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CINEMATHEQUE DE M. HULOT

돈, 이미지의 이면 본문

영화일기

돈, 이미지의 이면

Hulot 2020. 2. 2. 19:45

 

영화에 관한 번째 책 <시간-이미지>에서  들뢰즈는돈은 영화가 겉면에서 보여주고 조합하고 있는 모든 이미지들의 이면에 있다.” 말했다.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1982)에서 언급한영화의 상태 그러한데, 최근 마틴 스콜세지는 인터뷰에서 비슷한 상황을 전했다. “슬프게도, 상황은 이제 분야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세계적인 시청각 오락이 있고, 그리고 다른 곳에 시네마가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이따금 겹치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한쪽의 돈의 우위가 다른 쪽의 존재를 소외시키고 심지어 무시하는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콜세지 발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 산업만이 아닌 문화의 영역에까지 돈의 지배, 중심과 주변의 확연한 분리, 예술의 주변화와 구석으로 몰린 영화들, 그런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을 무시하는 경멸적 태도들이 있다는 지적이다. 돈은 예술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소개한 키라 무라토바 또한 <영원 회귀>(2012)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지금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고,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포기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앞으로 이상 영화를 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상의 이유만은 아닙니다. 아마도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언가가 끝났고, 이상 하고 싶지 않고, 많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가 싫어했던 , 영화에 수반하는 모든 , 그것은 본디 일이 아닌 것이지만, 오늘날 그들이 말하는 (영화)산업에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산업이라 하지 않고 그저예술이라 부르며 익히던 시절조차, 이런 것들은 지금과 다름없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견뎌내고, 비켜서 왔습니다. 일을 좋아했던 나머지 속에서 역겨워하는 모든 것을 척했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일에 대한 사랑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것은 어떻게든 끝난 것입니다. 나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돈이 영화를 침식하는 오래된 저주라고 새삼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운동과 시간을 대체하는 영상을 사회에 유통시키는 예술로 영화가 등장했지만, 영상이 돈을 회수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 자본 순환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종종 간과할 때가 있기 때문에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2014)에서호스만이 아니라머니 말해야 한다. 문제는 문화 혹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특유의 긴장 없이 전일적으로 돈의 지배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평 잡지라 해서 자유롭지 않다.

이미 2006년에 비평가 아드리안 마틴은영화 잡지의 책임이라는 글에서 웹사이트 영화 잡지가 넘지 말아야 선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에 관한 글들을 게재하거나 광고를 끌어들이는 일을 언급한 있다. 광고를 허락하는 순간 당신은 타협하기 시작하고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광고비는 자본의 파괴의 힘과 함께 제공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힘과 그것의 유일한 목표는 팔리고, 자신을 확장하며, 사회적 합의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생각이다. 비즈니스에 순응해야 하는 압력은 권력도 정치도 아닌 돈의 힘에 있다. 반문화로서 대안적인 극장 운동을 전개한 시네필 소사이어티도 이미 1960년대에 동일한 질문에 봉착했다. 가령, 1963 에이모스 포겔은 뉴욕의 필름 소사이어티인시네마 16’ 17년의 운영을 마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모든 창조적 격동들에, 이를테면 열성적인 관객들에(그들 대다수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위해 나아갔다), 수입이 부족하거나 보잘것 없는 상업적 생산에 먹혀 그들의 목표가 먼지가 되어버린 수많은 인디펜던트들의 창조적 격동에 경탄한다. 나는 현재 세대의 영화제작자들이 많은 기회들이 있지만, 무언가의 판매에 이용될 없다면 자유로운 개인적 창조성에 적대적인, 고도로 통합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한 비통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윤 동기와 상업적 의무라는 틀에서 벗어날 있을까?” 에이모스 보겔의 선택은 시네필 소사이어티를 멈추고 뉴욕영화제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립영화관보다는 영화제가 돈을 끌어들이기 쉽고, 인정받기도 좋은 편이다. 물론 영화제와 관련해서도 나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해 6, 미국의 웹매거진 『인디와이어』는영화관들이 앞으로 10 동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특집 기사에서 다양한 독립 영화관 관계자들의 의견을 보도한 있다. 흥미롭게도 낙관적 전망을 읽을 있는데, 이는 『뉴욕 타임즈』가 할리우드 산업 관계자들의 비관적 목소리를 전했던 것과는 다른 태도다. 원래 영화는미래 없는 발명이었던 . 거대 멀티플렉스 체인 극장과 넷플릭스, 여기에 디즈니+, 애플+, 워너미디어 등의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가 가세할 경우 스트리밍 시장과 극장 간의 분투가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예술로서의 영화의 쇠락을 비관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지배하는 경제적 조건과 예술적 작업의 조화를 시도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키에슬로프스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하는 이유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기회를 가질 있다는 사실은 충분한 이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내적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Hulot

* 격월간 「시네마테크」 제 169호. 2019 

'영화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시간, 다른 곳으로의 창문  (0) 2020.02.02
영화는 교환 없이는 불가능하다  (0) 2020.02.02
칼리가리 백주년  (0) 2020.02.01
슬픔의 도시 -비정성시- 30주년  (0) 2020.01.29
펠리니 백년 - 백인 추장  (0) 2020.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