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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시네마테크를 말하다 본문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네마테크“
- 대담: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김경민(서울아트시네마 관객)
[편집자 주] <ACT!> 기획대담이 일곱 번째를 맞습니다. 이번 주제는 시네마테크입니다. 사실 서울아트시네마는 설립초기부터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과 운영진의 열정만으로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서울시의 결정에 대한 소회와 함께 그 동안의 운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만났습니다. 함께 대담을 진행한 김경민씨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열렬한 관객이자 영화를 공부하는 영화학도입니다. 부디 이번 대담을 통해 우리에게 시네마테크는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보고 시네마테크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크게는 정부/서울시에 대한 지원 요구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차마 묻지는 못했지만 아주 커다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예컨대 영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시네마테크란 과연 무엇일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보니, 우리의 ‘안내자’들은(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표현을 빌려왔다) 저 질문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고 나름의 답까지 만들어가고 계신 듯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이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을까?
김경민: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신데,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1993년도에 ‘문화학교 서울’을 처음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갔었다. 그 때 마침 연구팀을 모집하고 있어서 조영각씨와 영화보고 세미나를 하는 연구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문화학교서울은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영화의 비디오에 자막을 넣어 상영하는 비디오테크였는데, 지금 미디액트를 하는 이주훈, 서독제의 조영각, 인디스토리의 대표 곽용수 씨, 그리고 지금 평론활동을 하는 김형석 씨 등이 운영위원을 하고 있었다. 당시 20대 중후반의 나이였을 때인데, 이들은 열정을 지닌 선구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비디오테크를 했기에 나도 거기서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내게 그들은 안내자였던 것이다. 점차 이런 프로그램을 극장에서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극장에서 필름으로 트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마침 1995년이 지나가면서 국제영화제도 만들어지고 필름으로 부산, 전주 등에서 영화 상영을 하면서, 더불어 자막을 투사하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필름으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필름 상영을 극장에서 시작한 것이 1999년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연구소장을 했다. 연구소 이름이 소니마쥬 Son-Image였다. 그때 고다르의 영화를 좋아했었으니. 1999년에는 영화신문 ‘Fantome’을 발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유령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2000년도 들어서는 필름으로 작가들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루이스 부뉴엘, 에릭 로메르, 스즈키 세이준, 파솔리니 회고전 등을 당시 아트선재 지하 극장을 빌려 상영했다. 2002년 즈음 서울에서 필름 영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트선재센터 정도였기에, 이 공간을 거점으로 해서 일 년에 몇 차례 영화제를 했던 것을 1년 내내 상설적으로 하게 된 것이 2002년 5월에 정식으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했을 때부터이다. 시네마테크를 하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기보다는 비디오테크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의 영화일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의아한 것은 이전 세대는 왜 시네마테크를 할 생각이 없었을까, 이다. 시네필에 대한 말들이 있는데, 영화보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라는 생각들. 그런데 이걸 단계론적으로 말하곤 하는데, 나는 이 말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트뤼포나 고다르의 말도 영화 보는 것과 만드는 것, 글을 쓰는 것이 사실 다 동일하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이걸 단계나, 수준의 문제로 말하는 이들을 나는 의심한다. 물론, 나는 영화 창작자, 예술가들을 어쩌면 관객보다 더 존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중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시네마테크에 대한 시도를 전 세대가 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시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우리도 하지 않았나?), 그걸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 세대에서 유일하게 그걸 하려했던 이는 예전 ‘필름 포럼’을 하던 임재철 씨이다. 그 외의 분들은 소망을 내비쳤던 이들은 있었지만 실행은 하지 않았다.
김경민: 관객으로 문화학교 서울을 다닐 때는 학생이었나?
