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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아다치 마사오 인터뷰 본문
5월 11일 오후 3시, <약칭 연쇄살인마> 상영 후에 아다치 마사오 감독과 화상을 통한 대담이 진행된다. 그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입국이 불허되어 있기에 안타깝지만 다른 나라의 관객과 직접 이야기할 수 없다. 2005년 ‘영화=운동’이라는 주제로 ‘영화와 혁명’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일본언더그라운드 시네마’ 섹션에서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를 소개할 때에도 한국 관객과 직접 대화할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장소와 시간에 의존하던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접근이 탈영토화, 탈시간화되었기에, 우리는 이제 그와 화상을 통해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만큼의 새로운 위험도 있지만 변화에 따른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도 있다.
여전히 아다치 마사오 감독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서, 2005년 ‘영화와 혁명 특별전’에 맞춰 한국 관객을 위해 아다치 마사오 감독과 인터뷰했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내일 일본 영화의 ‘풍경론’에 대해 강연을 할 예정인 히라사와 고가 특별전의 카탈로그를 위해 그와 인터뷰를 했었다. 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말투를 그대로 옮긴 번역은,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행사 때 통역을 하기도 했던 후지이 다케시씨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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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혁명 특별전 카탈로그(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발간)
(2005.7.27-8.15) pp.24-33.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 인테뷰[인터뷰어: 히라사와 고(平澤剛)]
-일본 독립영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세계적으로 보아도 꽤 이른 시기에 시작된 것 같습니다. 특히 학생영화연구회로는 니혼대(日本大) 영화연구회(이하 영연으로 줄임)가 1958년에 <못과 양말의 대화>를 찍은 바 있습니다. 이 시기에 집단제작이라는 형태로 독립영화가 제작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1960년이라는 이른 단계에서 일미안보투쟁이라는 전후 일본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사건이 있고 소위 좌익이라고 인식되었던 공산당의 전향 문제도 있고 해서 50년대 후반에는 신좌파적인 학생조직인 분트(Bund: 공산주의자동맹)가 등장합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술운동 또한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 아다치 씨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아다치: 당시 독립영화 하면 공산당계열의 선전영화 정도밖에 없었어요. 사적 영화(private film)라는 것은 시작됐었지만 운동적으로 집단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의 자주제작이라는 것은 없었죠. 니혼대 예술학부라는 영화를 공부하는 곳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영화에는 집중하고 있었죠. 나는 늦게 참여했는데, 영화라는 것은 원래 계획이라는 것이 있는데 전혀 그것과 무관하게 만들고 있어서 저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건 엄청난 거였어요. 그리고 2년 쯤 지나서 60년 안보투쟁이 일어나서 투쟁 속에서 공산당이 말도 안되는 역할을 해서 우리 학생들은 심하게 당했어요. 그래서, 신좌파라는 정치성을 명확히 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운동이나 방법을 찾는 것으로 자주제작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극영화로는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와 요시다 기주(吉田喜重) 등 쇼치쿠(松竹) 누벨바그가 등장해서 그들도 같이 연구모임에 참여했던 것 같은데요?
아다치: 기록영화작가협회 정례 공부모임 같은데 나와서 싸우곤 했죠. 기록영화나 홍보영화가 주된 영역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마쓰모토 씨는 정치성보다도 미학적인 실험을 중심으로 발언했었어요. 한편 오시마 씨가 <일본의 밤과 안개>(1960)에서 영화산업 속의 정치, 영화 작가의 정치문제라는 것을 제출한 것은 정말로 충격적이었어요. 내 입장에서는 영연이 괴멸되고 새 영연으로 바뀌었을 때, 오시마 등이 <사랑과 희망의 거리>(1959)로 선열하게 등장했으면서도 <일본의 밤과 안개>를 계기로 쇼치쿠에서 뛰쳐나온다는 아주 명쾌한 사태가 동시에 일어난 거니까요. 나는 쇼치쿠 누벨바그라는 것은 공부모임 같은 것을 해서 집단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원래 따로따로 놀았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죠.
