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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칼럼]타이페이 영화관을 돌아보며 본문
고적에 풍미를 더하기
지난 2월말. 시네마테크의 관계자들과 대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매년 지역의 시네마테크 관계자들과 함께 해외의 영화관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때마침 올해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대만의 필름아카이브(국가전영자료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의 영상자료원보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카이브의 관계자가 지난 해 타이페이 당대예술관(MOCA)에서 '호금전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호금전은 서극과 오우삼 등에 영향을 미친 홍콩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지난해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았었다.
사실 아카이브보다 더 흥미를 끌었던 것은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두 곳의 영화관이다. 사진에서만 보았던 대만의 가장 오래된 영화관을 찾았다. 타이페이의 명동이라 불리는 시먼딩(西門町)의 한 복판에 1908년에 세워진 붉은 벽돌의 ‘홍루극장紅樓劇場’이 있다. 팔괘조형의 특이한 외형의 이 극장은 한 때 무협영화, 서양영화, 시대극을 상영해 저렴한 입장료로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60년대 홍루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당시 학생들의 공통의 추억이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변의 도시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홍루극장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화재가 발생하는 시련을 겪었다. 새로운 도약을 맞게 된 것은 2007년 11월의 일이다. 당시 타이페이시 문화국은 시 문화기금회에 홍루극장의 운영 관리를 위탁해 문화적인 활동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했다. 극장은 물론이고, 전시실, 창작공방, 달빛 영화관, 노천카페 등의 다원적인 지구를 마련해 새로운 문화공간의 거점이 마련됐다. 이제 홍루극장은 영화관만이 아니라 창작의 중요한 공간이자 한 해 4백만명의 입장객이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또 다른 영화관은 단연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대표로 있는 ‘광점 타이페이 전영원光點台北電影院’이다. ‘대만전영문화협회’가 타이페이시 문화국의 위탁을 받아 경영과 관리를 하고 있는 영화관으로 1926년에 세워진 2층 건물의 흰 양옥 건물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미국 남부식민지 시대의 풍치가 돋보이는 이 건물은 1979년까지 대만주재 미국대사가 거주하던 공관으로 대만의 예술가나 작가를 초대했던 곳이기도 했다. 역사와 문화를 전하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였지만 대만과 미국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수 십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왔었다. 2002년에 타이페이시가 기업으로부터 문화기금을 제공받아 옛 대사관저의 건축물 본체를 수복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타이페이 마잉주 시장(그는 타이페이 영화제를 출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이 재직하던 시절이다. 2002년 11월 10일에 정식으로 개관해 대만영화문화협회가 경영과 유지를 위탁받아 영화 문화를 테마로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상영은 물론이고 감독과의 좌담회나 영화교육, 영화제, 감독과 관객과의 상호교류를 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들어서면 입구 오른편엔 예술가들이 만든 예쁜 물건들을 파는 ‘디자인 스팟Design Spot’의 공간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국내외 영화책과 DVD를 판매하는 작은 서점이 있다. 흰 벽면에 걸려있는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의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입구의 왼편에는 ‘가배시광’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다. 2층에는 강연이나 좌담회를 할 수 있는 다목적 홀과 회랑 전시관이 있고 ‘홍기구le ballon rouge’란 이름의 분위기 있는 와인바가 있다. 바깥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하며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차고와 발전실로 사용했던 공간을 개조한 미니씨어터는 88석의 영화관으로 매일 12시부터 저녁 12시까지 6편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마지막 상영이 대체로 9시에 한다.
대만에는 각 지방의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관이 있는데, 그 수가 대략 273개를 넘는다고 한다. 각각의 문화관은 테마에 맞춰 전시품도 다양한데 ‘광점 타이페이’는 영화를 테마로 한 문화관이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대만전영협회가 이 공간을 운영하는데, 이 협회는 사실 서울아트시네마와도 인연이 깊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 협회의 후원으로 두 차례 대만영화제(Taiwan Film Festival 台灣電影展)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한 도시, 세 가지 이야기’라는 주제로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차이 밍량의 대표작을 망라하는 제1회 대만 뉴웨이브 영화제를, 2008년에는 대만 현대사에 대한 탐구 속에서 새로운 영화미학의 지평을 넓혀온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그 후예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제2회 대만영화제가 열렸다. 현재 허우 샤오시엔은 이 협회의 대표를 맞고 있다.
