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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 무덤의 시학 본문
*이 글은 2014년 '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때에 맞춰서 썼던 글이다. 십년 만에 '202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존 포드의 영화를 상영하는 기회가 생겼다. 미야케 쇼의 추천작으로 상영하는데, 그 가운데 <순례여행>(1933)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첫 상영하는 날이라 예전 포드의 영화 속 무덤에 대해 다뤘던 글을 떠올라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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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의 영화에 관해 많은 평자들이 대체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존 포드의 영화에서 무덤과 묘비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그의 특별한 시학에 제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무덤과 묘비는 최소한 모뉴먼트 밸리를 언급하는 것만큼의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런 무덤의 시학에 대해 언제든 다시 고쳐 쓰게 될 짧은 생각의 글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포드 서부극의 시원의 풍경으로, 인간을 소형화하는 광경이자 초원이 시작하는 세계이고 장엄한 무한성의 숭고이며 인간의 가능성의 장을 제공하고 잠재적인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풍경이라면, 무덤과 묘비는 대체로 인간의 작은 기억들의 흔적이 간직된 가족묘들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신전에 가까운 자연의 건축물이라면 무덤과 묘비는 인간의 쪽에 있다. 여기서 무덤은 단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학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행동과 표상의 시학이다. 가령, 무덤 앞에서 인물들은 무언가를 고백하고 결심한다. 이는 또한 역사의 시학으로, 무덤과 묘비는 인간 삶의, 공동체의 무덤이다. 존 포드 영화의 인물들의 여정은 언제나 이런 두 개의 무덤을 통과해 나가는데, 마찬가지로 포드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우리 또한 이 여정을 밟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존 포드를 서부극의 거장이라 말하는 것이 요즘은 도리어 불경한 말처럼 들리지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서부극이 아니었다면 그의 영화에 그토록 매혹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서부의 풍경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러하다. 서부극은 오직 미국 작가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적인 장르였고, 포드의 작품 가운데 비서부극이 때로는 서부극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더라도 동시대 할리우드 감독들과 비교 불가능한 작품으로 남게 된 그의 압도적인 유산은 결국 서부극이다. 포드의 작가성을 고유한 것이라 말하더라도 상대화될 수 없는 포드의 세계가 근원적으로 서부에서 기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선택 이전에 아메리카라는 대지가 불가피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미국 영화가 태생적으로 국민적인 역사에 고유의 성격, 신념을 이룬 전통에 일련의 새로운 해석을 형성하도록 요청받았다면 - 영화가 민족국가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과제 - 하나의 예술이 국민 전체와 동일성을 이루는 풍경만큼이나 광대한 문제를 다루는 서사시로서의 서부극은 불가피했다. 서부극의 과제는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구축으로, 이상을 실현하는 기획이었다. 동시대 소비에트도 같은 꿈을 꾸었지만 오직 미국만이 결국 성공을 이뤄냈다.
어떤 연유로 오직 존 포드만이 이러한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이 작업을 소명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포드 영화의 영웅들처럼 그 또한 집단적인 이상에 격려받아 노력을 했던 것이다(그가 맥카시즘의 상황에서 세실 B. 드밀이 획책한 영화감독조합의 반공주의자 색출작업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나는 존 포드입니다. 서부극을 만들고 있죠”라고 했던 말은 유명한 일화다). 기실, 존 포드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란 이름이 없는 공동체, 서부의 땅을 평정한 무명의 병사,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이민자들, 사회를 구축하려는 작은 마을의 주민들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합중국의 건립을 도왔던 이들이다. 때론 보답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일상적인 영웅주의에 쌓인 개인에게 완수해야할 사명을 부여해 준 이들이 그들이다.
