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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내가 만난 스즈키 세이준 본문
[Feature] 내가 만난 스즈키 세이준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
2002년 2월(18-25일)에 ‘문화학교 서울’의 주최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렸다. 기획자로서 나는 이미 팔순에 접어들고 있던 세이준 감독을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모두들 무모한 시도라고 여겼지만 결국 세이준 감독이 서울을 찾았다. 3박 4일 동안 그는 ‘삶의 원칙을 위반하는 예외적인 사건’이라면서도 기자회견과 강연,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감독들과 대담을 했다. 회고전은 성공적이었다. 2월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아트선재센터(아직 정식으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기 전이었다)를 대관해 개최한 회고전은 평균 객석점유율이 80%였고 6천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렸다. 단순한 흥행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저주받은 작가가 새롭게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 며칠간의 동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가혹한 조건을 딛고 태어난 새로운 영화미학은 어떤 기술이나 색다른 아이디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조금은 운명론 같은 아주 견고한 세계관과 태도 말이다.(김성욱)
창조의 원천,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린 첫 날의 마지막 회. <문신일대>가 상영된 후 관객들은 열광했다. 관객중의 몇 명은 영화를 보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상하게 웃긴다’고 말했다. 원래 세이준 감독이 유머가 있는 분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내용은 잘 이해가 안되더군요’라며 반문했다. 빨간 구두는 도대체 무엇인지, 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남자가 모래밭에 화투장을 뿌리며 경찰에게 끌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 남자가 살인에 연루되어 도피를 하는 장면에서 그를 뒤쫓는 빨간 구두의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그는 빨간 구두의 클로즈업으로 표현될 뿐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종의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우리의 시선은 매 순간 빨간 구두를 쫓아다닌다. 영화의 후반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빨간 구두는 또 다른 빨간 구두의 인물과 만나 멈칫 놀라고, 이내 관객들은 뒤집어진다. 도대체 빨간 구두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왜 빨간 구두여야 하는지는 대관절 알 길이 없다(물론 이 영화를 예민하게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무언가에 홀린 듯 빨간 구두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이다. 세이준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눈을 끌어당기고 당혹케 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창조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일지 궁금해 했다. 세이준을 만나는 것은 그런 비밀에 조금 다가설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그의 답변은 지극히 단순하고 솔직했다. ‘내 창조의 원천이 뭐냐고?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절에 대한 회상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문화학교 서울’의 초대에 응해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잠깐 주저했다. 서울에 올 때는 수행원과 함께 오겠지만 갈 때는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거기서 혼자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팔순에 접어든 그의 결정이 우리를 불안케 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지만 어쩌랴. 세이준은 반복을 싫어하는 감독이 아니던가. 갑자기 <동경방랑자>의 주인공처럼 기차에 몸을 싣고 유랑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고전이 열린 이튿날, 세이준 감독이 서울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도착한 그를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었다.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확 들어오는 할아버지였다. 털모자에 양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는 코닥 필름의 로고가 찍힌 긴 파카를 입은 그는 마치 이제 막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체류일정을 잠깐 확인한 후 함께 명동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매운 음식을 꺼려했지만 술과 담배를 즐겼고 백세주를 한 병 마신 후에는 한국 소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왜 <피스톨 오페라>에 <살인의 낙인>의 킬러 시시도 조를 기용하지 않았나요?” 예상대로 그건 비밀이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는 마치 ‘내 영화엔 비밀이란 없소. 네 멋대로 이해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이 다 닮았기에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심지어 인간의 노력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운명론자인가? 이름에 얽힌 비화를 들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본명은 스즈키 세이타로다. 그는 1950년대에 본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이름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친구들과 작명소를 찾아가 세이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8년, 그는 세이준이라는 이름으로 <암흑가의 미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작명소에 따지러 갔더니 새로운 이름은 10년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하게 10년 후인 1968년, 세이준은 닛카츠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씁쓸한 것일까.
