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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뭐가 그리 행복한가요? - 게오르기 다넬리야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 본문

영화일기

뭐가 그리 행복한가요? - 게오르기 다넬리야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

Hulot 2009. 4. 12. 08:58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이 이제 중반을 넘기고 있다. 1950년대 이후의 영화들, 특히 '해빙기'라 불리는 시기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그 중의 한 편이 게오르기 다넬리야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1963)이다. 이 영화는 아마 이번 회고전에서 소개되는 영화들 중 <제 3의 소시민>과 더불어 가장 감미롭고 아름다운 작품 중의 하나에 속할 것이다. 같은 시기 타르코프스키나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장엄하고 엄숙한 주제, 탁월하고 강력한 영상과 비교하면 피아노 소품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꽤나 활기차고 발랄해서 묵직한 감동과는 다른 감각적 환희를 선사한다.  

모스크바의 평범한 젊은이들의 일상, 그것도 거의 하루의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모스크바, 도시의 교향곡'같은 식의 영화랄까. 영화가 활기차고 발랄한 것은 주인공들이 젊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든 이도 젊고, 작법도 젊기 때문이다.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유명한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로프가 모스크바를 하루 종일 소요하는 젊은 주인공 콜랴 역을 맡아 열연한다. 그는 광산 노동자로 우연히 시베리아에서 온 볼로야에게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콜랴는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알레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되려는 볼로야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내심 초조해 한다. 알레나 또한 볼로야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리고 있던 탓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풍의 젊은이들의 소소한 연애담이 결국 줄거리의 전부인 셈인다. 사실 영화의 주된 사건은 극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며 산발적인 에피소드들이다. 가령 영화는 짧은 프롤로그에서 당돌하게 시작한다. 한 여자가 왠지 모를 기쁜 마음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춤을 추듯 걸어간다. 그녀의 모습이 유리 창에 비추어 보이는데, 그 창문을 반사되어 이 곳이 공항임을 알게 된다. 그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지켜본다.(나중에 그가 영화 속 주인공 중의 한명인 볼로야였음이 밝혀진다.) 그는 기쁜 표정의 여인에게 뭐가 그리 행복한가, 라고 묻는다. 그녀는 남편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말한다. 볼로야는 그게 그리도 좋으냐고 의아해 한다. 이 정체 모를 여인의 기쁨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순전한 기쁨을 표상하는 것이다. 근데 정말 그게 그리도 기쁘고 행복한 것이었을까. 그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이미지는 전달 불가능한 경험, 감각의 표상이다.

이 프롤로그는 답이 제시되지 않은 질문처럼, 일종의 제유법처럼, 혹은 거의 환영이라 부를 법한 갑작스런 출현의 이미지다. 이 첫 장면의 불가해한 느낌 때문에 영화 초반부의 이야기 전개가 잘 안들어 올 정도였다.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나 둘씩 사건과 장면이 더해진다. 첫 장면이 지나친 뺄셈이었다면 이어지는 장면은 덧셈이다. 그도 그럴것이 프롤로그에 이어 곧바로 광산노동자인 콜랴(그가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처럼 처음 제시된다)가 아침에 퇴근하는 모습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모스크바의 일상 풍경이 하나, 하나씩 드러난다. 강에서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 전철안에서 만난 우연한 여행객들, 길거리의 풍경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쇼핑몰에 몰려든 사람들이 보인다. 이러한 풍경은 마치 로메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종의 ‘구문론적 이미지phrase images’처럼 보이기도 한다. 콜랴가 모스크바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조금씩 사건이라 부를 법한 일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다.  

가령, 영화의 초반부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던 콜랴와 친구 사샤(그는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입영을 연기하려 한다)는 도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여기에 혹시 보물이라도 숨겼나요’라고 묻는다. 이어 이들은 일본인 관광객을 실은 택시운전사로부터 통역자의 역할로 관광객을 목적지까지 안내해줄 것을 부탁받아 택시에 합승을 하게 되고, 이어 쇼핑몰에서 우연히 형수가 딴 남자와 만나는 순간을 목격하고, 거기서 우연히 젊은 작가 볼로야를 다시 만나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알레나를 만나러 간다. 이런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의 우연적인 연결은 영화 속의 모든 사건에 현전성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모든 일들이 봄의 아지랑이처럼,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처럼 출현한다.(또 한번의 제유법적 이미지라 부를 법한 것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맨발로 걸어가는 한 여인의 모습이다. 이는 영화 첫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시절>에서 탁월한 촬영을 선보인 바딤 유소프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만큼 영화의 라스트 또한 인상적이다. 헤어짐의 서정적 순간을 포착하는데, 이 때 콜랴는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여인처럼 혼자 흥얼거리며 전철을 돌아다닌다. 프롤로그가 공항이었다면 에필로그는 전철역에서다. 우연한 방문객, 누군가의 기다림과 떠남이 있는 장소다. 자크 드미의 영화를 볼 때의 그런 느낌이 영화의 마지막에 담겨 있다. 콜랴의 노래처럼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문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영화다. 마치 한 여름 빗줄기가 더위를 식혀줄 때, 많은 이들 속에서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 그 행복한 눈빛을 볼 때 느끼는 이상한 비애와 아련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 탄식이 절로 나올만큼 이 영화는 탁월한 걸작이다. (김성욱)


* 오늘(화요일) 5시 30분에,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 3시 30분에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상영된다. 4월 18일, 토요일에는 무료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후원회원 모집을 위한 무료상영회의 날이다. 이 영화의 상영 이후에 '시네마테크 연속포럼2 - 시네마테크와 영화 비평'이란 주제로 포럼이 또한 열린다. 
  

* 영화의 촬영은 바딤 유소프로, 그는 동시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을 촬영했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초현실적인 화면의 몽타주와 표현주의적 조명, 과감한 앵글과 광각의 활용, 그리고 움직임이 돋보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20년대 다큐멘터리, 혹은 유럽식의 시네마 베리테에 가까운 사실적인 촬영이 돋보인다.

* 중심적인 테마와 그것의 변주가 영화의 구조적인 형식이라 말할 수 있다. 지극히 음악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라는 말이다. 마치 영화 내내 반복되어 최종적으로 노래로 완성되는 음악처럼 말이다. 자크 타티 풍의 음악은 도시의 일상, 풍경, 인물들의 삶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연결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반복된다. 한 번은 행위로 또 한번은 관조로, 혹은 한 번은 응시로 다른 한 번은 행위로, 그런 식으로 운동에서 정감으로, 혹은 정감에서 운동으로의 이전이 있다. 

* 젊은이들은 초조하다. 사랑을 믿지 못하고, 동시에 우연적이고 갑작스런 사랑의 도래에, 혹은 아직 시작도 못한 사랑의 떠남에 당혹해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과거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잔존의 흔적들, 우연적이고 찰나적인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가 있다. 젊은이들은 60년대 트뤼포나 고다르, 혹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뛰어다닌다. '우리 뛰어갈까'. 마치 아이들 처럼. 그리고는 질문한다. 그녀는 그가 군대를 갔다 올 동안 기다릴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 시베리아로 갈 것인가? 그들의 할머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애인을 기다렸는데. 미래의 기다림은 젊은이들에게 초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