<황야의 결투>
그러므로 내게 가장 특별한 존 포드 영화의 순간들이란 인물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무덤과 묘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발생한다. 가령, <황야의 결투>(1946)에서 내가 사로잡혔던 순간은 와이어트 어프(헨리 폰다)가 막냇동생의 무덤가에서 묘비에 적힌 연도 표기를 보며 짤막하게 한탄할 때였다(#사진1). “그래, 18년을 살았구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났구나. 너 같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마을이 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란다.” 툼스톤은 악당들의 말에 따르자면 ‘서부에서 무덤이 가장 많은 동네’이다. 전직 보안관이었던 와이어트 어프는 동생의 무덤 앞에서 다시 총을 들기로 약속한다. 바로 전까지 그는 툼스톤의 보안관이 되어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솔깃한 제안을 거절했던 터이다. 그는 총을 내려놓았다. 무덤과 폐허, 죽음의 이미지들과 어둑한 밤의 시간에 저 멀리 모뉴먼트 밸리가 보인다. 어린 동생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무덤 앞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맹세는 그러므로 몇 가지 서로 다른 시간들의 연결을 작동시킨다. 영화의 배경은 1880년대 초반.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46년이다. 포드가 2차 대전에 참전한 이후에 만들어진 첫 번째 영화다. 동생의 죽음은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던가.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에서 그러나 죽음은 여전하고, 은퇴한 보안관은 다시 총을 들어야만 한다.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몇 가지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의문이 거기에 있다. 그는 형제의 복수를 위해 총을 다시 들었지만(<역마차>(1939)에서 존 웨인이 총을 들었던 것도 형제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 복수를 좀 더 공적인 차원해서 진행하기 위해서는 보안관의 배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덤 앞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맹세는 보다 진전된 미래를 위한 것이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청년 링컨>(1939)에서 링컨을 연기한 헨리 폰다가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도 무덤 앞에서이다(#사진2). 링컨은 사랑하던 여인의 무덤 앞에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무덤 앞에서 그는 세상을 떠난 이들과 매장된 희망과 약속, 어떤 결심과 약속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도래할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무덤 앞에서 매장된 희망이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쳥년 링컨>
<황야의 결투>에서 무덤의 이미지가 일종의 은유였다면, 비교적 그의 초기작인 <순례자여행>(1933)에서는 전쟁의 폐허를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여인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들을 전쟁에 내몬 한 여인이 전사자의 무덤을 찾아가는 극적인 순간이 있다(#사진3). 그녀는 고집불통의 초로의 미망인이다. 그녀는 아들을 1차 대전에 참전시키는데, 때마침 아들은 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와의 연애를 달갑지 않게 여겼고, 모성의 질투에 눈멀고 이상한 애국주의에 사로잡힌 그녀는 아들을 전선에 내보낸다. 몇 개월 후, 아들은 프랑스 전선에서 명예의 전사를 하고, 그와 사랑을 나눴던 여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1차 대전 종전 10주년을 기념해 정부가 전사자들의 어머니를 프랑스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초청했던 때에 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가 아들의 묘비에 바치도록 요청한 꽃을 들고 전사자들의 무덤을 찾는다.
<순례여행>
<황색 리본>
<수색자>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무덤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남자들이지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여인들이 그 앞에 서는 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황색 리본 She Wore a Yellow Ribbon>(1949)이나 비록 묘비와 무덤은 등장하지 않지만(그런 점에서 존 웨인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무명용사에 가깝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등이 그러하다. <황색 리본>에서는 6일 후면 은퇴를 앞둔 기병대의 대장 존 웨인이 영화의 초반부에 죽은 부인의 무덤을 찾는다(#사진4). “매리 커팅 브리틀즈. 1834년, 11월 10일에 태어나, 1867년 6월 2일에 세상을 떠나다.” 그녀의 무덤 앞에서 존 웨인은 영원히 군대라는 건 변하지 않을 거라며 그가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경을 고백한다. 아마도 서부로 가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할 것이며, 오늘은 조지 커스터의 기병대가 모두 몰살했다는 슬픈 소식이 있었다고 말한다.(존 웨인의 이미 <아파치 요새>(1948)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었다. <아파치 요새>는 동부에서 온 기병대 장교인 서스데이(헨리 폰다)와 ‘아파치 요새’의 실세인 요크(존 웨인)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보여주는 서부개척의 신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일찌감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화의 진위성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인종주의자인 서스데이는 자신의 진급을 위해 무리하게 아파치 일당과 대결을 벌이다 장렬하게 산화하는데, 사실 이 죽음은 영화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무리한 시도 끝에 벌어지는 어리석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서스데이의 보잘 것 없는 무용담은 거대한 신화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를 존 웨인은 말을 삼가면서 묵인한다. 존 웨인이 그릇된 현실의 조작된 신화를 수용하는 것은 그가 비루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그것의 응집을 위해 이러한 거대한 신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덧붙여 전쟁을 다루지만 전쟁을 회피하려는 몸짓으로 가득한 <기병대>(1959)의 특별함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그는 이어 부인의 묘비 앞에 물을 붓는데, 이 순간 묘비명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시클라멘 꽃을 가져온 젊은 여인 댄드리지이다. 그녀는 아침에 있었던 작은 소동극에 대해 사과하고 부인의 무덤에 놓을 꽃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녀가 떠나고, 존 웨인은 예의 무덤 앞에서 댄드리지가 자신의 부인처럼 착한 여인이라 되뇐다. 존 웨인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댄드리지의 결혼 후에 그녀에게서 받은 노란 꽃을 받아 무덤으로 향한다. 아마도 무덤에 바쳐진 꽃에 대해서 말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이 <수색자>(1956)에서 어린 데비가 무덤에서 스카의 그림자를 보는 장면과 형상적으로 조응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더 먼저일 것이다(#사진5). <황색 리본>에서의 여인의 등장이 죽은 여인에 대한 박애적인 표현이었다면, <수색자>에서의 그림자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이 두 장면이 기묘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존 포드 영화의 미스터리이다.