김성욱: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는 공부이외에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취미생활이었다.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으로, 그리고 예술이나 영화로 이끌렸다고 생각한다. 문화학교 서울이 내가 살던 사당동에 있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서 영화보고 사람들이랑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멀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90년대 초에 영화에 전보다 더 빠져들었던 것은 그것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이니 조직이니 이런 곳에서 일탈하고 싶었다. 80년대를 거친 이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랄까. 그런데 도리어 문화학교서울에서 공동성의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공동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에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들었던 것 같다. 새로운 방식의 관계성이 있었다. 집단적인 목표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로 같이 묶여있었다. 처음에는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자료들을 다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한국어로 볼 수 있는 영화 자료들, 책은 제한적이었다. 영화 책이나 자료를 보기 위해 남산에 있는 영진위 자료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갔었고, 한양대 도서관이나 서강대 도서관도 돌아다녔다. 비디오는 몇 년 보다 보면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외국 방송에서 보거나 위성방송, 특히 일본의 BS2가 그야말로 영화 천국이었다. 틀어주는 영화를 매일 녹화하고, 모든 가능한 방식을 다 동원해 영화를 봤던 거다.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뒤의 일이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경민: 2002년에 ‘시네마테크 협의회’가 나오고 같은 해에 소격동에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 했다. 당시의 영화계 분위기나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그 당시에는 고전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는 것이 교양쯤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90년대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끝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같은 해에는 미디액트도 개관했다. 90년대 비디오테크 세대들이 꿈꿨던 것들이 대중적으로 구체화되는 시대였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이미 시네마테크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마련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필름의 점차적인 소멸화와 디지털과 뉴미디어의 도래에 따른 극장관람 환경, 시네필 문화의 변화들을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는 세기말에 시작해, 21세기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시네마테크를 시작했다. 새로운 물결이었지만 뒤늦게 도착했기에 사실 처음부터 시대의 변화들과 마주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김경민: 그러면 협의회가 출범하고 극장이 개관했을 때 정부의 지원은 없었나?
김성욱: 초기에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서 극장 임대료를 지원받았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비용이 발생하는데, 예컨대 상영료(저작권료), 자막비용 등이 들어간다. 상영료는 영화의 저작권과 관련되는데, 이것이 21세기에 시네마테크를 시작하면서 부딪힌 꽤 큰 문제이다. 말하자면, 디지털화의 진행에 따라 도리어 저작권 관리 강화에 의해 상영의 난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영화를 소유의 관념에서 해방하는 곳이다. 영화가 예술이라면 그것은 문학이나 미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보여져야만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의 상영을 제한하는 저작권(소유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영화의 상품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저작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CJ가 저작권을 갖는 한국영화들도 상영하곤 하는데,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도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메이저 영화사들이나 과거의 영화사들은 자사 영화의 상품적 가치를 지키는 저작권을 강경하게 유지하는 반면 그것의 공유권에는 관심이 덜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쁜 결과들이 초래된다. 비싼 저작권 때문에 상영이 어렵다. 가령,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틀기가 어렵다. 영화의 공공권, 즉 관객들의 영화에의 자유로운 접근을 위해서는 지원이 불가피하다.
김경민: 소격동에서 현재의 낙원상가로 극장이 이전할 때 극장 재계약 문제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나?
김성욱: 지하극장의 보수를 위해서 2005년부터는 임대를 할 수 없다는 통보가 있었다. 계약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개보수를 안 한 것 같다.(웃음) 그 이후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시네마테크의 극장도 영화만큼이나 역사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스크린과 공간을 거쳐간 영화의 흔적이란 게 있다. 시네마테크가 오래된 극장인데, 여기서 하다가 다른 데서 몇 년하고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그 극장에 가보지는 않았다. 여전히 계단이나 출입구 모양이 비슷한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파스빈더의 회고전을 했었고, 차이 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소격동 시절의 마지막 상영으로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안녕, 용문객잔>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남았다. 차이밍량은 영화관의 오래된 의자가 할머니와 자신의 정서적 유대의 끈이라 말했는데, 우리는 그런 유대의 끈을 당시에 잃어버렸다. 큰 손실이었다.
김경민: 재개관 후 2006년에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됐는데, 당시 ‘다양성 영화 복합 상영관’이 추진되다가 무산이 되었다. 2006년의 시네마테크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다.
