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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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영화관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 7인의 사무라이

KIM SEONG UK 2013. 6. 20. 13:37

 

 

사무라이의 길

 

<7인의 사무라이>는 16세기 일본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산적들에게 매년 식량과 여자를 약탈당한 산간의 농민들이 일곱 명의 사무라이를 고용해 산적과 싸우는 이야기다. 상영시간이 3시간 반에 달하는 이 영화는 당시 2억 엔이 넘는 제작비(당시 일반적인 영화의 7배에 달하는 예산)에 1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초대형 대작이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진정한 대작인 것은 이 영화가 이후 등장한 수많은 무협영화, 서부영화, 그리고 액션영화에 많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협녀>로 유명한 호금전 감독은 액션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로 <7인의 사무라이>를 꼽았다. 특히 그가 기억하는 장면은 사무라이 간베이가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으로 둔갑해 주먹밥을 들고 오두막에 들어가 아이를 인질로 잡은 도둑을 베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정작 중요한 사건을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영화 속 군중들처럼 바깥에서 오두막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호금전이 말하듯이 이 장면은 구로사와 감독이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1946)에 감화받아 구성한 장면이다. 보안관 와이어트 워프(헨리 폰다)가 술에 취한 인디언을 끌고 나오는 장면에서 존 포드 감독은 이와 유사한 연출을 이미 보여주었다. 구로사와는 존 포드처럼 액션이 벌어지는 사건을 화면의 바깥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한다.

 

액션에 정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연출 또한 흥미롭다. 가령 검의 달인인 규조를 보여주는 방식은 대부분 그렇다. 두목 간베이와 동료들이 사무라이를 모으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닐 때 그들은 규조가 대중들 앞에서 떠벌이 사무라이와 벌이는 겨루기를 본다. 이 장면에서 규조는 검을 뽑지도 않고 단지 적을 한참 노려보더니 “바보 같으니, 이미 승부는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상대의 모습과 상태만을 보고도 승부를 읽어낸 것이다. 이 과묵한 사무라이는 이후에도 영웅적인 풍모를 보여준다. 산적들이 마을을 침공할 때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산적들이 쏘아대는 총이 어느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지 몰라 곤란을 겪는다. 이때 규조는 자신이 적진에 가서 총을 한 정 훔쳐오겠다고 말한다. 그는 쏜살같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고, 카메라는 그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윽고 얼마 후, 규조는 보란 듯이 한 손에 총을 들고 임무를 완수한 채 마을로 되돌아온다. 그가 적진에서 어떻게 총을 훔쳤는지는 보여지지 않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활약을 상상할 여지가 더 많아진다. 반면, 어린애처럼 날뛰며 까불거리는 농부 출신의 사무라이 기쿠치요가 적진에서 총을 노획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상세히 보여준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최고의 전투 장면은 무엇보다 영화의 종결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진흙탕을 뒹굴면서 흙투성이가 되어 산적들과 벌이는 집단 전투 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장면에서 세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 같은 움직임을 서로 다른 거리와 각도로 촬영, 편집해 최후 격전의 냉혹한 분위기를 동적으로 그려낸다. 구로사와가 이런 기법을 활용한 것은 <7인의 사무라이>가 처음이었다. 그는 폭우 속에서 산적들이 농촌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종래의 방식대로 개별 장면들을 촬영할 경우 액션이 어떻게 반복되고 촬영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3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3대의 카메라로 3개의 앵글로 촬영해 전투 장면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시 할리우드도 놀랄 일이었다. 구로사와는 이 3대의 카메라를 각기 다르게 사용했는데, 가령 첫 번째 카메라는 롱 쇼트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위치에, 두 번째 카메라는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그리고 세 번째 카메라는 장면 전체를 따라 돌아다니며 순간들을 기록한다. 그러니 촬영 과정에서는 장면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영화 스태프들 또한 장면이 어떻게 편집될지 궁금해 편집 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편집에 우선권을 두는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감지된다. “나는 무언가를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무엇보다 내가 촬영하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결정되고 나면, 그 장면이 어떤 앵글로 촬영되어야 최선인지 생각한다. 소망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촬영감독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에게 그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함께 일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얻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구로사와는 또한 제작 디자이너를 두지 않았으며, 쇼트의 장면은 물론 영화에서의 동선을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그는 원래 화가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과 무사가 계급 간의 대립을 넘어 공통의 적에 맞서는 이야기이자 그런 공생의 한계를 또한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러한 점이 사극의 한계를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한다. 가령 이 영화가 공개되던 1954년은 일본이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해상자위대를 창설하던 때이다. 우익들이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제기하던 때이고,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공직에서 추방당한 우익 지도자들을 포함한 우익세력들이 일본사회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영화는 보수파의 군비증강 프로파간다로 환영받기도 했다. 영화에 담긴 패배의식(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사무라이들은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패배했다고 말한다)과 상喪의 의식은 패전 후의 상실감, 직업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귀환병들의 부랑자적 상태, 냉전 시기의 불안감과 보수적 심리 등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7인의 사무라이들이 상대하는 적들이 단지 악한들로 묘사될 뿐 분명한 설명이나 표상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적과 아군의 단순한 논리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구로사와 아키라는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비가시적 표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 말하지만). 물론 이러한 구도는 반대로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대중에의 계몽적 시도의 패배나 이상적인 공동체에 관한 꿈의 붕괴로 비춰지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런 점에서 기묘한 보편성을 얻어 여전히 회자되는 영화다.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