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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어쩌면 악마가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본문

영화일기

어쩌면 악마가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Hulot 2019. 12. 30. 18:30

“당신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들, 그 길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 모두가 나는 무섭다. 왜냐하면 정말-그리고 나는 이것에 대해 깊이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그 누구도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정말 알지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런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행동은 보통 2차 세계대전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비극으로 끝난다. 나는 스탈린과 히틀러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 키에슬로프스키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건들을 기록하지 않아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너무 지겹겠죠. 다큐멘터리는 항상 실제 사건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제작자의 탐구이죠. 이게 다큐멘터리이죠. 그래서 ‘데칼로그’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없어요. 아무 것도 실제로 일어난 건 아니고 모두 지어낸 것들이죠. 그래서 다큐멘터리와는 공통점이 없어요. 한편으론 폴란드에서 이 시리즈는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었죠. 이 시리즈는 전혀 다큐멘터리가 아니죠...’데칼로그’ 전편에 나오는 어떤 가장 사소한 요소[사건]들도 실제일 수 있지만, 당시의 많은 폴란드인들이 그러한 사건들은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느꼈죠. 게다가, 모두 불가능한 이야기들이고, 모든 게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했죠. 아니면, 보다 비하하는 어조로 표현을 하자면, 믿을 수 없고 지어낸 이야기이고 따라서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다분히 경멸적이었죠.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데칼로그’를 볼 수도 있어요.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이라고 했는데, 이야기는 픽션이고, 연기자들이 극중 인물들을 연기했고, 눈물도 글리세린을 발라서 일부러 자아낸 것이지만, ‘데칼로그’는 한 시대에 대한 일종의 기록이자 한 시대의 체감 온도이죠.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 키에슬로프스키

만났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만났음에도 그것을 지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엇갈리는 이야기를 장대한 테피스트리에 짜는 작업이 <데칼로그>의 탁월한 성취라면, 5편은 이의 확실한 예화이다. 우리는 세 인물의 움직임의 선들이 엇갈리며 비극을 형상화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이상주의자 피오트로, 평범하고 속물적인 택시 운전사 발데마르, 그리고 무심하게 세상을 표류하는 듯한 청년 야첵이 무대의 주역이다. 무관한 세 사람의 일상은 어떤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교차하고 서로 연결된다.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는 살인이 행해지고, 이윽고 법원에서는 형이 선고되고 무심하게 사형이 집행된다. 냉정한 르포르타주 스타일로 묘사된 이 절차에 피오트로의 개입은 인간적인 목소리를 새겨 넣는다. 시작부의 내레이션은 형벌은 보복이며, 범죄 예방이 아니라 범죄자 처벌에만 집중한다면 법이 무슨 명분으로 보복을 집행하느냐고 묻는다. 도덕률에 뿌리를 둔 행동이나 가치관이 세상을 개혁한다는 피오트로의 신념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크지쉬토프 피에세비츠의 생각이기도 했다. 문제는 인간의 진정한 화합과 좀더 나은 삶을 위한 사법 시스템이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관심은 사형제에 대한 사회적 논평보다는 - 영화 개봉 후에 사형제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 그 실패의 원인을 그려내는 것에 있다(장편 버전인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는 피오트로의 내레이션이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베르 브레송이 일찍이 <어쩌면 악마가>나 <돈>에서 그린 것처럼 악이 출현하는 지평에 관한 질문이 요점이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 때문인가? 

피오트로는 최종 구두 면접에서 ‘왜 변호사가 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을 이해하고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라 답한다. 이상적인 답변이지만, 그 또한 카페에서 야첵과 엇갈렸던 것을 알아채지 못한 눈먼 존재이다. 그의 죄의식은 그러므로 다른 가능성에 관한 관계의 모럴에 근거한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야첵의 행동엔 명백한 이유가 없다. 그는 화장실에서 한 청년을 공격하고, 광장에서 비둘기떼를 몰아내고, 고가도로 위에서 돌을 떨어뜨리고, 카페의 빈 커피잔에 침을 뱉고, 창가에 서 있는 소녀들에게 음식을 던지고, 결국은 살인을 저지른다. 그에게도 다른 기회가 있었다. 가령, 야첵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죽은 여동생의 사진을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이고, 소녀의 초상을 그리는 길거리 예술가와 적절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쁜 충동들, 혹은 잔인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의 일부는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애정과 공동체를 향한 열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첵의 행동은 사회에 가하는 위협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이중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린 필터는 환경, 주변을 억압적으로 느끼게 하고, 프레임 주변을 어둡게 왜곡하는 아이리스 효과는 그의 고립과 불안감, 병든 세계의 시각화이다. 구제의 가능성은 빛과 이미지에 있다. 야첵의 질문. 당신은 사진에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는가? 1편에서, 다른 시리즈에서, 그리고 <세 가지 색: 블루>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테마이다. 이는 단지 순수성의 상실만은 아닌,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는 사람으로부터 그가 남겨둔 모든 것을 향해 발산되는 징후와 영향력과 관련된다. 키에슬로프스키 자신이 형이상학이라 말했던 것이다. 장편인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5편의 더 충실한 여분이 추가된 버전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버전도 아니다. 다른 우연과 운명이 직조된 완전히 독립적인 작품으로 봐야 한다. Hulot

“어쩌면 악마가 - 살인과 죽음, 우연과 가능세계의 변주”
일시│12월 28일(토) 오후 7시 <데칼로그 5> 상영 후
강의│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