김성욱: 당시 재개약을 못하면서 옮길 상영관을 바로 찾지는 못했다. 그 때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이름으로 처음 성명을 냈다.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면서 극장을 자주 왔던 감독들이 있었다. 관객처럼 영화를 보러 왔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사태에 관심을 보였고, 2005년 초에 현재 낙원상가로 공간을 옮기면서 이들과 몇 가지 고민들을 공유했다. 첫째, 시네마테크의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둘째가 지원에 대한 거다. 정상적으로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극장에 자주 오던 영화감독들과 시네마테크를 홍보도 하고 전용관 마련에 대한 요구를 하는 영화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니 영화제 제목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라고 명명했다. 2006년 1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다. 그 해에 ‘시네바캉스’라는 행사도 여름에 시작했다. 서울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고전영화를 보기 위해 시작했다. 2007년에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전용관 논의가 시작되고 복합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됐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영진위 위원장이 바뀌며 예산이 사라지게 되었다. 논의의 주체로 시네마테크가 있었다면 아마도 진행이 빨랐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때에 우리는 주체가 아니었다. 논의 테이블에 들어간 적도 없다. 그 이후에는 전용관에 대한 논의가 실종되었다. 당시 시가 시민들을 위한 영화공간으로서 시네마테크를 지원하고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데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해 요청이 있었는데, 공식적인 화답은 작년에야 있었다.
김경민: 시네마테크라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공공성을 가지는 것이고, 왜 정부의 지원을 필요로하는지의 근거를 만들어야할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근거를 만들어가야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무비콜라주가 다양성영화지원을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시네마테크가 다양성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라고 하면, 그런 곳들과의 차별성이 사라질 것이고 한편으로 영상자료원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을지. 이 사이에서 시네마테크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김성욱: 2002년의 개관의 시점에서 보자면 그 때 영상자료원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고, 예술영화관이 몇 곳 있었지만 시네마테크와는 성격이 달랐다. 시네마테크에의 지원은 영화의 역사에서 이미 오래된 근거를 갖고 있다. 그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대한 지원만큼이나 근거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대로 다양성영화관 지원이라는 명목의 지원근거가 더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이라는 표현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백화점이 동네 슈퍼보다 사실 물건이 더 다양하지 않나? 예술영화관에 대한 지원, 그것도 대기업의 지배력 안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극장에 대한 지원은 타당하다. 시네마테크는 말하자면 비영리 법인에 의한 공공상영관이다. 국가의 공적 공간과 시장의 개인이나 기업의 영화관들과는 다르다. 나는 현재의 시네마테크가 1970년대 독일 공공영화관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독일에서는 비영리적 성격의 공공영화관이 시장의 예술영화관과 달리 상영관의 추구목표, 운영방식, 상영작 선정과 상영 방식의 비상업적 성격에서 공익성을 지니고 있기에 공익에 이바지하는 문화예술단체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의 대상이 된다고 결정했다.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의 근거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적 지원의 근거로 말해지는 공공성과 관련해서는 알다시피 세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첫째, 국가와 관련되는 ‘공적’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의 누군가가 아닌 모든 이들에 관계되는 ‘공통적’이라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는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하다는 의미의 ‘공개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공공성은 국가가 관리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공공성이라는 것은 공통적이면서 공개성에 있는 대안적인 ‘공공성’이다. 요즘의 문제는 자칫 공공성을 국가의 문제로 돌리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공공기관에 수익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마련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관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대안적인, 혹은 대항적인 공공권을 말한다.
정책적 지원과 관련해서는 이중적인 생각은 있다. 정책적인 지원이라는 것이 정책지원자들의 합리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기준점이 다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정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나? 판단은 아마도 국가나 정부가 하겠지만, 가령 지금까지 시는 시네마테크를 지원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정당한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운영이 어려워서 지원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이런 영역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의 대상이 될 만한지 판단의 요구를 계속 해왔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말했지만, 서울의 스크린 수가 460여개가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들이다. 이중 예술영화관의 스크린은 손꼽을 정도이고, 공공상영관이라 말할 수 있는 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두 곳이다. 비교하자면, 파리는 서울보다 인구수는 네 배나 적고, 영화관객수도 절반 정도인데(서울은 5천 6백만, 파리는 2천 7백만), 민관 영화관이 150개, 그중 예술영화관이 90여개이다. 이 차이는 심각하다.
