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감독과 배우들, 영화평론가들이 뭉쳤다. 서울 유일의 시네마테크 아트시네마의 지속적인 재정난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은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중 박찬욱 감독, 오승욱 감독, 류승완 감독과 김성욱 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를 초대해 대화를 나눴다. 영화를 보고 만든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들에게 시네마테크는 왜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대담 참석자 박찬욱 감독, 오승욱 감독, 류승완 감독, 김성욱 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진행 김용언, 허지웅 기자
FILM2.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박찬욱 감독 극장이 워낙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길래, 그러다 문이라도 닫게 되면 큰일이다 싶어 참여했다. 당장 프로그램이 부실해진다거나 하면 그게 우리 손해지. 오승욱 감독 맞다. 시네마테크가 없어지면 어디서 영화를 보나. 류승완 감독 나는 평생 회원 카드까지 있는데 문 닫으면 아까워서 큰일이다. 오 예전에 영화 아카데미 면접 시험을 보는데 다수의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꼽더라. 그때 시네마테크의 위력을 실감했다. 시네마테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FILM2.0 2000년대에 정식 개관한 시네마테크를 처음 찾았을 때의 감회가 모두 남달랐을 것 같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부연 설명을 하자면, 상영은 1999년부터 시작했다. 루이스 부뉘엘, 오손 웰스, 로베르 브레송, 에릭 로메르 등의 작품들을 상영하며 시네마테크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을 했고, 2002년 5월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전에는 문화학교 서울과 서울시네마테크로 분화돼 간헐적으로 이뤄지던 활동이 통합된 것이다. 박찬욱 감독 맞아, 오손 웰스 회고전을 찾아가서 봤던 게 기억난다. 시네코아에서 하지 않았었나? 처음에는 단발성 행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공간이 생기면서 정착이 되니까 한국이 정말 달라졌구나 싶었다. 도쿄에 있는 시네마테크를 그렇게 부러워했었는데 말이지. 오승욱 감독 하다못해 홍콩에도 있다.(웃음) 김성욱 프로그래머 하다못해 필리핀에도 있다.(웃음) 류승완 감독 나는 아트선재센터 시절에 시네마테크를 자주 찾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 때 <요짐보>와 <7인의 사무라이>를 필름으로 보고, 또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을 한꺼번에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와, 이런 세계가 다 있구나 싶었다. 브레송 영화를 볼 때도 비디오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극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관객들의 면면이다. 날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웃음) 매일 오던 분들만 계속해서 오는 거다. 도대체 뉴 페이스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분들이 취직을 하신 건지 점점 사라지더라. 극장에 온종일 죽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분들도 먹고살아야 할 텐데'라며 걱정했었는데, 정작 이 분들이 사라지니까 극장에 위기가 찾아오더라.(웃음) 오승욱 감독 막상 눈앞에 생기고 나니까 그 전에 시네마테크의 존재를 갈망했던 마음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 이제는 영화제들도 많아졌으니까. 류승완 감독 요즘은 영화들을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 동영상으로도 보고, DVD로도 보고... 필름으로 보는 맛이 전혀 다른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박찬욱 감독 동감한다. 난 로버트 알드리치의 <더티 더즌>을 비디오로 봤을 땐 그저 그런 오락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필름으로 다시 보고 나니 ‘내가 이 영화를 정말 보기는 했나’ 싶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 필름으로 보면 전혀 달라지는 영화들이 있다.
