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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기의 러시아 영화들 - 미하일 칼라토초프, 라리사 세피트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본문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해빙기의 러시아 영화들에 대해 소개하고 싶다. 러시아 영화사에서 1934년은 중요한 변화의 해였다. 그 해, 소비에트 예술을 새롭게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러시아의 공식 예술 이념으로 선포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19세기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고 본질적으로 공산주의 계급 의식으로 무장된 영웅적인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했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발생하는데, 이를테면 이 시기에 영화 스튜디오들 또한 다른 산업과 똑같이 중앙 부서에 소속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관료 조직에 통합됐다. 자연스럽게 영화 예술의 창조적 작업에 대한 통제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영화 제작이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33년에서 1940년 사이에 소련에서는 380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가 어린이 영화와 케케묵은 방식으로 국가의 영광을 찬양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물들이었다. 이 중 61편은 혁명과 내전에 관한 영화였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게오르기 바실리예프의 <차파예프>(1934)다. 이 영화는 소비에트의 국제주의적, 혁명적 이데올로기에서 러시아 애국주의, 전통주의 이데올로기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작품이 됐다. 세계 혁명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제 일국 러시아를 보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영국혁명이 아니라 일국사회주의론이 영화 또한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제작 편수와 공개편수가 감소한 것은 검열에도 원인이 있었다. 당국은 시나리오에 엄청난 요구를 해왔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나게 성가신 일이었다. 스탈린은 심지어 1930년대 말부터 1953년까지 영화 한편 한편을 일일이 자기 눈으로 보고 공개 여부를 결정한 검열의 최고 수장이었다. 그리하여 영화사가인 마르크 페로가 지적하듯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소비에트 영화는 1930년대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세 집단, 즉 이데올로기적이고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요구하는 국가, 격조 높은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영화인들, 소비에트 영화산업의 소비자였던 일반대중들, 이 삼자의 어정쩡한 절충물이 되는 위기를 겪는다. 이런 상태에서 베르토프, 도브젠코, 푸도프킨,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소비에트 영화혁명의 주도자들이 정작 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추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 그리고 구소련 영화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가들에게 사활의 문제인 창작의 자유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그리하여, 사실주의로부터 일탈, 실험적인 시도를 벌인 작품들이 '형식주의'란 이름으로 단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30년대 후반에 '반형식주의 캠페인'은 벌판의 불처럼 퍼져갔고, 1935년에는 에이젠슈테인이 집요한 비판에 시달렸다. 1936년에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연출가 메이어홀드가 '형식주의자'로 낙인이 찍혔다. 메이어홀드가 1940년에 총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구소련의 예술계는 심각한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구소련의 영화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를 향해 제기된 연방의 모델인 소비에트와 영원의 러시아 간의 충돌을 겪었다. 1940년대 이래로 구소련의 영화들은 애국주의적 테마로 영원의 러시아를 찬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작품 중에 이런 변화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미하일 롬의 <러시아식 질문>을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평범한 드라마이지만 동시에 러시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제기한다. 영화는 러시아인의 시선으로 냉전시기의 미국을 바라보는 작품으로, 미국 저널리스트 해리가 겪는 곤경을 다룬다. 그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나서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러시아에서 경험한 일들을 근거로 러시아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평범한 미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부인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만큼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지하고 편협했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편집장 또한 그의 기획을 흥미롭게 받아들이지만 그가 해리의 책이 러시아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돈을 벌려고 진실을 숨겨야 할지 해리는 고민에 빠진다.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1957)와 더불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1962)이 나온 1960년대는 실로, 러시아 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 그리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런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작품중의 하나다. 이 두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말을 하고 싶다. 또 다른 사례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이란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와 파라쟈노프의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비견할 만한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벨로루시를 배경으로 독일군에 대항하는 소비에트 빨치산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명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마을에 보급투쟁을 나섰다가 독일군에게 포획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대독협력자인 러시아인 고문기술자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이들은 배신을 강요당한다. 배신과 명예, 생존과 희생 사이에서 갈등을 벌이던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한 명은 영웅적이고 종교적인 희생을 선택하지만 다른 이는 살아남으려 불가피한 배신을 한다.