김경민: 그렇다면 그 차이들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김성욱: 역사적인 배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이런 영화관들은 이미 3-40년대에, 그리고 60, 70년대부터 등장했다. 한국에서 6,70년대는 불모지였다. 지금의 예술영화관들은 90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영화문화운동들도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성의 차이가 이런 환경적인 차이를 만든 것 같다. 90년대는 그런데 영화 소비의 가속화 현상들, 즉 멀티플렉스를 통한 가속화가 한국에서 빨리 진행됐던 시기다. 그러다보니 멀티플렉스를 통한 영화의 소비가 진행되고, 이 속에서 독립영화들이나 고전영화를 상영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화관을 영화문화의 중요한 장소로 여기는 인식이 없었던 탓도 있다. 이건 우리들의 문제다. 영화의 상업성에 관심을 보인 이들이나 영화관을 생각했지, 상대적으로 영화예술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 영화관을 문화공간으로 인식하는 게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김경민: 비교적 최근의 일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다. 2013년 여름에 박원순 시장이 청책 토론회를 열었는데, 그때 선생님도 가신 것으로 안다. 거기서 어떤 말들이 나왔고 진행이 어떻게 됐는지?
김성욱: 발제가 있었고, 토론이라기보다는 자유발언 형식이었다.
김경민: 그때 서울시가 어떤 답변을 하기도 했는지.
김성욱: 그렇지는 않고 듣기만 했다.
김경민: 당시에 나왔던 요구사항은?
김성욱: 그때가 공식적으로 서울시와 이야기할 수 있는 첫 자리였다. 서울시의 영화 정책이 공공성의 지원에 있다는 것이었고, 시네마테크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과 공간에 대한 지원의 이야기가 있었다. 변영주 감독, 정윤철 감독 등의 영화감독들의 제안 발언들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안들도 있었기 때문에. 시네마테크와 관련해서 시의 지원과 새로운 공간 마련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김경민: 전용관을 실제로 추진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이상한 걸 해보자는 이야기도 나왔고.(웃음)
김성욱: 어떤 거 이상한 거?
김경민: 로슈포르 노래를 부르면서 코스튬도 맞추고 그래서 개관식에 5분만 달라고. (웃음) 그러다 최근에 예산이 부결이 됐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리고 14년도에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계획 자체가 안 나와있다. 그 얘기를 들으시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신지?
김성욱: 전용관은 시네마테크를 위한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간의 의미이자, 새로운 공간을 말한다. 2002년도에 서울에서 시네마테크가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뒤늦은 거다. 21세기의 상황이라는 것이 멀티플렉스 환경,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등의 변화가 있었기에 해외에서는 이미 새로운 관객층을 흡수하고, 교육과 전시 등을 위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다. 파리, 뉴욕, 온타리오, 등등 여러 도시에서 시네마테크를 위한 신축 건물의 요구가 있었고, 또 새롭게 마련됐다. 우리의 경우는 현재의 조건이 시설도 낙후되어있고 영사장비도 부실하고, 매년 임대를 하는 불안정성의 문제가 있기에 제대로 된 상영설비를 갖춘 공간을 요구하는 것이고, 또한 십여년 동안의 활동에서 새롭게 필요한(사실은 설립 당시부터 있어야만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공간들, 이를테면 자료실이라던가,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의 수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시네마테크의 공간 마련에 소극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는 2010년부터 서울시의 지원과 함께 공간 마련에 대해 요청을 했었다. 2011년도에 조례제정을 했었고, 시의 지원을 촉구했는데, 최근에야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전용관을 마련하겠다는 시의 대답과 의지 표명은 있었지만 아직 예산 반영이 되지는 않았기에 낙관할 수는 없다.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문제를 시가 어떻게 해해나갈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가령, 아직까지도 시와 시네마테크간에 어떤 합의나 논의를 이뤄낸 것은 아니다. 가령, 시의 정책결정자들이 공식적으로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한 적이 없다. 꼭 이 곳에 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다만, 시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시네마테크를 건립할 것임을 몇 차례 공표했고, 지난 해에는 이와 관련한 용역조사가 있었다. 최근에는 서울영상위에서 여러 영화 단체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복합상영관의 부지와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시네마테크의 이전이라 생각하지만, 시는 이와 관련해서 모호한 입장이며 전체적인 논의가 시네마테크가 아니라 복합관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여러 영화단체들이나 기관들이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생각보다 공간의 규모가 커졌고, 그 만큼 건립의 진행, 운영과 관련한 논의, 공간에의 참여방식, 지원의 방식 등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이 유사한 복합관의 논의가 2007년에도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결국 무산되었다. 