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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 본문

영화일기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

Hulot 2011. 8. 24. 04:22




영화제를 기획하는 입장에서 늘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영화의 역사를 영화를 보며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그런 걸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영화의 역사는 교과서에 기록된 사실들의 역사라기보다는 영화가 이룬 역사이자 영화들이 맺는 관계들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네바캉스서울 영화제'에서 '천국의 웃음'이란 섹션에서 소개하는 로맨틱한 코미디에서도 그런 관계의 역사를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루비치와 빌리 와일더. 이 두 감독의 영화를 하루에 함께 보는 경험은 그런 내밀한 관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상대적으로 와일더의 코미디 중에서 덜 알려진 <하나, 둘, 셋>은 사실 역사적으로 더 각별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1961년, 이 시기 동독은 자국민의 서독으로의 이주를 금지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세웠고, 와일더는 그런 철의 장막이 만들어지기 바로 직전에 동독과 서독의 경계지대를 무대로 정치적인 풍자가 가득한 이 코미디를 만들었습니다. 빌리 와일더가 1961년 6월 베를린에서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동독의 발터 울르리히트는 ‘동서독 사이에 장벽을 세울 의향이 전혀 없다’고 공언했었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두 달 뒤인 8월 13일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기에 사실 이 영화는 역사의 결정적 순간의 시점을 반영하는 아주 각별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형식과 내용 대부분은 남녀의 티격태격 사랑이야기를 다룬 스크루볼 코미디입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철의 장막을 뚫고 코카콜라를 판매하려는 야심을 지닌 서독의 코카콜라 지사장인 맥나마라(제임스 캐그니)는 어느 날 미국본사 사장으로부터 서독으로 놀러온 사장의 딸 스칼렛을 돌봐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이 말괄량이 딸은 매일 저녁마다 동독으로 월경을 시도해 동독의 공산주의자 청년인 오토와 사랑에 빠지고 급기야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맥나마라는 망연자실, 급기야 사장이 딸을 만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고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맥나마라는 오토를 순수한 혈통, 뼈대있는 가문의 자식으로 둔갑시켜 위기를 모면하려 하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집니다. 

 

<하나 둘 셋>의 즐거움은 동독 공산주의 청년과 미국 소녀 간에 벌어지는 엉뚱한 사랑이야기에 자본주의자인 맥나마라와 공산주의자 젊은이 오토가 벌이는 일대 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당시 동서독간에 끓어오르고 있던 긴장의 분위기가 이들이 벌이는 말다툼의 배경을 이루기에 이 영화에는 ‘양키 고 홈’이나 ‘후르시쵸프를 지옥으로’ 또는 ‘프랭크 시나트라를 지옥으로’ 같은 격렬한 구호들이 등장하고, 이런 소동은 살인적인 속도로 진행되는 대화, 시끄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 사건으로 영화의 템포를 계속 '업up'해가기에 다소 의아스런 제목 '원, 투, 쓰리'가 정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영화는 정말 코미디의 '속도'가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냉전과 동서독의 경계지대를 배경으로 한 와일더의 코미디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텐데, 이 점은 오히려 루비치의 영화 <니노치카>(1939)를 보시면 좀더 흥미를 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빌리 와일더는 <니노치카>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런 점에서 <니노치카>에서 니노치카의 동료인 세 명의 소련 당원들은 곧바로 <원 투 쓰리>에서 맥나마라의 사업 파트너인 러시아인 3인방을, 소련 공산당원인 니노치카는 그녀보다 아주 교조적이긴 하지만 동독 공산당원 오토와 닮아 보입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 두 편의 시나리오를 와일더가 직접 작성했다는 점만이 아니라 그의 영화에 미친 루비치의 영향력, 특히 영화적 위트와 스타일을 고려할 때 좀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니노치카>의 시나리오를 쓸 때 와일더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공산주의자 이데올로기의 정당성 유무가 아니라 그들의 유머감각의 부재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여긴 공산주의자의 문제는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고 남을 '웃기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니노치카>에서 이러한 특징은 절대로 웃지 않는 니노치카(그레타 가르보)의 캐릭터에서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와일더가 보기에 이런 사정은 <하나 둘 셋>을 만든 1961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하나, 둘 , 셋>에서 공산당원인 동독 젊은이 오토는 그래도 사랑스러운 니노치카에 비하면 정말 버럭 목소리만 큰 인물입니다.