일미안보투쟁이 패배하고 나서도 신좌파의 새로운 운동이 다시 일어서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게 정치적으로는 있었어요. 패배는 했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제 다 깨야 된다는 것이 기조로서 계속 있었고 나 자신도 그랬어요. 그와 동시에 영화적으로는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약간 기울어져 있어서 영화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과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있고 해서 영화에 관여하는 폭이 아주 넓어진 시대였던 것 같아요. 그만큼 표현양식이나 영상미와 같은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었죠. 그게 대강 68년쯤까지는 계속돼요. 생각해보면 영화운동적인 실천이라는 것은 참 오래 지속됐어요. 싸잡아서 말할 수는 없지만 큰 영화사가 만드는 영화도 포함해서 누벨바그 계열의 작가들, 언더나 독립영화 사람들이 정말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66년에 와카마츠(若松)프로덕션에 참여를 하셨는데 핑크영화를 선택하신 이유는요?
아다치: 영연이나 새 영연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보통 영화사에 들어가서 그런 영화를 만드는데 뭔가 재미없다, 아니다 하는 게 있었어요. 아무래도 오시마 씨 같은 사람들처럼 스스로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부터 다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죠. 그래서 조노우치 씨를 비롯한 사람들이 VAN영화과학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일했었어요. 굳이 나눌 필요도 없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실제로 영화를 제작해서 승부해야 된다는 감바라 씨와 영화라는 것은 자유로운 방법과 힘을 지녔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찍으면 된다는 조노우치 씨로, 구체적으로는 감바라 씨가 자금을 벌기 위해 광고회사를 차려서 성공하긴 했는데 흑자도산을 해요.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때 개인으로 돌아간다는 것밖에 해답을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당시 잘 나가던 핑크영화가 재미있는 영역일 것 같다는 것과 억지로 새 영연 시절의 친구에게 끌려갔다는 것이 계기가 됐어요. 실제로 내가 시작할 무렵에는 와카마츠 코지(若松孝二) 씨는 국욕영화라고 불린 <벽 속의 비사(秘事)>(1965)를 찍고 있고 경시청에 적발된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 같은 사람이 표현 탄압이라고 난리치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전혀 달라서 그것은 새로운 체험이었어요. 핑크영화의 거장이라고 불리던 와카마츠가 다른 영화들을 다 능가할 만큼 작품을 양산하고 있어서 뭔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정력적이면서도 반(反)권력이면 뭐든지 괜찮다는 너그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해보기로 마음먹고 여러 가지 제안하면 와카마츠는 뭐든지 재미있어 하면서 같이 해요. 영화가 망해가고 텔레비전이 통제받기 시작한 무렵에 핑크영화라는 것은 유연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역으로서 아주 컸어요…와카마츠가 없었더라면 핑크영화는 단순한 상업주의에 그쳤을 거예요.
-당시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문제공투회의’가 있었는데 와카마쓰프로덕션과 창조사가 중심이었고 또 그것이 <약칭․연쇄사살마>로 이어진 거죠?
아다치: 중심이라기보다 굳이 말하자면 처음부터 참여했었다는 거죠. 세이준공투라는 것은 구도가 명확했어요. 닛가쓰라는 제작사가 있고 저작권은 거기가 소유하고 세이준 씨는 단지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고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한다. 그리고 가와키타 가즈코(川喜多和子) 씨들의 씨네클럽이 세이준 영화라는 이유로 닛가쓰에서 필름 대여를 거절당한 거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시작됐으니까 영화제작사에 대한 항의활동이었죠. 다만 공산당이 노조를 통해 경영진에 참여한 곳이라서 닛가쓰에 항의한다 하면 영화계 노조에서는 아무도 안나와요. 감독협회도 자기들이 보복당해서 굶게 될 게 뻔하니까 가만히 있죠. 좌파적인 운동조직이나 단체가 전혀 관여하지 않던 시기에 감독들 중에서 오시마와 와카마쓰가 상영운동 쪽에서 나온 투쟁은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한 거예요. 우리는 프리랜서의 영화감독이고 자기들이 프로덕션을 가졌으니까 처음부터 참여할 수 있었어요. 여러 공식적인 단체들이 외면하니까 신좌파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지만 공산당계열이 보이콧을 한 것뿐이에요. 그러다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관계자들도 같이 하자고 해서 오히려 엄청나게 고조됐어요. 나중에는 감독협회도 참여하게 됐고. 사실은 운동이라든가 그런 것에 전혀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세인준 씨가 하지 말라고 그럴까봐 걱정했는데 여러분이 그러신다면 나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해줬어요. 이것도 참 좋았죠.