배가 바다로 가야지 산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김경민: 아트시네마 직원들의 근무 햇수가 길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것도 앞선 문제들과 상관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성욱: 업무적인 불안정성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그 부분들을 객관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010년도 이전까지는 그래도 조금 더 지속성이 있었다. 그런데 2010년도를 넘어가면서 많이 바뀌었다. 작년부터는 또 어느 정도의 지속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2009년을 넘어가면서는 상당히 많은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예산 지원의 중단이나 공모제나 이런 문제들은 일을 해왔던 이들에게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게 한다. 시네마테크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외국에서도 시네마테크 실무자들의 기본 덕목을 열정이라 말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열정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안정성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일을 계속 지속해나갈 수 있는 임금 같은 경제적인 조건이 큰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인 사실이다. 고용의 안정성을 어떻게 지켜나갈지는 큰 문제다.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극장을 찾으면 좋겠다, 동시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분야에서도 전문성의 영역이 큰데 불안정성이 생기면서 사람이 바뀌는 건 문제다. 예를 들어 영사기사, 매표, 수표라는 것도 실제로는 외국의 영화관에 가도 몇 년 만에 가도 똑같은 사람이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변함없음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성이 있다. 여전히 그것이 존속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내 발길이 머물지 않아도 무언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있어야만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설사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그것이 존재 해야만 하는 필요성. 그것은 사회적인 필요성이지, 시장의 관점에서는 아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폐기처분되어 버리는데, 시네마테크가 빨리 폐기처분 되어져버렸던 영화들을 보존하고 상영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영화가 최종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쟁과 시장 가치 안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면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똑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지속성 여부도 포함되어야 한다.
김경민: 몇 년 전에 인터뷰 하신 것을 찾아봤다. 당시에 여러 예를 들어주셨다. 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도 (정부, 프랑스 영진위 지원 80%, 관객수입 20%), 뉴욕의 필름포럼과도 (기부금 50%, 포드재단 융자와 티켓 수입 50%) 다른 방식의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모델’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그런 모델이란 어떤 것인가?
김성욱: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나 시의 지원이 최소한 50%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국가의 지원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미국은 시장주의가 있는데, 시장주의라 하더라도 펀드라던가 민간기업, 재단의 지원이 구조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은 기업이 그런 지원을 하지 않고, 한다 해도 직접 운영을 하려 한다는게 문제다. 따라서 미국처럼 민간의 지원이나 후원의 퍼센트가 높을 수는 없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구조로 보면 정부 지원이 30%다. 민간 영역이 70% 이상인데, 이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현실적으로 이 공간의 공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다. 시네마테크는 관객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할 수 없는 구조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제도 관객 수로 충당하지는 않지 않는가? 공적지원의 방향은 유럽과 미국의 중간정도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 2002년부터 개관했지만, 시는 한 번도 지원을 한 적이 없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의 시민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을 해왔던 건데, 시의 공적 지원이 없었다는 것은 지원을 받을 만한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가 충분히 정상적인 판단을 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경민: 지금 시점에서 영화나 문화 안에서 영화의 공공성이라는 것을 두고 봤을 때 지금 현재 시네마테크는 어떤 위치에 있고, 앞으로는 어떤 자리를 지켜야할까?
