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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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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을 맞이하여

Hulot 2011. 8. 24. 04:17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을 맞이하며

 

큐브릭에 관한한 전설같은 많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영화를 만들면서 큐브릭은 촬영기술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고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백번이 넘는 테이크를 사용한다. 심지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니콜 키드만과 톰 크루즈가 거울 앞에서 함께 포옹하는 단 한 장면을 얻기 위해 일주일간 촬영했다고도 한다. 그에겐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큐브릭은 영화에 출연한 감독이기도 했던 시드니 폴락에게 “영화를 잘 만드는 가장 싼 방법은 테이크를 몇 번 더 가는 거야. 수백만 달러를 써서 준비하고 세트를 짓고 사람들을 고용하고 수개월을 걸려 각본을 쓰고, 또 어떤 때는 몇 년까지도 걸리지만, 사람들은 대여섯 번째 테이크에서 그냥 끝내 버리거든. 바보 같지 않나? 서너 번 더 시도하면 또 다른 장면을 얻을 수 있는데”라고 말했다.

 

1950년대 이후의 미국영화사에서 큐브릭은 대단히 독특한 작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영화경력 45년간 12편의 영화만을 만들었지만 그 대부분을 미국오락산업의 중심이 아닌 바깥에서 작업했다. 초기 서너 작품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제작 속도는 또한 무척이나 더뎠고, <시계태엽 오렌지>이후에 제작 간격은 점점 더 벌어졌다. 원작소설을 읽고 영화의 디테일을 준비하고, 완성된 영화의 편집과 심지어 외국에서 개봉하는 자신의 영화 포스터와 문구에까지 신경을 쓸 만큼 큐브릭은 강박적인 작업의 태도를 가졌기에 어쩔 수 없는 과작의 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매년 한 편 정도의 페이스로 영화를 만들었던 우디 알렌에게 그가 질투를 느꼈다고도 전해진다. 영화감독으로서 큐브릭은 완벽주의자, 거장, 은둔자란 별명을 얻었고 영화제작에서 촬영, 기술, 카메라 렌즈이 활용 등 아주 세부적인 것에까지 자신의 미의식을 관철한 사람이었다.

 

큐브릭은 오슨 웰스와 마찬가지로 스물다섯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됐고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어했다. 차이가 있다면 스튜디오에서 데뷔작을 치른 웰스와 달리 큐브릭은 친구와 친척으로부터 만 불을 빌려 아마추어적인 방식으로 <공포와 욕망>(1953)이란 데뷔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955년에 큐브릭은 마찬가지로 감독, 카메라, 사운드, 메이크업 등 영화 전반에 관여하면서 4만 불을 들여 <킬러의 키스>를 완성했다. 젊음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미국사회에서 큐브릭은 일약 스타가 됐고 덕분에 그는 32만 불을 들여 <킬링>(1956)이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다. 그의 영화 인생은 이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는데 당시 유명 배우였던 커크 더글라스를 주연으로 반전영화인 <영광의 길>(1957)을, 1960년에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큐브릭의 재능에 탄복한 커크 더글라스의 제안으로 <벤허>에 필적하는 예산을 들여 역사극 <스팔타커스>를 완성했다. 이 모든 일이 스물다섯에서 서른 즈음까지 일어난 일이었다.

 

<스팔타커스>를 제외하자면 큐브릭은 20대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했고, 독립적이고 견고하게 지성적인 방식으로 이미 1950년대에 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를 예고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그는 소수의 감독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제작과 마케팅에서의 예외적인 통제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고 ‘슈퍼스타’로서의 영화감독의 대열 그 맨 앞줄에 위치할 수 있었다. 세계를 표현하는 놀라운 시각성과 철학적 비전은 사람들의 지성을 자극했다.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폭력에의 충동, <샤이닝>(1980)의 시각에 대한 성찰,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초월성에 대한 깊은 사유는 원작의 깊이를 감안하더라도 큐브릭의 지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질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큐브릭은 ‘두뇌(세계)’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큐브릭의 기질 탓이었는지 1999년 그가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국에서 그의 영화를 필름으로 극장에서 상영하기란 쉽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개최되는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은 그 어떤 영화감독들의 회고전보다 좀 어렵고 더디게 진행된 프로그램이다. 때문에 큐브릭의 애호가라면 꼭 필름으로 극장에서 그의 영화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으면 한다. 내년은 게다가 큐브릭의 탄생 80주년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개봉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회고전은 그런 점에서 미리 한해 전에 그의 영화적 삶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그의 마지막 걸작 <아이즈 와이드 셧>이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쉬울 뿐이다.

 

1998년 스탠리 큐브릭은 ‘그리피스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자신의 영화적 삶을 그리피스의 작업과 이카로스의 노력에 견주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리피스는 너무 높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죠. 그렇지만 그의 행운의 날개는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밀랍과 깃털로 만든 날개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카로스처럼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서 날개가 모두 녹아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오늘날 그 어떤 감독보다 더 명성을 누렸던 그리피스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17년 동안 그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계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리피스의 생애와 이카로스의 이야기를 비교했지만 저는 항상 이 이야기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이카로스의 이야기가 반드시 교훈으로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너무 높이 날면 안 된다는 것으로요.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밀랍과 깃털을 집어치우고 더 튼튼한 날개를 만들면 된다라고요.”


더 튼튼한 날개를 만들어 비상하려 했던 큐브릭은 인류가 2001년을 맞이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큐브릭은 21세기에 도달하지 못했고 대신 그의 영화가 21세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마치 20세기의 유언처럼 전해지고 있다. 스타게이트를 통해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생의 영역으로 진화하고자 했던 큐브릭의 오디세이와 이제 만날 시간이다.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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