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유일의 시네마테크 아트시네마는, 한 마디로 서울 유일의 영화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화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시네마테크를 안정적으로 보존하려는 영화계의 움직임이 2006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네마테크의 후원자 ‘친구들’ 중 한 명인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진심 어린 헌사를 싣는다.
짧은 글의 헌사.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자. 시네마테크는 우리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만일 이게 무너진다면 이 땅에서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 개소리다.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네마테크 없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찰리 파커의 사보이 레코딩을 들은 적 없는 재즈 애호가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엘비스 프레슬리의 선 세션을 들은 적 없는 록 매니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아르튀르 시나벨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녹음을 들은 적이 없으면서 고전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D. W. 그리피스의 <흩어진 꽃잎>,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결혼행진곡>, 칼 드레이어의 <집안의 주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10월>, 빅톨 셰스트롬의 <바람>, F. W. 무르나우의 <밤으로의 여행>, 두 편의 <증기선>(존 포드와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장 르누아르의 <성냥팔이 소녀>, 프랭크 로이드의 <씨 호크>, 라울 월시의 <영광의 대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미쳐버린 한 페이지>, 오즈 야스지로의 <비상선의 여자>, 조셉 폰 스턴버그의 <뉴욕의 부두>, 알프레드 히치콕의 <살인!>, 제임스 쿠르즈의 <활동사진의 머톤>, 프리츠 랑의 <스피오네>, 헨리 킹의 <스텔라 달라스>, 보리스 바르네트의 <모자상자를 갖고 온 소녀>, 레프 쿨레쇼프의 <법의 이름으로>, 장 엡스탕의 <어셔 가의 몰락>, 자크 카트랑의 <괴물들의 갤러리>, 킹 비더의 <빅 퍼레이드>, 에른스트 루비치의 <내게 다시 한 번 키스해주세요>, G. W. 파프스트의 <판도라의 상자>(나는 아트시네마로부터 받은 ‘백지수표’에서 2006년 1월에 함께 보고 싶은 영화로 우선 이 영화들을 떠올렸다. 왜냐 하면 이 목록은 나에게 일종의 고향 같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빠졌다) 중 단 한 편이라도 안 본 영화가 있다면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 그건 영화의 사랑에 대한 교양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들을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본 사람과만 영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보았을 때 적어도 매번 3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로소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서 얼마만큼 자신의 사랑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디서 할 수 있을까? 물론 당나귀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집에서 컴퓨터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감동을 받을 때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와 함께 그 순간 탄식의 한숨을 쉬고야 마는 그 숨소리를 듣고 싶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나와 함께 바로 이 순간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함께 나누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다. 이 위대한 영화들을 보는 순간, 시네마테크는 나에게 우주의 중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위대한 순간에 우리는 감동으로 연대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가 방어선이다. 이걸 지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