류승완 감독 유서 깊은 허리우드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도 있지 않나? 족발 냄새 나는 골목을 뚫고 지나가 예술영화를 보는 쾌락.(웃음) 박찬욱 감독 극장 건너편의 카바레 출입하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슬아슬한 정서! 오승욱 감독 엘리베이터 타고 함께 올라가 아줌마, 아저씨들은 카바레로, 우리는 극장으로 갈라져 향할 때의 그 정서 말이지. 왠지 은밀해 보이고, 무슨 범죄라도 벌어지는 것 같은 느낌. 류승완 감독 내 돈 내고 영화 보러 가는데 눈치가 보인다.(웃음) 오승욱 감독 낮에는 그런 느낌이 더 강렬해진다. 남들 다 일하는 낮 시간에 영화 보러 가는 것이나, 카바레 가는 것이나 둘 다 그다지 생산적인 활동은 아니거든. 이런 두 가지 성격이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죄의식을 동반한 영화 보기’ 말이다. 옛날 동시 상영 극장 주변에는 카바레도 있고 술집도 있어서 분위기가 참 묘했다. 난 아트선재센터 시절도 좋았지만 지금 허리우드극장 분위기가 더 좋다. 류승완 감독 극장 앞 카페에 앉아 있으면 재미있다. 극장 주변에 펼쳐진 안국동 일대를 내려다보면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을 두루 걱정하는 분들이 숱하게 많다는 걸 알 수 있다.(웃음) 오승욱 감독 얼마 전에 보니 카페 앞에 ‘사채업자들 출입 금지’라고 써 있더라. 옛날에 극장에서 꼬마들에게서 삥 뜯던 양아치들이 생각났다. 류승완 감독 그 분들이 나이 들어서 사채업자를...(웃음) 김성욱 프로그래머 종로 쪽 극장들이 모두 리모델링해서 재개관했지 않나. 환경이 그렇게 되면서 사채업자들이 갈 곳이 없어지니 우리 극장 앞으로 모여들더라. 류승완 감독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관람의 의미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겪고 체험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한 편의 영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박찬욱 감독 외국인들에게서 한국영화의 개성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영화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순서에 맞게 체계적으로 감상하거나 공부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회가 되는 대로 배웠기 때문에 그런 개성이 형성된 게 아닌가 싶다. B무비부터 보기 시작해 존 포드를 마흔 살이 넘어서 처음 보게 되니까, 우리가 만드는 영화들도 어딘가 특이해지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 맞다. 내가 장철이나 페킨파 영화 보고 열광할 때, 프랑스 애들은 장 르누아르 영화를 보고 있던 식이다. 류승완 감독 오우삼이 장 피에르 멜빌을 좋아했다라고만 알고 있다가 나중에 <사무라이>를 보고서야 ‘이게 진짜구나’ 싶었다. 박찬욱 감독 오우삼을 먼저 보고 샘 페킨파를 나중에 본다든가, 성룡을 먼저 알고 그 다음에 버스터 키튼을 알게 된다든가. 이런 식으로 거꾸로 역사를 거스르는 모습들이 재미있는 경험과 성향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류승완 감독 특히 우리 세대는 그 불균형이 매우 심하다. 40대인 선배들과 다르게,(웃음) 우리는 주로 비디오를 통해 모든 것을 보던 세대다. 박찬욱 감독 그런 경험들이 고전에 대한 아주 잘못된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조악한 환경에서 고전을 보면서 ‘저런 영화가 뭐가 좋을까’라는 잘못된 생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승욱 감독 시네마테크에서 필름으로 고전을 다시 보면서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일전에 <성난 황소>를 관람하면서 그런 충격을 받았다. 양 옆이 잘려 제대로 된 화면 비율을 감상할 수 없는 비디오 영상으로는 영화의 가치를 발견하기 힘들다.
FILM2.0 여기 모인 감독들은 B무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그런 취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살점과 피가 난무하는 것을 보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키우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웃음) 박찬욱 감독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웃음) 난 <러브스토리>를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다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류승완 감독 두 시간 동안 남자 여자 계속 이야기하는 영화, 정말 못 보겠다. 도대체 말이 안 되잖아. 그걸 왜 돈 들여서 두 시간 동안이나 보고 있어야 하나.(웃음) 박찬욱 감독 우리는 남녀가 장난치고 눈빛 교환하는 것 보고 있으면 왠지 창피해져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 부끄러워.(일동 폭소) 오승욱 감독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옛날부터 폭력에는 관대한 나라가 아니었나. 시대적인 부분을 감안해보면 우울한 군사독재 시대를 지나오면서 ‘이런 세상에서 순진한 사랑 놀음이 웬 말인가’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런 영화들, 왠지 낯설고 창피하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여기 모인 감독들은 한국영화 지평 위에서 볼 때 굉장히 새로운 세대다. 그 전의 감독들은 사실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자신의 영화적 취향에 대해 강력하게 표현하는 감독들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FILM2.0 자신의 취향으로부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그 안에 진정 나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성질이 존재할지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이를테면 무의식 중에 다른 영화를 따라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 말이다. 박찬욱 감독 난 한 번 본 영화들을 많이 잊어버리는 편이다. 옛날에는 영화를 본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지워져버린 것 같아 무척 슬펐다. 그런데 이제 영화를 직접 만드는 입장이 되고 나니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많이 봤어도 일부러 따라하지 않는 이상, 자기 영화에서 남의 것이 묻어나오진 않는다. 오승욱 감독 그에 버금가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런 장면에서는 저렇게도 표현을 하는구나’라며 참고를 할 뿐이지 그것을 모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류승완 감독 나 같은 경우는 하도 남의 영화를 베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무감각해졌다. 