운영자들의 말에 따르면 타이페이시에서 무상으로 공간을 제공했기에 임대료 등의 부담이 전혀 없다고 한다. 매년 진행되는 영화제에 대한 예산 지원도 있는데, 대부분의 운영비는 극장의 수입보다는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등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들로 충당하고 있다. 대부분 18세에서 35세의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작지만 아름다운 이 공간은 가히 영화 관계자나 문화 예술을 좋아하는 시민들을 위한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사실, 대만에 관한 관광안내책자 한 구석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 영화관은 영화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타이페이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한번쯤은 들리는 명소이기도 하다.
대만의 두 영화관을 둘러보면서 마찬가지로 오래된 고적을 새로운 영화관으로 개조하는 파리의 사례가 떠올랐다. 파리시는 2003년에 룩소 극장Le Louxor이라는 아주 오래된 극장을 현대문화유산으로 인정해 사들였다. 1921년에 세워진 극장이니 무성영화부터 상영을 해왔던 곳이다. 1983년까지 이 극장은 그럭저럭 운영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기술적인 변화와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매머드급의 극장의 멸종은 불가피했다. 처음에는 댄스클럽으로 업종이 바뀌었다가 이 또한 1987년부터는 영업을 중단하고 룩소 극장은 폐관 절차를 밟았다. 룩소 극장의 새로눈 변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3년의 일로, 파리시는 이 오래된 시네마의 성전을 사들여 새로운 세기에 걸맞게 혁신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룩소 극장은 이제 세 개의 상영관, 전시공간, 테라스를 갖춘 카페로 구성된 복합영화관으로 바뀌었고, 올해 대망의 재개관을 맞을 예정이라 한다.
대만과 파리의 사례에 비추어보면 서울은 고적으로서의 영화관에 대한 인식이 미비하고 영화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도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영화관은 대중문화와 여가 활동의 중심적인 공간이었다. 저렴한 비용과 지근거리의 근접성으로 영화관은 상대적으로 다른 경쟁 상대를 갖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80년대 이래로 새로운 소비사회의 도래와 문화 활동의 다변화, 여가의 증가로 변화가 발생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을 대신한 텔레비전과 인터넷, 뉴미디어의 등장, 그리고 무엇보다 90년대 중반이래로 진행된 무차별적인 멀티플렉스의 확장이 변화의 주역이었다. 1998년 처음 강변CGV가 개관한 이래로 단관극장의 빙하기가 시작됐고 21세기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매머드 단관극장들의 절멸이 마무리됐다.
기억하건대 가장 끔찍하고 상징적인 사건은 2005년 12월에 일어났다. 굴삭기로 당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예정이던 스카라 극장의 기습적인 철거가 있던 해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경우 치를 복잡한 절차 때문에 건물 소유주가 극장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1935년에 건립돼 1946년에 수도극장으로 개명했고, 1962년에 스카라 극장으로 재개관한 후 근 40여년을 끌어왔던 스카라 극장이 그렇게 사라졌다. 스카라 극장을 마지막으로 한 때 서울의 명소였던 매머드 극장들(대부분 1000석이 넘었던 단관 극장들)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913년에 세워진 국도극장이 1999년 호텔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철거된 이래로, 1907년에 세워진 종로의 단성사는 2005년에 멀티플렉스로 개장했다가 폐관중이고, 그 옆의 피카디리 극장은 2004년에 멀티플렉스로 개장했다. 1956년 충무로에 개장한 대한극장은 당시 1,900석의 객석을 갖추고 70미리 영화를 상영했던 최고의 영화관 중 하나였다. 대한극장도 마찬가지로 2001년에 멀티플렉스로 변모를 꾀했다.
축제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일상의 연장안에 있던 영화관을 도시의 기억으로 유지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혁신을 이뤄내는 일에는 의지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마도 스카라 극장을 서울의 영화문화의 고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극장, 국도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혹은 명보극장도 가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새로운 영화의 공간을 찾고 마련해야만 한다. 대만의 경우 그것은 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평상시의 생활에 영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그런 장소에 공공성을 지닌 영화관이 마련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지난해 서울시의 영화관객수는 사상 최대로 5천 6백만을 넘었다. 일인당 5.5편의 영화를 본 셈이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400개가 넘는 스크린은 모두 멀티플렉스가 보유한 것으로, 독립적인 예술영화관의 스크린 수는 채 10여개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시민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형마트의 독과점보다 더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도시의 산책 중에, 친구와의 약속에, 책을 뒤적거리는 서점의 방문 후에, 혹은 늦은 퇴근 후에 식사를 마치고도 다양한 영화들과 만날 수 있는 영화관. 박물관이나 마을의 도서관처럼 공공성을 지닌 영화관. 서울시가 나선다면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문화재청 월간 소식지 《문화재 사랑》 3월호에 실었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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