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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자크 타티 (4)
CINEMATHEQUE DE M. HULOT
이번 ’자크 타티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타티의 작품만이 아닌, ‘윌로와 친구들‘ 섹션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것은 코미디의 확산성이다. 하나, 둘, 셋, 넷…채플린, 키튼, 로렐과 하디, 막스 브라더스, 그리고…한 명의 캐릭터에서 시작해 모든 사람으로 확산되는 코미디의 역사가 있다. 타티는 주로 엑스트라나 아마추어 또는 무명 배우를 사용해 작가 자신 외에 다른 스타가 없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전파와 확산. 혹은 코미디의 민주주의. 그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물의 코미디를 만들려고 했다. 점점 더 윌로를 적게 보고 평범한 사람들을 더 많이 보는 것. 그는 윌로를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이들로 복제 시켰을 뿐마 아니라, 다른 감독의 영화에 출연시키려했고, 이에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의 네 번째 ..
예전부터 내가 쓰는 메일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의 아이디는 대체로 Hulot이다. 버려진 숲처럼 방치되고 있는 이 블로그의 이름도 “Cinematheque de M.Hulot”이다. 가끔 원고를 청탁하는 기자나 강의를 의뢰하는 분들에게 전화로 메일 주소의 알파벳 단어를 또박또박 불러줄 때마다 다시 환기되곤 하는 이 이름은 대체로 '훌로' 혹은 '휠롯'으로 불리곤 했다. 정확한 프랑스식 발음은 윌로이다. 시네필들은 대체로 알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괴상한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하지 못한다. 물론 나 또한 그가 정확하게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엘르 잡지의) 에디터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도 내가 왜 윌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90년대..
따지고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는 '시적 리얼리즘' 혹은 '사회적 판타지'라 명명된 1930년대 프랑스 영화들이 대거 수입되어 관객들의 사랑을 얻었다. 자크 페데나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 줄리앙 뒤비비에의 (1936), (1937)과 같은 작품들이 특히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가령 작가인 김남천은 (첫 개봉 제목은 이었지만, 전후에 재개봉할 때 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을 본 후의 소감을 소설에서 이런 식으로 기술한다. “어떤 날 오후, 봄이라지만, 아직도 치위가 완전히 대기 속에서 가시어 버리지 않은 날, 나는 영화 상설관에서 를 구경하고 일곱 시경에 거리에 나섰다. 저녁을 먹어야 할 끼니때가 이미 지났으나, 곧 뻐스에 시달리면서 집으로 향할 생각을 먹지 않고, ..
드디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자크 타티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자크 타티는 종종 로베르 브레송과 비교되어 프랑스 현대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감독으로 평가받습니다. 로베르 브레송이 를 만든 2년 후에 타티는 (53)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타티의 특별함은 코미디 장르를 현대식으로 전환했다는 데에 있는데, 장 뤽 고다르는 심지어 타티의 첫 극영화인 (49)이 로셀리니의 (45)와 닮았다며 ‘타티의 영화와 더불어 프랑스식 네오리얼리즘이 탄생했다’고 말했습니다. 타티는 르네 클레망과 클로드 오탕 라라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고, 로 데뷔했습니다. 그는 브레송 이상으로 금욕의 작가로,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단지 6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곤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