 

와일더는 루비치와 작업하면서 루비치의 독특한 '스타일', 즉 이른바 '루비치 터치'라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드리죠. 빌리 와일더는 <니노치카>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떻게 소련 당원인 그레타 가르보가 자본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가를 영상으로 표현할지에 대해 무척 고민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루비치는 와일더에게 '그럼, 모자를 사용해보지'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니노치카>에서 '모자'와 관련한 에피소드, 즉 시나리오를 쓴 와일더가 고백하기를 <니노치카>의 핵심적 요소인 것은 루비치의 아이디어였던 겁니다. 더는 말씀 안드리죠. 영화를 보시면 그 '터치'가 무엇인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니노치카>에는 정말 요즘말로 하자면 '므흣'한 대사들이 즐비한데, 특히 보석을 팔기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는 러시아 스파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건너온 냉정한 스파이 니노치카(그레타 가르보)가 파리의 자본주의 문명과 처음 만나면서 겪는 해프닝이 정말 재밌습니다. 파리의 기차역에 도착한 니노치카는 자신의 가방을 운반하려는 짐꾼에게 ‘왜 남의 가방을 운반하려는 겁니까'라고 까칠하게 묻죠. 짐꾼이 습관처럼 ‘그게 원래 제 일입니다, 마담’이라 대답하자, 가르보는 짐꾼에게 그건 당신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불공평 때문이라 단호하게 말한다. 이어지는 짐꾼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가르보에게 그는 ‘마담, 그거야 팁에 달린 거죠’라 말합니다. 뭐 말로 이렇게 하는건 재미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냥 영화를 꼭 보세요.

 

<원, 투, 쓰리>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바로 직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니노치카>는 전전의 파리, 그러니까 2차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노치카>의 서두에 나오는 '이 영화는 황금기의 파리 이야기이다. 사이렌 소리는 공습 경보가 아니라 사랑스런 아가씨의 목소리였고 프랑스 사람들이 전등을 끄는 이유는 소등 경보 때문이 아니었다'라는 자막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루비치의 <죽느냐 사느냐> 또한 그런 영화였죠.)

 

 

 

 

 

빌리 와일더와 에르스트 루비치, 이 두 선수들의 영화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지만, 또 <니노치카>에 출연한 그레타 가르보를 '불멸의 스타' 섹션에서 상영하는 루벤 마믈리안의 <퀸 크리스티나>에 출연한 그레타 가르보와 비교해 보는 것도 무척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레타 가르보가 출연한 영화들 중 <퀸 크리스티나>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의 그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도 삽입되기도 했죠. 하루 밤을 보낸 크리스티나, 즉 그레타 가르보가 남자에게 '이 방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미래의 내 기억 속에 이 방을 정말 말이 떠올릴것 같네요.'라 말하면서 방안을 돌아다니며 물건 하나 하나에 손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를 볼 때 정말 숨 막힐 듯한 순간을 창조합니다. 이 순간의 가르보의 클로즈업은 정말 롤랑 바르트가 표현한 대로 '경외로운 두려움 그 자체'를 불러일으킵니다. 전설적인 촬영감독 윌리엄 다니엘스의 빼어난 촬영이 정말 볼 만합니다. (이번에 상영하는 루비치의 <니노치카>와 <모퉁이 가게>도 윌리엄 다니엘스가 촬영을 했죠.) 영화학자인 벨라 발라즈는 가르보의 아름다움을 두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채플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 예찬한 바 있습니다.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는 '시네바캉스서울 영화제'는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주 색다른 영화들의 관계들의 역사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말 서울은 정말 더울 거라 하더군요. 하지만 루비치와 와일더,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를 대형 스크린에서 만나는 체험을 꼭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꼭 꼭 ! 가르보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에서 만나보세요. 사실, <퀸 크리스티나>를 극장에서 틀어보는 것은 개인적인 소망중의 하나였죠. (혹 누군가는 그냥 대중적인 오락영화라 치부할 수 있을 테지만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뭉클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클로즈업이 뭔지 백날 이야기하는 것보다 가르보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는 체험이 아마도 그것의 역사와 미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을 제공합니다. (위의 가르보의 얼굴을 대형 스크린에서 만난다고 상상해 보세요..) 좀더 부언하자면 가르보의 얼굴을 <샤레이드>의 오드리 햅번의 얼굴과 비교해 보시면 영화의 역사에서 초상학의 두 시대, 예컨대 경외로운 두려움에서 매력으로의 변화와 이행의 미학과 역사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흠...짧고 간결하게 쓰려던 처음의 생각이 영화 이야길 하다보니 자꾸 길어지네요..ㅠ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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