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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영화관

[전주국제영화제 리뷰] 치명적인 보기의 매혹

KIM SEONG UK 2012. 4. 21. 15:28

*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애서 '파열:고전영화의 붕괴'라는 섹션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에 몇 편의 리뷰를 썼다.  

<파멸 La Rupture>
: 치명적인 보기의 매혹

 

클로드 샤브롤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다. 이상한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령, 적극적인 시네필이라도 <파멸>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대의 진실도 성립된다. 이런 영화의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샤브롤의 팬이라 부를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영화를 시작한 이래로 샤브롤은 매년 한, 두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든 놀라운 생산성의 작가였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실천했을 뿐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타협이 불가피했다. 누벨바그의 동세대 작가들과 달리 샤브롤은 제작사나 투자사의 요구를 따라 감사하게 주문 제작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작품의 수준도 천차만별. 태작과 범작, 졸작과 걸작을 오가는 불규칙한 궤도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한다.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파멸>은 물론 발견을 필요로 하는 진주처럼 반짝이는 작품이다.

 

 

샤브롤에게는 그래서 여전히 숨겨진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의 영화적 형식에도 적용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위장의 형식이다. 이는 불가피한 것이자 고안된 것이다. 겨울의 작가라 불린 샤브롤은 부르주아 가족이 불안에 사로잡힐 때, 혹은 사랑의 결핍으로 고통을 느낄 때 그들이 어떤 (변태적인) 행동을 하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세계가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차갑게 담아낸다. 가차 없는 세계의 표정이 샤브롤의 현미경적인 시선에 때로는 가혹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포착된다. 파열은 위선적인 표면과 불가해한 심층 사이에서 벌어진다. 제목처럼 <파멸>은 이런 특징을 예시하는 작품이다. 아니, 충돌과 파열이 주제나 내용뿐만 아니라 필름의 표층으로까지 진행된다는 점에서 샤브롤의 가장 야심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영화의 도입부가 꽤나 충격적이다. 관객들은 허를 찔릴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 이런 식이다(스포일러에 유독 예민한 관객이라면 다음의 한 단락을 그냥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평온해 보이는 중산층 부르주아의 저택 외부가 보이고 곧이어 아침을 준비하는 엘렌과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하루의 일상일 뿐이다. 짧은 장면이 지나고 음식을 차리기 위해 엘렌이 움직이는 순간 화면 뒤쪽의 문이 열리면서 환자 같은 남편이 등장하면 모든 것이 급변한다. 그는 갑자기 아내를 때리고 아들을 벽에 집어던진다. 사건의 진행 속도가 워낙 빨라 우리의 지각과 이해가 수습될 시간이 없다. 엘렌이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

 

 

차근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복기하려는 순간, 이어지는 장면들은 가히 점입가경이다. 사건 이후 여인은 병원에 입원한 아이를 지근거리에서 간호하려 방을 얻는데, 이 집에는 종일 타로 게임을 즐기는 정체불명의 3인조 아주머니들, 정신박약인 안경 쓴 소녀, 연극 대사를 읊조리는 배우 등 모두가 이상한 인물뿐이다. 엘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버린다. 반복되는 공원의 알록달록한 풍선들이나 시공감이 상실된 화면의 연결에 이어 순진한 소녀가 포르노 필름에 자극받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화면의 불온함은 극에 달한다. 사건을 이해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파멸>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들은 모두 어떤 흔적들과 지표들이다. 표식들은 인물만큼이나 관객들의 추론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거짓된 입장들을 난무하게 만든다. 인물들 또한 마네킹처럼 텅 빈 내면을 지녔다. 그들은 변화와 순환성 안에서 기호들처럼 계속 대치되거나 치환되어 버린다(가령 여기에는 두 명의 엘렌이 있다). 영화의 라스트는 가히 명불허전이다.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필히 보는 것으로 말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