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CINEMATHEQUE DE M. HULOT

자크 로지에의 바캉스 - 시네필의 바캉스 본문

영화일기

자크 로지에의 바캉스 - 시네필의 바캉스

Hulot 2012. 8. 4. 21:46

자크 로지에와 바캉스의 영화들

- 시네필의 바캉스

 

 

 

 

1959년에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가 큰 성공을 거뒀다. 이에 자극받은 제작자 조르주 드 보르가르는 고다르에게 요즘 젊은 영화감독들 중에서 빨리 촬영하고 저예산으로 그처럼 기적을 만들어낼 감독 몇 명을 추천해 달라 제안한다. 고다르는 주저 없이 세 명을 골랐다. 아직까지는 단편을 만들었을 뿐인 신인 감독들. 자크 드미, 아네스 바르다, 그리고 자크 로지에. 자크 드미는 1961년에 <롤라>를, 아네스 바르다는 다음 해에 <5시에서 7시의 클레오>를, 그리고 자크 로지에는 뒤늦게 <아듀 필리핀>(1962)을 만들었다. 고다르가 이 세 명의 영화감독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가 궁금하지만, 단지 기이한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해변과 바캉스를 좋아한 감독이었다. 근작인 <바르다의 해변>에서 알 수 있듯 아네스 바르다는 자신의 심상을 일련의 해변들로 채워버린다. 실제로 남 프랑스 어촌에서 그녀는 첫 번째 영화인 <라 포앵 쿠르트로의 여행>(55)을 촬영했다. 바르다의 해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었다. 자크 드미는 낭트에서 태어나 도빌, 쉘부르, 칸느, 마르세이유, L.A. 등의 해변을 떠돌아다닌 작가였다. 마지막 남은 자크 로지에. 그는 로메르 이상으로 바캉스의 영화인이다. 데뷔작 <아듀 필리핀>을 시작으로 <오루에 쪽으로>(1973), <메인-오세안>(1985) 등의 세 편의 장편은 물론이고 단편 <블루 진>(1958)과 고다르의 <경멸>을 촬영하던 당시 바르도와 고다르의 관계를 담은 <바르도와 고다르>(1964), <파파라치>(1964)는 모두 해변가와 바캉스를 배경으로 한다. 바다와 섬, 바캉스를 왜 좋아하느냐의 질문에 로지에는 “바캉스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자유의 순간이다. 그리고 야외에서 촬영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바깥에서 촬영하기.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보는 것. 바캉스의 영화가 그러하다. 위대한 해변의 작가인 에릭 로메르도 그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첫 장편인 <사자좌>(1961)에서 로메르는 자신이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세느 강변과 물에 반사되는 햇빛의 인상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물과 하늘은 공기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소박한 배경이지만 그에게는 화면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원소였다. 자연을 더 풍성하게 담아내기 위해 그는 종종 촬영차 여름 해변에 내려갔다. <수집가>와 <클레르의 무릎>에서부터 <해변의 폴린느>를 거쳐 <여름 이야기>로 이어지는 바캉스의 영화들이 그렇다. 자연 덕분에 영화를 좋아한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유작인 <로맨스>(2007)를 만들면서 로메르는 원작의 무대인 포레 지방을 찾았다. 하지만, 산업개발로 자연파괴가 되어 동시녹음이 불가능해지자 새로운 촬영지를 찾기 위해 그는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바람과 자연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이 <로맨스>의 순수한 목적이기도 했기에 그랬다. 그에게 좋은 영화란 다만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할 뿐이다. 영화 작가의 의도나 계획과는 무관하게 다만 눈앞에 있는 자연의 생생함을 필름에 새겨 넣는 일이 중요하다(물론, 로메르의 영화에는 그런 자연 앞에 노출된 생의 불안상태가 날카롭게 새겨지기도 한다. 시선에 노출된 클레르와 폴린느의 무릎과 다리. 혹은 <녹색광선>에서처럼 고요한 숲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인물들이 그러하다). 노출된 인간,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기록하는 기계적인 특성이 예술 이전에, 우선 기계인 영화의 독특성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적인 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야생성이 로메르 영화의 특징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1986)의 첫 에피소드에서 낡은 헛간을 개조한 시골소녀 레네트의 방에 초대된 파리지앵 미라벨은 창으로 보이는 전원의 풍경을 바라보다 툭 한마디를 던진다. 완전히 야생적이야. 민속학을 전공한 학생임을 감안할 때 도시녀인 미라벨은 시골녀인 레네트와의 만남을 다른 문화에 속하는 인간과의 만남, 더 과장되게 말하자면 원시성과의 만남으로 느끼고 있다. 이런 원시성과 야생성은 웨스턴의 대지를 떠나 남태평양으로 건너간 존 웨인을 그린 <도노반의 산호초>(1963)나 사춘기 청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앙드레 테시네의 <야생갈대>(1994)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가 바캉스를 떠난다는 것은 세계의 풍부함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해변에 가져간다는 말이다. 바다는 없는 시골의 숲속이라 해도 상관은 없다. 요점은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듯 세계의 풍부함이 우리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고레에다 하로카즈는 언젠가 자신이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 작가임을 언급하며 세계의 풍부함과 만나는 도구로서 눈과 귀를 열어 두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바캉스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그런 태도를 존중한다. 작가의 구상에 개념적으로 선재하는 것들, 즉 시나리오, 대사, 데쿠파주, 스토리보드 등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수정되고 보완될 것이다. 배우의 현실, 장소와 공간, 빛, 소리들의 현전성을 구상에 맞게 통제하기보다는 풀어놓고 자유롭게 해야 한다. 현실에 기인한 원시적이고 천연의, 가공되지 않은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자신의 태도를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창의력은 항상 외부에서 온다. 내 영화는 나 자신과 외부의 진실 간의 만남에서 태어난다’. 바캉스 영화의 매혹은 이런 자연의 미학에서 기원한 것이다. 자크 로지에의 영화를 질투했던 트뤼포의 말을 변용하자면 뛰어난 바캉스의 영화는 촬영된 사건들의 무의미함과 우리들을 매혹하는 현실의 밀도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영화들이다.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자면 바캉스의 시간은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라면) 일년 중에 11개월은 사라졌다가 때가 되면 한 달간 나타나는 반복의 시간이다. 이를테면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조수의 순환처럼 자연스럽게 반복해 되돌아오는 시간. 바로, 시에스타의 시간이다. 2006년부터 기획해 매년 여름에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를 개최한 것은 그런 반복의 시간 감각에서 영화들을 소환하는 작업이었다. 올해는 제대로 바캉스의 영화들과 만나려 했다. 물론, 모든 현실의 여행이 그러하듯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것. 접촉한 영화들은 많지만 여행지는 현실의 잔고를 고려해야만 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여전히 미지의 작가인 자크 로지에의 해변에서 이 바캉스가 그래도 시작되었으면 한다. 물론 그의 영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트뤼포가 로지에의 첫 장편 데뷔작 <아듀 필리핀>을 두고 ‘누벨바그의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 말했을 때 그의 위치는 분명했다.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을 도시가 아닌 여름의 해변으로 끌고 갔을 때, 영화 만들기의 관습적 문법을 따르지 않는 로지에의 모험(빅토르 에리세와 더불어 거의 10년에 한 편씩 장편을 만든 고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로지에의 변함없는 무대는 해변이 되었다. 8월 말에 시작한 휴가를 즐기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장편인 <오루에 쪽으로>에는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구석이 없다. 지중해의 뜨거운 빛, 그것을 머금은 물결, 모래사장, 그리고 소녀들의 웃음이 전부다.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이 저주파 소리들로 가득한 영화라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도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소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필름에 담겨진 영화의 빛과 소리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이야기다.