-당시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문제공투회의’에서 아다치 씨는 표현 즉 행동자라고 제기하고 영화비평가인 마쓰다 마사오(松田政男)가 영화=운동론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비평전선이 구축되고 <약칭․연쇄사살마>, 제2차 『영화비평』으로 이어지죠?
아다치: 68년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비평정신이며 그것을 강화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사사키 마모루 씨, 마쓰다 씨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시작했을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비평의 교류, 논쟁의 장을 만들려는 것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려고 했어요.
<약칭․연쇄사살마>는 제2차 『영화비평』을 창간하기 전에 실제로 영화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 해서 사사키 씨가 제작자금은 대준다고 하니까 자기들의 입장에서도 현대라는 시대에서도 큰 주제는 나가야마 노리오(永山則夫)니까 그것을 찍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완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기존의 제작배급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만들어도 상영을 안해도 된다는 식으로 대충 합의를 보고 시작했어요. 시나리오헌팅으로 일본을 다 돌아가면서 나가야마란 나가야마 개인이며 우리 하나하나다 하는 게 있어서 그것을 주제로 해야 한다는 데서 합의를 봤어요.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를 찍는 생각으로 시작하자고 해서 바로 아바시리(網走)부터 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가야마가 다닌 도시를 쫓아가면 어디나 비슷비슷한 도시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가, 눈앞의 풍경은 그림엽서처럼 예쁜데 말이에요. 그런데 거꾸로 그렇게 예쁘기 때문에 답답한 거라고 깨닫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나가야마의 적이 아니었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이 풍경을 통해 나가야마의 이미지를, 우리 자신을 따져보자는 식으로 방법론화시켜나갔죠.
-1970년의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섹스 잭>(1970)과 <능욕당한 백의>(1967)가 초대받았고 돌아오는 길에 와카마츠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으로 가셨죠. 60년대 중반부터 프란츠 파농이나 체 게바라를 중심으로 일본에도 제3세계주의가 도입되고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의 등장도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은 아직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눈을 돌리는 영화인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아다치: 이런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공투운동이라는 것은 확실히 크겠지만 패배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함께 한다는 입장에 서기는 하지만 68년, 69년으로 절정에 이르는 가운데 기분으로는 패배할지라도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공중납치 같은 것을 68년부터 시작한 팔레스타인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세계와의 동시성과 같은 얘기를 한다면,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중국 여인(La Chinoise)>(1967), <동풍(Le Vent d'est)>(1968) 등이 들어오고 이어서 지가 베르토프 집단(Groupe Dziga Vertov)이라든가 브라질의 글라우베르 로샤(Glauber Rocha) 같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세계 각지의 첨예한 이론도 소개됐는데 동시대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아다치: 다 비슷한 것을 하고 있구나 했어요. 시대의 사상이 각각의 자리에서 비슷하게 같은 지점에 와있는 것 같다는 감각이 있어서 그것은 정말 훌륭했어요. 오시마가 68년 파리의 5월에 같이 있으려고 했을 때부터 아주 명확했어요. 그런 사상은 유럽이든 미국이든 아시아든 확실히 같을 거라는 거죠. 한국에서는 60년대 후반은 군부독재 아래서 상황이 아주 심했지만 반드시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했었고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오시마는 한국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한국도 틀림없이 동시대 속에 있어서 지금의 관점에서 말하면 4․19부터 민주화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해서 그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공투(共鬪)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고다르라면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대로 나오는 작품이 수다스럽게 시대의 사상을 계속 이야기하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살상에 대해서는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조반유리(造反有理)라든가 그런 점에서는 매우 친근한 거였죠. 베르토프집단이라는 것은 영연 시절에 비슷한 것을 하려 한 일이 있었고 조노우치 씨가 그렇게 자칭한 일까지 있었어요. 그리고 세이준공투 그룹이 그것을 수입하고 공개했다는 것을 더욱 대단한 일이었죠.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을 유럽이 받아들이겠는가 하면 그런 일을 없을 것 같은데 아시아인은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칸에 가서 알게 됐는데 글라우버 로샤라든가 그런 사람들도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은 자주 교류를 했던 모양인데 일본과는 없었어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오시마 씨죠. 그것은 파리의 5월이라든가 포스트베트남을 향한 아시아인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일 거예요. 특히 한반도라는 존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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