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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그녀 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성숙한 데뷔작 - 이숙경의 <어떤 개인 날> 본문

상상의 영화관

그녀 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성숙한 데뷔작 - 이숙경의 <어떤 개인 날>

Hulot 2009. 4. 17. 21:52


 

최근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제작과정을 통해 네 편의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서 개봉했다.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 고태정 감독의 <그녀들의 방>,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곽인근, 김일현 등 다섯 명의 감독이 만든 <제불찰 씨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장례식의 멤버>와 <어떤 개인 날>은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되어 상영된 바 있다.(<어떤 개인 날>은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들은 CGV 무비꼴라쥬 라인의 극장들을 비롯해 시네마상상마당 등에서 개봉해 순회상영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서울 및 지방의 아트하우스들을 돌며 상영될 계획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 영화들을 영화제작 워크숍 프로그램의 형태로 상영한 바 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래머이자 프레시안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김성욱 씨가 실사 극영화 세 편에 대한 리뷰를 3회에 걸쳐 차례로 싣는다. - 편집자

영화를 찍을 첫 번째 기회를 손에 넣은 영화감독에게는 첫 무대에 오른 배우만큼이나 일종의 열광적인 조급함이 있기 마련이다. 트뤼포는 이런 열광이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영화를 지금 찍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에 생기는 것이라 말했다. 그것은 정말 꿈같은 현실일 것이다. 이런, 정말 내가 영화를 찍고 있다니! 그런데, 이런 첫 영화의 열광적 조급함이 영화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강렬한 에너지와 열정이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파솔리니, 파스빈더의 첫 번째 영화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열정으로 가득한 데뷔작에 대한 평가는 매번 엇갈리기 마련이다. 정말 그(그녀)가 재능 있는 아마추어인지 아니면 창조적인 예술가인지, 단지 운이 좋은 경우인지 혹은 앞으로 계속 발전해갈 수 있는 작가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다른 경우들도 있다. 열광적 조급함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성숙한 작품이 데뷔작이 나오는 경우다. 마치 오래된 포도주를 처음 맛볼 때의 시굼한 맛처럼 영화에 숙성된 향이 이미 담겨 있는 경우다. 알랭 레네나 모리스 피알라의 데뷔작이 그랬다. 작품에 나이와 시간의 감취가 있는 이미 성인의 영화였다.


▲ 이숙경 감독의 장편데뷔작 <어떤 개인 날>은 천천히 한 여인을,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등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데뷔작에 관해 이러저러한 말을 꺼낸 것은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에 일종의 찬사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영화는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데뷔작이다. 이미 불혹을 쉬이 넘긴 나이에 그녀가 극영화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제와 테마가 아주 낯선 것도 아니다. 게다가 책과 다른 활동으로 그녀는 이와 비슷한 테마를 이미 전한 바 있다. 그녀의 단편영화인 <다시>도 30대 이혼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보고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연수원 안에서의 거의 살풀이와도 같은 긴 대화 장면은 논외로 하고 싶다. 놀라운 장면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이미 그녀가 영화 이전에 했던 것의 반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작 흥미로운 순간은 다른 곳에 있다. 40대 이혼녀인 주인공 보영이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강의를 듣는 그 또래의 여인들에게 글쓰기의 모델을 제시한다. 강의실의 전경, 창가에 한 여인이 우리를 등지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 그녀의 등 뒤로 거리의 풍경이 들어온다. 보영은 수강자들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천천히 오랫동안, 이 여자를 보세요. 그리고 그녀 앞의 풍경, 그리고 당신 마음속에 떠오르는 풍경에 관해 글을 쓰도록 하세요. 서두루지 말고, 오랫동안 응시를 하세요. 어떤 지점에서 무언가가 떠오를 거예요. 그럼 중단 없이 글을 쓰도록 하세요." 보영이 불쑥 내민 과제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던진 시선에의 질문이자 동시에 이숙경 감독이 데뷔작에서 해결해야만 했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한 여인을,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등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이숙경 감독이 카메라를 인물로 향하는 방식은 철저히 '등을 통한 관조'라 할 수 있다. 카메라를 정면이 아니라 배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연수원의 휴게실에서 보영이 강을 쳐다볼 때, 혹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옥상에서 빨래를 걸던 보영이 훤하게 눈에 드러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볼 때 카메라는 그녀의 뒷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보영의 딸이 눈이 먼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는 단순하지만 황홀함이 느껴지는 긴 장면이다. 보영의 딸은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가 외출을 한다고 하자 왠지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의 뒤를 몰래 따라나선다. 할아버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위험스럽게 스쳐가는 자동차들을 피해, 전철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을 거쳐 지하철 구내로 들어선다. 보영의 딸은 할아버지를 불안한 시선으로 뒤쫓는다. 이때 영화는 아주 일상적인 행위들 가운데 감각과 감정의 상이한 강렬함을 포착한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 움직일 때 이는 단순한 추격도, 행위의 나열도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액션으로 할아버지는 움직이고 아이는 이를 쳐다보며 움직이는데, 이는 몸을 함께 가져오면서 동시에 거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홀한 응시가 동반된 관계성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무언가 위태로운 현실을 보고 있다. 동시에 그 응시의 거리 안에서 미묘하게 형성되는 감정이 이들의 교류를 만들어낸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서 아이가 지하철 승강장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곁에 슬쩍 앉을 때,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는 의례적으로 자리를 피해 고쳐 앉는다. 하지만, 이 때 둘 사이에 기이한 친밀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순간은 어머니 보영이 영화의 후반부쯤에서 아이의 몸을 뒤에서 슬쩍 안을 때의 감정의 흐름과 닮았다. 아이는 종종 어머니를 슬쩍 지켜보곤 했는데, 이러한 응시와 행위의 거리 사이에서 형성된 감정이 이 둘의 몸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다.