<리버티 밸러스를 쏜 사나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무덤과 묘비가 등장하지 않는, 하지만 가장 강렬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단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일 것이다. 이 영화는 서부극으로 칭하기엔 꽤나 심심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가 배경에서 사라졌고, 도박장이나 목장, 술집 같은 남성적인 공간들도 희미해지더니 부엌, 집, 학교, 법정 등의 공간이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포드적인 공간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란 그러므로 존 웨인이 술에 취해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다. 집도 법도 없는 무법자인 리버티 밸런스와는 달리 톰(존 웨인)은 이미 집이 있고, 또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한 사람이다. 단지 그에게 없는 것은 여인이다. 그가 집을 불태워 버리는 순간은 그러므로 여인을 잃은 것만이 아닌 그 자신이 거주할 곳을 버리는 행위이다. 집을 불태우는 것은 <수색자>에서 존 웨인이 최종적으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격렬한 감정의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기호로 등장하는 주목할 만한 것은 선인장 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할리는 모자 상자처럼 생긴 상자를 들고 있다. 처음에는 그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톰의 관 위에 선인장이 놓이게 되면서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이 선인장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사진 6,7). 이 장면은 처음에 예고되긴 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랜섬이 인터뷰를 하러 간 동안 할리는 마차를 타고 불타버린 톰의 집으로 가는데, 거기서 만발한 선인장 꽃을 보게 된다. 과거의 회상장면에서, 톰은 자기 집 옆에 있던 선인장 꽃을 선물로 할리에게 주는데, 할리는 부엌 옆의 정원에 그것을 심어놓는다. 나중에 그 꽃을 보며 랜섬은 할리에게 진짜 장미를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할리가 장미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여기에 댐에 만들어지고 물이 들어오게 되면 다양한 꽃들이 필 것이고 그때 장미를 볼 수 있게 될 거다”라 이야기한다. 여기서 장미와 선인장 꽃은 할리와 랜섬, 톰과 연결되어 있다.
<아일랜드의 연풍>
<아일랜드의 연풍>
<아일랜드의 연풍>(1952)에서도 꽃은 종종 남성과 여성의 정신적, 감정적 교감이 이루어질 때 하나의 기호로 등장한다. 영화의 첫 부분에 고향을 찾은 존 웨인의 어머니의 내레이션은 장미를 언급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된 설정도 집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어두운 과거를 숨긴 존 웨인은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와 어머니 집을 방문해 새롭게 삶을 시작하려 한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새롭게 집을 건설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후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의 파괴된 집과는 꽤 대조적인 예외적인 영화다. <황야의 결투>가 그러하듯이 시대적 설정만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된 영화로(존 포드는 이 영화 전에 <이것이 한국이다>(1951)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전쟁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코믹한 이야기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날카로운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존 웨인은 전직 권투선수로 사람을 죽였던 어두운 과거를 지녔지만 이는 마치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미군 같다는 인상이다. 영화의 거의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들 중의 하나는 존 웨인이 처음 등장할 때 화면의 전경을 차지하는 십자가이다(#사진8). 나중에 우리는 이 십자가와 동일한 형상을 그가 모린 오하라와 데이트를 하는 장소에서 보게 된다(#사진9). 존 웨인은 그녀에게 “이런 무덤가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무덤에서의 이상한 만남. 어둠 속에 놓였던 남자, 무덤가를 배회하던 남자가 그 어둠 가운데 밝은 빛으로 등장한 여인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긋난 시간성,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교차로 이루어진 무덤과 묘비에 대한 더한 설명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이상한 이미지들 앞에서 짧은 생각을 해보는 수밖에는 없을 뿐이지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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