사실 좋은 장면은 베끼고 싶다. 이를테면 <포인트 블랭크>에서 구타하다가 지쳐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나서 “내가 빨리 먼저 베껴야지!”하고 소리질렀다.(웃음) 그런데 실제 따라해 보려고 하면 절대 그대로 나와주질 않는다. 배우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면 결과물이 같을 수 없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나는 당신들의 영화에서 60년대로부터 70년대로 넘어가던 순간의 미국영화의 정서를 느낀다. 과잉의 에너지 말이다. 비교될 만한 미국영화들과 당신들의 영화를 함께 상영하는 기획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 같은 경우도, 둘이 전혀 다른 영화 같지만 화면을 분할하는 운용의 방식을 비교해보면 참 재미있다. 박찬욱 감독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처음에는 주인공으로 고두심 선생을 고려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와 너무 비슷해질 것 같아 변경했다. 오승욱 감독 하늘 아래 과연 새로운 것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 내 생각은 다르다. 예술 작품은 모두 새롭다고 생각한다. 관점에 따라 모든 것들이 다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연기자가 다르고 주변의 환경이 다르며 감독의 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매번 다른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오승욱 감독 박 감독과 나 사이에 ‘새롭다’는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 것 같다. 물론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 안에 담기게 되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시각은 언제나 새로워야 한다. 하지만 영화적 구성의 형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강박관념은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FILM2.0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구나’하는 동질감이나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을 텐데. 나만의 스승을 찾았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오승욱 감독 시네마테크에서 한 감독의 열 편 이상 되는 작품을 한꺼번에 본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조망하고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체험은 창작자에게 영화를 계속 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다. 류승완 감독 안도감보다는 경외감을 더 느낀다.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봤던 B무비를 시네마테크에서 다시 보면서 어느 순간 존경스러워진다. 도대체 어떻게 알드리치는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스즈키 세이준이나 쇼 브라더스 영화를 다시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무술 영화인줄 알았는데 한 데 모아 보니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박찬욱 감독 정말 그렇다. 시네마테크의 회고전이나 기획전을 통해 접한 감독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정말 그 감독과 사귄 것 같고, 굉장히 잘 아는 사이인 것 같고. 오승욱 감독 알드리치 회고전을 전부 보고 나왔더니 그 양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더라.(웃음) 류승완 감독 보면 볼수록 많이 배운다. 실제로 시네마테크를 거치면서 최근 몇 년간 취향도 많이 바뀌었다. 박찬욱 감독 신작을 보러 개봉관에 가본 지 몇 년 됐다. 같은 시간을 투자해 시네마테크나 DVD로 500배 더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 수 있으니까. 오승욱 감독 난 사실 개봉관 공포증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엉망이고 재미없는 영화인데, 입추의 여지없이 꽉꽉 들어찬 관객들이 모두들 웃고 있을 때, 정말 낙오자가 된 느낌이다.(웃음) 이래서 영화감독을 할 수 있겠나 싶고. 나 혼자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무서웠다. 류승완 감독 그런데 이렇게 가다간 시네마테크는 ‘낙오자 집단이 영화 보는 곳’이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 같다.(일동 웃음) 대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FILM2.0 관객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평론가들이 영화의 유령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지 않나. 시네마테크에 오는 관객들 역시, 색이 바래서 존재가 희미해지는 옛날 고전 프린트들을 열렬하게 감상하는 유령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공간과 관객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관람이 이뤄지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모두들 영화 내용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지 않나. 그 동안 영화에 대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 왔는데 유독 영화를 보는 공간에 대한 담론은 전무했던 게 사실이다. 오승욱 감독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공간과 관객에 대한 느낌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고등학생 때 <디어 헌터>를 극장에서 봤을 때가 생각난다. 영화가 끝나고 멍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려는데, 저쪽 구석에 내 또래 남학생이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더라. 별다른 말을 건네지는 못했지만 큰 감동을 느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경험과 느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동질감이랄까. <디어 헌터>를 떠올리면 그때의 광경이 제일 먼저 기억난다. 박찬욱 감독 옛날에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 볼 때는 관객들 사이에 교류하는 정서가 매우 풍부했다. 류승완 감독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그런 정서들이 많았다. 