 

이어지는 몇 편의 바캉스. 알랭 타네는 <백색도시>(1983)에서 리스본에 도착한 주인공 폴이 비추는 8밀리의 어슴푸레한 영상으로 대낮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그는 마을에 도착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다. 8미리 카메라에 담긴 영상 또한 특별할 것은 없다. 영화의 한 장면. 바에 들어가 카운터의 여성에게 맥주를 주문한 폴은 문득 벽에 걸린 시계가 거꾸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폴은 그녀에게 시계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녀는 엉뚱하게도 “아니요. 올바르게 움직이고 있어요. 반대로 세계가 거꾸로 움직이고 있죠”라 말한다. 시계를 모두 반대로 하면 세계도 올바르게 움직일 거라며. 폴이 돌아다니는 도시의 광경은 일종의 시네마틱한 사건과도 같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보고 감각하는 현실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차처럼 그를 색다른 삶으로 운송한다. 그리고, 두 편의 청춘의 이야기들. 때는 알제리 독립전쟁이 마지막을 맞이하던 1962년. 프랑스 남서부의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앙드레 테시네는 <야생갈대>(1994)에서 시대의 비극을 반영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젊음을 아름다운 자연과 빛으로 담아낸다. 장 으스타슈의 <나의 작은 연인들>(1974)은 그런 청춘 영화의 정점이다. 프랑스 남서부의 시골 마을 페삭(감독의 고향이기도 하다)을 배경으로 으스타슈는 부자유스러운 생에 노출된 어린 다니엘이 예민하게 감지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사회주의 붕괴 이후 기억상실증에 빠진 수구선수의 이상한 이야기를 다룬 난니 모레티의 <빨간 비둘기>(1989)는 바캉스처럼 텅 빈 존재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마지막은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난 아무 것에도,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바캉스를 보여주고 싶다. 그것은 무-존재의 순간. 그런 존재에 해당하는 여름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