<고양>에서 라리사 세피트코가 강조하는 것은 보편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생존과 희생의 문제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가 배경이지만 사건이 인간들 심연의 문제로 자리하면서 종교적인 테마가 또한 함께 작동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희생한 예수와 그를 배신한 유다의 알레고리가 있다. 하지만,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또한 통렬한 정치적 알레고리로도 보인다. 그녀는 인물들의 깊은 감정들, 그들의 고민, 심리적 충돌, 절망적인 느낌을 거대한 눈으로 뒤덮인 대지로 표현한다. 사막 같은 황무지의 느낌이다. 살을 에는 겨울의 추위로 인간의 물리적 고통은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물리적 환경이자 위기에 처한 인간의 영혼, 정신의 풍경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에 두 명의 빨치산 대원이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움직일 때 카메라는 빨치산 무리들에게서 갑자기 벗어나 저기 멀리 사라지는 두 명의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너무나 예외적인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에 마치 낙원(사실 이 표현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영화 첫 장면의 전투장면에서 보듯이 빨치산 무리들의 삶이란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의 휴식 동안 동료들이 음식을 나눠 먹는 순간, 카메라는 한 명 한 명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파솔리니의 <마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순간을 보여줄 때의 느낌을 갖게 한다. ) 에서 고립된 둘의 실존적 고행을 예감하게 한다. 영화 마지막의 처형 장면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죽은 이반의 눈을 통해 시체들을 보여줄 때의 끔찍한 순간만큼이나 충격적이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 그들의 처형을 지시한 독일군과 고문기술자의 얼굴, 저 멀리서 영문도 모른채 이 광경을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을 차례로 보여주는 클로즈업 또한 경이롭다. 위대한 얼굴의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대단한 걸작인데, 안타깝게도 라리사 셰피트코는 이 영화의 완성 후인 1979년,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물론, 60년대 이후 러시아 영화의 최고의 수확은 단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일 것이다. 러시아국립영화학교 최우수 졸업 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소년병의 이야기를 그린 <이반의 어린 시절>, 성화상 작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야기를 그린 <안드레이 류블로프>, 미지의 혹성에서 과거의 기억과 만나는 철학적인 SF영화인 <솔라리스>, 문명의 위기와 정신성의 문제를 표현한 <스토커>와 같은 작품이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다. 그의 출현은 사실 러시아 영화계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사의 전환의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그는 오손 웰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이 영화의 신세계를 창조하던 1950년대에 홀연 등장했다. 이제 막 알랭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시간을 정복하던 때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레네와 더불어(비록 스타일은 다르지만)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탐색하는 가장 탁월한 매체임을 보여주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중-후기작 대신에 초기작 두 편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다. <이반의 어린 시절>과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은 아이의 시선을 빌어 그의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에서 아스팔트를 깔고 있는 노동자에게 아이가 순진하게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에는 노동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 혹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접촉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일관된 테마가 압축되어 있다. 그는 거리의 삶과 예술을 연결하면서 예술의 진지함과 책임을 근본적으로 사유했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일생의 테마인 '유년기의 테마'가 담겨 있다. <이반의 어린시절>은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아동영화와 전쟁영화의 외관을 띠고 있지만 그가 추구한 '시적인 영화'라는 스타일적인 실험을 이뤄낸 작품이다. 이 영화가 196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는 이탈리아 공산당으로부터 '쁘띠 부르주아적인 영화'로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이 영화가 전통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을 보여준다며 격심한 찬반양론에 휘말린다. 역설적으로 당시 장 폴 사르트르가 이 영화를 '사회주의적인 초현실주의의 걸작'이라 변호했다. 그는 이 영화가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중의 한 편이라 말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일종의 '정신적 로드무비'에 가깝다. 무엇보다 내면에의 여행을 다룬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는데(<솔라리스>에서는 심지어 우주 저편의 세계를 여행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 도달해도 찾고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이다. 이러한 영혼의 탐색에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다. 그는 현대인이 신념이 부족하고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보았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의 발전이 영적인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 있는 것에 위기에 본질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삶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 영적인 본질을 재확인하는 것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다.
생애 8편의 영화를 남겼을 뿐이지만 그의 영화적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평론가인 제임스 콴트가 지적하듯이 그의 영화를 모방한 이들은 이후에 많았다. 물, 배회하는 개, 문명의 폐허, 황폐한 풍경, 구원의 제스처, 롱 테이크, 퇴색되고 탈색된 컬러 등이 카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영혼이 가득한 시심, 신비로운 움직임, 탐구와 고투의 감각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은 너무나 신비하고, 이상하고, 강력해서 설명 불가능한 아름다움에 결국 침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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