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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영화는 교환 없이는 불가능하다 본문
테니스 애호가였던 세르주 다네는 자신이 서브보다는 되받아치기(리턴)에 능숙한 비평가라 말했다. 고다르가 지적했듯이 테니스 경기의 서브와 리시브는 숏/리버스 숏의 영화의 원리와 닮았다. 요점은 교환에 있다. 교환 없는 영화란 없다. 영화 촬영 또한 대상, 사물에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행위라는 점에서 교환이 발생한다. 교환이 성립하려면 영화(혹은 이미지)가 테니스 경기처럼 둘 사이의 단절의 공허를 통과해야만 한다. 임흥순과 모모세 아야의 <교환 일기>가 특별한 것은 두 작가가 영화에 그런 ‘교환’을 가져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절(단지 현재의 한일 관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에 접속의 흐름을 시도한 작품이다. 두 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서로 건네주는 것만이 아닌,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되돌려준다. 영상을 각자 촬영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상을 수용해 리시브하면서 영화를 완성해가는 작업이다. 작가가 타인의 영상을 수용하고 되돌려주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교환이란 궁극적으로 무언가 하나가 된다-접속 과잉의 시대에 만연한 집단적 동조-는 것과는 다른,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단절을 넘어 접속을 시도하는 행위이다. 이런 방식의 영상 교환은 이미지의 확언이나 간편한 추론에서 벗어나 원래 그 영상에 붙어 있던 맥락과 의미를 완만하게 변경시켜 새로운 관계성-민족, 국가의 공동의 속성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시민성의 트랜스 내셔널한 형식을 구성하는 시도-의 구축을 시도한다. 두 작가의 교환 작업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나아갈지 기대할 일이다.
‘교환’은 다무라 마사키 촬영감독과 젊은 감독들의 공동 작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90년대 이래로 일본 영화의 혁신을 시도한 젊은 감독들은 다무라 마사키 촬영감독과의 협업에서 영화의 길을 새롭게 찾을 수 있었다. 비밀은 이들 간의 교환이라는 예외적 실천에 있다.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들려준 하나의 예를 들고 싶다. <듀오>의 후반부 장면에서 재회하는 두 남녀를 촬영할 때 그는 공간이 너무 어두워 조명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고심했다. 이때 다무라 촬영감독은 그에게 “음, 그래도 뭔가 찍히겠지”라면서 ‘그냥 찍히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이런 식의 태도가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작위적인 행위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찍어내는 카메라의 기계성 사이의 긴장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다무라와의 공동 작업에서 카메라를 열어 놓는 것으로 타자성이나 타자에 대한 감각의 개방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무라와 아오야마 신지의 공동 작업에서도 그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의 교환은 90년대 이후 일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결정한 사건이 되었다.
영화 상영 또한 교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보여주려는 몸짓과 그것을 수용하는 몸짓이 교환되어야만 한다. 이 둘 사이에 차질이 발생하기도 한다. 원래 몬테이로 감독의 대표작들을 함께 상영할 계획이었던 “2019 포르투갈 영화제”는 포르투갈 시네마테크의 내부 사정으로 필름 대출이 불가능해 취소됐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필름 외에는 극장에서 상영할 방법이 없는 - 극장 상영을 꼭 고집하지 않는다면 손쉬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 작품들이 여전히 많다. 모든 작품이 디지털로 전환된 것은 아니다. 가령, 35mm 필름으로 공개됐던 페드로 코스타의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는 현재 극장에서 상영 가능한 좋은 상태의 프린트가 없고, 디지털 마스터링을 하지 않아 극장 상영이 불가능하다. 당초 사후 10주기를 맞아 계획했던 “야스민 아흐마드 전작 회고전”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미 수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소개한 <묵신>이나 <탈렌타임> 등의 기상영작 외에 다른 작품들은 필름 프린트로 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 대부분이 좋지 않은 상태이며 저작권 문제도 있어 현재로서는 극장에서 상영이 불가능하다. 일찌감치 작품들을 수입, 개봉해 올해 10주기 특별전을 개최한 일본의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다.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해 볼 일이다. 다만, 지난 4월 러시아영화제를 하면서 언급했던, 지난해 세상을 떠난 키라 무라토바 감독의 회고전은 우크라이나 도브젠코 센터의 도움으로 10월 30일부터 개최된다. 자막 번역 등의 난관이 여전히 있지만 11편을 처음 소개하는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됐다. 그녀는 평생 러시아의 이방인으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와 비견되는 금기에 저항한, 탁월한 반골 기질의 작가다. 늦었지만 이 특별한 작가와의 첫 만남을 극장에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언제 그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지난해 8월, 뉴욕 시네필의 명소였던 “파리 시네마”의 폐관 시에 부고 기사처럼 쓰여진 글귀는 단순한 진실을 말해준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즐기세요. 왜냐하면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다.’ (Hulot)
* 격월간 「시네마테크」 제 168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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