시네코아나 문화학교 서울을 가도 영화를 본 뒤 토론하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세대 영화광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쟁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을 올리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좀 이상하다. 그 영화에 대한 자기 생각이 아니라 줄거리만 달랑 써 있을 때가 많다. 그 영화를 봤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것 같더라. 김성욱 프로그래머 공간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얼마 전 프랑스에 갔을 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이전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10년이 넘도록 이전 문제를 논의했다는 건 알았는데, 새로 장소를 옮기면서 굉장히 럭셔리한 성전처럼 바뀌었더라.(웃음) 동시에 제도적 공간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받았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그다지 제도적이지 못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결국 딜레마라는 생각이 든다. 류승완 감독 나는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이 고전에 치우치기보다는 우리 주변의 묻혀버린 감독들에 대한 재발견 위주로 편성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 감독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걸작으로만 채워나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졸작만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승욱 감독 흥행이라는 측면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처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안 그래도 신년을 맞이해 큰 기획을 생각 중이다. 한국의 젊은 감독들과 영화광들이 가장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는 마틴 스콜세지나 드 팔마 같은 감독의 특별전을 구상 중이다. 오승욱 감독 아무튼 시네마테크가 심각한 경영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활동하면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진 스펙트럼을 구축해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뿐이다. 예전에는 누가 감히 알드리치나 멜빌의 회고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FILM2.0 개인적으로 보고 싶은 회고전이 있다면? 박찬욱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영화제를 한번 했던가? 김성욱 프로그래머 아직 못했다. 예전에 로마까지 가서 노력해봤는데 잘 안 됐다. 김지운 감독은 파졸리니 감독 회고전을 했으면 하더라. 파졸리니 같은 경우는 저작권 소유자가 굉장히 까다로워서 전작 회고전을 개최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분이 돌아가시면서 회고전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오승욱 감독 존 포드의 두 번째 회고전과 하워드 혹스 전작, 그리고 무엇보다 기노시타 게이스케 회고전이 보고 싶다. 일본영화사를 보면 이 감독의 명성이 너무나 자자해서 많이 궁금했었는데, 이번 쇼치쿠100주년영화제 때 <나라야마 부시코>와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를 보고 나서야 왜 유명한지 이해가 갔다. 게이스케의 모든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류승완 감독 샘 페킨파와 존 프랑켄하이머의 영화들, 특히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 오승욱 감독 페킨파 좋지. 세르지오 레오네도 함께라면 더 좋겠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극장에서 완전판으로 보는 게 소원이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모두들 미국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박찬욱 감독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일본, 유럽영화에도 관심 많은데, 이탈리아의 마르코 벨로키오승욱 감독 같은 감독들의 영화제도 꼭 보고 싶다. 오승욱 감독 그동안 미국영화를 굉장히 폄하해 왔던 경향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50년대 미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대 영화들 속의 기이한 정서, 이를테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매카시즘에 대한 죄의식들이 영화 속에 암호처럼 박혀 있는 것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쾌락이 있다.
FILM2.0 마지막으로 이번 영화제에 추천했던 작품의 변을 부탁한다. 박찬욱 감독 돈 시겔의 <킬러>를 선택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순전히 리 마빈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팬클럽 회원이다. 오승욱 감독 나도 팬클럽 회원인데. 리 마빈,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웃음) 류승완 감독 난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를 골랐다. <지옥의 영웅들> DVD를 보다 서플먼트에 그 영화가 언급되길래 고른 것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볼 것 같아 아트시네마 쪽에 끈질기게 졸랐다. 예전에 박찬욱 선배가 <벤허> 10편과 <충격의 복도> 1편을 바꾸자고 하면 바꾸지 않겠다고. 그런데 <벤허>는 우리 아버지가 지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작품이다.(웃음)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하고 궁금해졌다. 오승욱 감독 난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갱들>이다. 예전에 아트시네마에서 <석양의 무법자>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경상도 아가씨가 대단히 노골적인 경상도 억양으로 영화의 오프닝 송을 흥얼대며 지나갔다. 내 인생에서 매우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웃음) 나와 20년 이상 차이 나는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이번에 <석양의 갱들>을 보고 나올 때 관객들이 이 영화의 오프닝 송을 흥얼대는 걸 꼭 듣고 싶다.
사진 김춘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