 죽음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안나 카리나는 그녀가 보여준 수난의 모습으로 나를 더욱 매료시킨다. 가령 가련한 죽음을 맞이하는 매춘여성 나나를 연기한 <비브르 사 비>(1962)에서 카리나의 얼굴은 잊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성은 <국외자들>(1964)에서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파리의 겨울을 배경으로 회색빛의 파리 교외, 지하철, 뱅센느 항구 근교의 작고 평범한 카페들과 같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들을 무대로 하고 있다. 안나 카리나는 이 영화에서 두 명의 악당 사이에서 고초를 겪는 오디르라는 젊은 여인을 연기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카리나는 지하철에 탄 승객들의 피곤한 얼굴들을 쳐다보며 ‘지하철에선 항상 슬프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게 되죠. 저 사람들을 보세요. 왜 저런 얼굴들을 하고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카리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담긴 슬픈 사연들을 읽어내려 한다. 그러면서 루이 아라공의 시에 장 페라가 곡을 만든 샹송을 노래한다. 슬픔을 느끼는 여인, 영혼을 읽어나가는 여인, 그리고 노래하는 여인.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퀸 크리스티나>에서의 그레타 가르보의 슬픈 표정을, 존 휴스턴의 <야생마>에서 마릴린 먼로의 약하고, 불안하고, 흔들리는 표정을 발견한다. 뭐가 그렇게 당신을 슬프게 하는 거죠,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데. 당신이 웃으면 마치 내게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안나 카리나의 얼굴에는 파국을 맞은 사랑의 슬픈 표정이 담겨 있다.
불가능한 인물들의 만남을 몸으로 표현하다
내가 안나 카리나에게 끌리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발산하는 이질성, 모순성, 이중성의 매혹 때문이리라. 고다르는 <국외자들>에서 안나 카리나의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오디르가 19세기 영국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등장한 인물로, 그러나 그녀는 사실 더 직접적으로는 세기 초의 독일 고전주의에서 기원한 인물이며 그녀 안에는 천진난만함과 상냥한 마음이 혼합되어 있고, 토마스 하디의 불행한 테스와도 같은 자긍심을 지닌 인물이라 말한다. 동시에 그녀는 니콜레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캐시 오도넬, 에른스트 루비치의 <클러니 브라운>의 제니퍼 존스인데, 최종적으로 그녀의 운명은 프리츠 랑의 <한번 뿐인 삶>의 실비아 시드니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모든 인물을 한 명의 여배우가 몸짓에서, 표정에서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안나 카리나는 그런 불가능한 인물들의 만남을, 영화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그 흔적들을, 그 강렬한 만남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해냈다.
안나 카리나에게는 서로 다른 극점으로 향하는 이중적인 선이 있다. 그 하나가 제스처와 포즈, 얼굴로 향하는 내적인 선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움직임과 퍼포먼스, 그리고 샹송으로 향하는 외적인 선이 있다. 이를테면 <미치광이 피에로>(1965)에서 안나 카리나는 이런 이중적인 면모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그녀는 여기서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아이자 마리안-르누아르이며 마네의 여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모델이자 장 르누아르를 영화로 이끈 여인, 그러니까 회화적 이미지와 영화적 전통의 상속녀이다. 그녀는 또한 사유의 형상이기도 하다. 주인공 장 폴 벨몽도는 그녀가 웃을 때, 그녀가 ‘날씨가 좋다’고 말할 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떠올리기 위해 고심한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카리나는 삶이 소설과 다르다는 것이 자신을 슬프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카리나는 점점 그녀의 운명선과 도주선을 드러내고 무엇보다 사랑을 노래한다. 움직이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또 다른, 진정한 매력중의 하나다.
안나 카리나는 고다르와 결별 후에 세즈루 갱스부르의 노래를 받아 뮤지컬 <안나>(1966)에 출연했고, 자크 리베트,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그리고 이어 몇 편의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의 현재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샹송 앨범은 프랑스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하는 노년의 안나 카리나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 본다. 이제는 그녀에게서 <여자는 여자다>에서 ‘난 아주 매정해요. 그래도 화내는 남자는 없어요. 난 정말 예쁘니까요’라고 노래하는 발랄한 여인의 이미지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녀의 얼굴에서 마리안-르누아르가 아니라 안나 카리나의 흔적을 더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는 순간에는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느끼는 어지러움을 아마도 동일하게 경험할 것 같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 이번 "13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원래 내려갈 계획이 없었다가 예정없이 내려가서는 또 계획도 없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이유는 물론 영화를 보는 것이었지만, 다른 몇 가지는 클레르 드니를 만나고, 필립 그랑드리외를 만나고, 타비아니를 만나고, 그리고 안나 카리나를 보는 것이었다. 안나 카리나의 마스터클래스가 있던 날, 행사가 있던 해운대 근처의 그랜드 호텔에 들어가다 차에서 내리는 안나 카리나와 만났다. 이제 얼굴만으로는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만큼 모든 것이 변해보였다. 게다가 그렇게 뛰고 달리고 노래부르던 그녀를 지금의 모습에서 상상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문득 2005년에 퐁 데 자르 근처의 갤러리에서 열렸던 자크 드미의 전시회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크 드미, 아네스 바르드와 함께 고다르가 안나 카리나와 결혼했을 때 행복한 표정의 사진이었다. 새침을 떨듯이 안나 카리나는 예쁜 미소를 짓고 있다. 위에 있는 사진은 그 때 전시회에 걸린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고다르와 카리나의 행복했던 시절이다. '마스터클래스'에서 카리나는 고다르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는 관객의 질문에 "잠깐 담배사러 나갔다 온다고 말하곤 3주간 집에 안들어온적이 있었다"고 말해 사람들이 한 참을 웃었다. 그래도 그녀는 고다르와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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