<살인의 낙인>이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와 같은 해 개봉했고 짐 자무시가 나중에 <고스트 독>(1999)에서 이 두 편의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것에 대해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조금 지나서야 그는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 미국의 액션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했다. 샘 페킨파 감독을 말하는 것이냐 묻자, ‘그렇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좋은 감독 한 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문득 임권택 감독이 떠올랐다. <장군의 아들>에 관해 말했고 임권택 감독이 <유메지>처럼 화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자 그의 영화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감독들이 촬영소를 많이 활용하냐고 물었다. 세이준 감독에게 60년대 닛카츠의 촬영소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불행한 운명의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소는 미국의 3-4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처럼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월급을 받으며 매일 출근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고, 아침에 출근해 필요한 장면을 요구하면 전문적인 스태프들이 다 알아서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동시상영용 B급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는 전문화된 분업 체계를 통해 창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닛카츠에서 쫓겨난 후 독립 프로덕션에서 영화를 만들던 시절, 그에게 영화 만들기는 오히려 평범한 삶을 위배하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 되었다. 집에서 혼자 천장을 보거나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비현실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의 후기작들이 몽상적인 작품이 되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내 삶의 원칙과 위배되는 사건이다
그에게 예외적인 사건은 방한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공동기자회견이 있었다. 공동기자회견은 단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세이준 감독은 그런 자리를 원치 않았지만 자신을 초청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지난해에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이 열렸고 올해는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이 개최될 예정이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는 자신이 ‘오즈나 나루세처럼 이미 죽어버린 감독도, 예술 영화를 만든 감독도 아닌 그저 영화적 재미를 추구한 오락 영화를 만든 감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린 것에 대해 ‘아직 살아 있는데 회고전을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례식을 하는 기분’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기자회견장에서 세이준은 60년대의 일본 영화가 사양길에 있었고, 무국적 야쿠자 영화들이 만들어질 시기에 일주일에 두 편씩 상영하는 영화를 위해 20일에서 25일 정도의 제작기간 동안 영화를 만들었고, 오락 영화의 요소에 춤과 액션, 그리고 관객을 놀라게 하는 서스펜스를 섞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 기자가 ‘예술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예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화가 이렇다’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세이준은 기자 회견을 마치면서 자신은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런 식의 기자회견이 사실은 자신의 삶의 원칙을 위배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그에게서 무언가를 듣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세이준은 서울에서 자신의 삶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건을 단지 관객들을 위해 두 번이나 가졌다. 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세이준은 영화보다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공연장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적절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요일 오후, <살인의 낙인>은 일치감치 매진이 되었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갑자기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네마테크 서울이 개최한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 때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류학 입문>,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와 더불어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관객들은 사실 생뚱한 반응을 보였다. 이 예상치 않은 영화에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번 회고전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그때와 사뭇 달랐다. 주인공 시시도 조가 밥 냄새에 흠뻑 취할 때마다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이준은 <살인의 낙인>이 매진되었다고 말하자 정말이냐며 기뻐하면서도 당황했다. 이어 벌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이준은 내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한 관객이 ‘당신 영화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질문했고, 세이준은 ‘그건 버릇 같다.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말해 관객들을 감격(?)시켰다. 이게 정답이 아닐까? 정말 그는 그렇게 안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행사를 주관한 문화학교 서울의 스태프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세이준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분위기에 흥겨워했고, 요새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사무국장이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영화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자 ‘당신이야말로 진국’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때마침 그가 배우로 출연했던 영화 이야기가 나왔고, 세이준은 몇 해 전에 금성무가 출연한 <불야성>이라는 영화에서 야쿠자의 보스로 출연했다고 자랑을 털어놓았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당시 개봉 중이었던 <2009년 로스트 메모리스>에 잠깐 출연했다고 말하자 ‘대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어떻게 출연했을까’라며 농담을 했다.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을 보았냐고 누군가 질문했고 그는 처음엔 짐 자무시도 <고스트 독>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내 ‘영화 마지막에 지저분한 곳에서 주인공이 비참하게 죽는 영화가 그거냐’고 말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할 때 보았으며 짐 자무시와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자기라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을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최후를 맞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도 소주를 주문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스즈키 세이준은 2001년 유럽에서 영화 제작 제의가 있었지만 제작비 조달 문제로 영화 제작이 중지되었기에 ‘당장 계획 중인 영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시나리오가 준비된 영화가 무려 7편이나 있고, 그 중 한 편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보였다. 우리 모두는 그의 다음 영화와 즐겁게 만나고 싶었다. 한국의 노장 감독들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회고전에 참석한 스즈키 세이준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50여 년 동안 옹골차게 영화를 만들어온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한국에 팬이 많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데 왜 팬레터 한 장 없냐’고 물었고, ‘아마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와락 껴안는 등의 태도라도 있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 물론 그건 농담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끈질기게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은 어떤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그의 말을 빌자면 ‘영화에 의미가 없는데, 왜 의미를 만들려고 하냐’는 말처럼) 농담처럼 말한 본인의 버릇과도 같은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 말이 아니라 그런 태도들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스즈키 세이준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금요일 12시. 세이준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떠나기 전 그는 우리들에게 점심을 사먹으라며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그는 부산으로 가서, 그리고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이준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떠나기 전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겨주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렸던 2002년 2월, 영화주간지 '필름 2.0'에 썼던 글을 일부 수정해 다시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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