영화의 또 다른 원칙은 '여분의 응시'라 부를 법한 컷의 느릿한 리듬이다. 이숙경 감독은 하나의 원칙처럼, 화면에서 인물이 사라진 후에도 풍경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재빨리 거두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영화의 리듬과 속도에 어떤 완급을 이뤄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쉬이 말을 건네듯이 천천히 보여주기를 바란 것이다. 초심자의 조급도 불안도 없다. 화면에서 인물이 사라져도 그 빈 화면에 무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다. 이는 인물의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려는 방식과 조화를 이룬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상영회에서 이숙경 감독은 이 영화가 일종의 '어른의 성장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나이 마흔에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네가, 그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마흔의 터널을 통과한 여자, 그걸 이미 넘어간 아버지, 그리고 이들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있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며, 잠깐 출연하고 사라져도 여전히 인물이 여운이 남겨지도록 영화를 만드는 것. 각자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남겨두는 것. 그녀의 영화는 이 시대의 수다스런 경향과는 다른 행로를 보인다.


▲ 아이는 눈이 먼 할아버지의 외출길을 불안한 시선으로 뒤쫓는다. 여기에는 몸의 움직임과 함께 동시에 거리가 도입되어 '황홀한 응시'가 동반된 관계성이 만들어진다.


이숙경 감독의 데뷔작이 영화아카데미의 장편영화제작과정을 통해 나왔다는 점을 부언하고 싶다. 이 영화가 영화적 실험을 거쳐 나왔다는 말은 아니다. 일종의 살아 있는 실험실에서 영화가 생산됐다는 점, 가령 시나리오를 쓰는 것부터 스태프를 상대하고, 배우를 만나고, 준비를 하고, 편집을 하는 모든 단계를 새로운 시스템에서 진행했다는 점을 말하고픈 것이다. 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제작과정을 통해 나온 두 편의 또 다른 작품인 고태정의 <그녀들의 방>과 백승빈의 <장례식의 멤버>도 비평적 논의가 필요한 수작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할 생각이다. 또 다른 영화들도 있다. 노영석의 <낮술>이나 양익준의 <똥파리>처럼 주류 영화제작 시스템의 바깥에서 주류 영화의 안이함을 무안하게 만드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역설이긴 하지만 영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상이 나빠질 때 좋은 영화들과 뛰어난 예술가들이 출현하곤 한다. 나쁜 세상이 마치 나쁜 영화들에서 비롯됐다는 듯이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부터 먼저 새롭게 손질한다. 그들 덕분에 우리의 눈이 한심한 현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성욱 cinefantome@naver.com)


/김성욱 영화평론가 


* 프레시안의 칼럼 ' 김성욱의 상상의 영화관'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