김성욱: 예전에도 말했던 적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시네마테크를 전위라 생각하는데, 틀린 말은 아닐테지만 사실 후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업적 가치를 소진한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으니, 영화가 실효성을 다 소진한 뒤에도 영화가 남을 장소이다. 우리는 뒤 쪽에 있다. 영화의 뒤를 지켜두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뒤의 세대들을 위한 장소로서도 더 적극적인 기능을 했으면 한다.
김경민: 작년부터 서울 아트시네마 내의 에디터 모임이 사라진 것으로 안다. 녹취 자활이 따로 뽑히고 있어서 내심 놀랐다. 아까도 새로운 세대의 교육에 대해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제 생각에 에디터 모임은 (잘 진행됐을 경우에) 다음의 시네마테크 세대를 배출할 수도 있을테고, 지금과 같은 시네마테크 문제에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모임일 것 같은데 어떤 속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성욱: 양면적인 게 있는 것 같다. 참여하는 사람도 적극적이어야 하고, 극장에서도 어느 정도 지원이 있어야 한다. 생각들은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진행하기가 힘든 것 같다. 생각보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바쁜 것 같다. (웃음) 전념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되어야 전념을 할 텐데, 그 조건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우니, 악순환이 있다. 나는 반응의 연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A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면 B에서는 A로 오는 것만은 아니고 B 안에서 A라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갈지를 생각하는 것. 나는 극장에 모든 사람들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럴 만큼 영화관도 크지 않다. 사람들이 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꼭 가지 않더라도 극장이 여전히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들에 어떻게 반응해갈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은 언제나 한다. 그렇게 자발적인 참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참여를 어떻게 지원할지는 고민이다.
요즈음에는 작은 영화공동체들 이런 부분과 같이 어떻게 연계를 해서 서포팅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영화공동체 끼리의 네트워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은 공동체의 네트워크들 말이다.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집단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런 소규모 집단과 시네마테크는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지. 소규모 공동체를 하는 이들을 만나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여전히 작은 규모의 모임에서 어떤 식으로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김주현: 최근에 다른 관심?
김성욱: 시네마테크 아카데미는 계속 생각하고 있다. 거창해 보이는데 (웃음) 일종의 대안영화학교이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을 거치지 않아도 영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교. 등록금도 비싸니 모두 대학에 갈 수는 없다. 비평스쿨도 있을 수 있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같이 영화제작을 해보는 일종의 시민학교이다. 아이들을 위한 시네마테크도 생각한다. 몇 번 시도를 했는데, 현재 공간에서는 힘들다. 나는 영화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 제도화되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그런 제도적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영화를 만나고, 보고, 만들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네마테크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주현: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은 한 장면을 꼽자면?
김성욱: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아무래도 2010년도, 영진위의 공모제와 지원 중단에 따라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후원에 나섰던 일이다. 그때의 판단은 우리는 공모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현실적 판단은 아니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공모제에 참여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공모를 할 권리가 있는지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시네마테크가 지속되는 것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우리는 극장을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지속되려면 이제 지원이 필요했다. 만약 당시에 관객들의 지원이 없어 이 공간이 사라진다면 그것에 대해 서글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민적 영역에서 충분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니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네마테크는 중단되지 않았고 남았다. 당시에 영화인들이 후원을 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동시에 관객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때의 일이 시네마테크에 대한 이 사회에서의 시민권 획득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공적 영역에서 화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개인의 후원으로 이곳이 남아야만 할 것인가. 서울의 관객들은 지난 12년 동안 충분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가 시민들의 노력에, 그들의 요구에 화답을 보일 때이다. □
[ACT! 88호 기획대담 2014.03.31]
진행 및 정리: 김경민(서울아트시네마 관객),
김주현(ACT!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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