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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현실은 영화에 복수를 감행했다 본문

고다르 이야기

현실은 영화에 복수를 감행했다

Hulot 2009. 3. 10. 04:36
 





“영화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장 뤽 고다르는 20세기의 역사를 결산의 자세로 임해 만든 <영화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사>는 고다르의 가장 야심적인 작품으로 1988년부터 시작해 10년만인 1997년에 완성한, 그의 영화적 삶과 기억을 도합 네 시간 반에 담아낸 대작이다. 기획의 원대함과 치밀함으로 보자면 19세기 파리에서 형성된 산업문화에 대한 방대한 인용으로 근대성의 원현상을 그려낸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비견할 만하다. 고다르는 이 작품으로 영화가 ‘거대한 역사’를 이룬다고 말하는데, 다른 역사가 언제나 축소될 뿐이라면 영화는 그 역사를 스크린에 크게 투사하기에 거대하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영화가 무의식의 밤의 역사를 이루기에 20세기 역사의 거대한 공백과 부재가 스크린에 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고다르는 그런 영화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다’라 말한 것이다.
 
고다르의 도발적인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특별한 역사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다르에게 영화는 20세기에 꽃을 피운 19세기적 사건이다. 19세기 말의 집단적인 꿈이 20세기에 현실화된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19세기의 꿈을 투사하는 능력을 가졌을지언정 그것의 현실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고다르의 판단이다. 영화가 현실을 외면했고, 이어 현실이 영화에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고다르가 보는 영화/역사의 비극이다. 그는 <영화사>에서 이러한 역사의 비극이 1940년대 초에 픽션의 거장들이 그들의 카메라를 아우슈비츠에서 딴 곳으로 돌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는 힘(영화는 무엇보다 기록의 매체로 탄생했다)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우슈비츠에서 발생한 비극을 결코 담아내지 않았기에 역사적 책무를 등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 8부(네 개의 장이 각각 A,B 두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구성된 <영화사>의 1A에서 고다르는 “학살한 것을 망각한 것도 학살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 영화의 역사, 언어가 없는 역사, 밤의 역사. 신은 인간을 버렸다. 영화관의 어둠속에서 50년간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을 상상을 통해 따뜻하게 했지만 이제 현실은 복수를 시작해 피와 눈물을 추구한다. 극영화의 거장들은 현실의 역습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영화가 현실의 비극을 담아내지 못하면서 현실 또한 영화를 저버린 것이다. 
 
고다르의 역사인식은 교과서적인 영화사의 이해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에게 소명이다. 그는 작품으로 특별한 세계를 표현한 예술가일뿐만 아니라 영화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가를 탐구한 소명의 작가다. <영화사>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실패를 역사를 통해 구제하려는 그의 ‘사적’인, 가히 무모하다고 할만한 시도가 담긴 작품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사 기행’과 같은 다큐멘터리와는 완전히 다른 기획이라는 말이다. 물론 고다르의 ‘시네필’적 취향이 <영화사>를 만들게 된 계기이긴 하다. 그럼에도 80년대 중반에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결산하는 시도를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역설적으로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85)를 꼽을 수 있다. 클로드 란즈만은 <쇼아>에서 수용소의 비극을 재현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배우나 엑스트라의 출연을 금지시키고, 당시의 기록영상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단지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의 증언과 회상으로 20세기의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수용소의 공포를 담아냈다. 대량학살을 해석하고 재현하는 영화의 특별한 권리에 ‘금지’와 ‘한계’를 선언한 것이다. 

고다르는 란즈만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고다르가 보기에 란즈만의 시도는 '실패의 실패'를 반복한다. <영화사>에서 고다르는 이미 영화가 역사에서 이중적인 실패를 보였다고 말한다. 1940년대에 아무도 수용소를 촬영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사의 비극이 발생했는데, 동시에 스크린에 투영된 극영화의 영상에서 그러한 비극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또한 비극의 전주였다. 이를테면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나 채플린의 <독재자>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다르는 이러한 이중적 실패가 결국 전후 유럽영화의 죽음과 미국영화의 승리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역사의 실패를 넘어서야 한다. 
 
<영화사>는 비극의 역사/영화사를 담아내는 것으로 20세기의 역사와 영화를 마주하게 한다. 고다르는 마치 상을 치르듯이 과거의 영상과 죽은 자들을 불러들인다. 인용되는 ‘스토리/역사(들)’이 워낙 방대해 통상의 영화를 보는 몇 배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할 정도의 정보의 과잉에 관객들은 쉽게 압도당할 것이다. 뉴스릴, 극영화, 회화, 문자, 수많은 인용들이 거의 무차별적으로 화면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진다. 다양한 편집기술의 합성, 접합, 분절이 복잡한 이미지의 성좌를 그려낸다. 가히 20세기의 ‘모든 역사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의 혼령들이 떼를 이뤄 ‘죽음의 춤’을 추는 형국이다. 이 장엄한 풍경은 이해를 바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빠져들어가고 삼투되기를 요구한다. 고다르의 영화는 잠깐 환희에 잠겼던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과연 지난 세기의 비극과 전쟁이 지나가버린 것인지, 우리가 정말 20세기와 제대로 작별을 고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성욱)


*  장 뤽 고다르 <영화사> 특별전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