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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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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다른 시간, 다른 곳으로의 창문

Hulot 2020. 2. 2. 19:47

70년대 이래 벤더스의 문제의식은 이러했다. 이상 영화에서 도움을 얻을 없다. 점점 영화들이 광고의 트레일러처럼 되고 있다. 의미 없는 이미지들의 범람 앞에는 텔레비전이 있고, 그것이 뿜어내는 것은 광학 독소들이다. 이미지와 적대적인 시대(혹은 적대적 이미지의 시대) 시작하고 있다. 세상은 점점 영화 없는 세계가 되고 있다. 텔레비전과 소비(생산이 아니라!) 시장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 관객이 아니라 소비자의 품평과 기호가 지배하며 자기 말을 반복하는 세계. 벤더스의 상황 인식은 이미지를 통한 세상과의 접촉이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의 앨리스>(1973)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촬영하는 필립은사진을 촬영하는 것은 증명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말하지만 완성된 사진과 현실의 비교에서 접촉의 불안은 쉽게 진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사진 촬영을 멈추지 않는다. 벤더스의 사진은 로버트 프랭크가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지, 신선한 공기의 호흡이 되어 다른 시간, 다른 곳으로의 창문이 이라 했던 다른 기획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성질이 그러하다. 원래 필름 위의 이미지는 빛이 바래는 것을 막을 없다. 물리적인 퇴색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영화에 대한( 영화에 대한 지나친 환대와 격렬한 부정까지 포함해서) 태도, 혹은 우리의 시선 또한 바랜다. 카메라의 시선은 보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시선에 담긴 이미지들은 흘러 지나가는 현재로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그리하여 부정의 어법은예전만큼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요라던가 나아가이제 이상 극장에서 그런 영화를 찾지 않아요라는 식이다.

<베를린 천사의 >에서 천사가 불멸과 영원을 포기했던 것처럼, 영화가 모두 영원 불멸의 명작일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이미지의 흐르는 시간에 몸을 담근 우리들 또한 변모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변했어요. 나의 시선은 이상 쪽을 향하지 않아요. 나의 발걸음이 이상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죠.’라고. 벤더스는 불멸을 꾀하는 대신 빛이 바랜 흑백 필름으로 무심코 지나쳐 풍경과 거리, 시간을 담아내는 것을 이미지의 윤리로 생각했다. <사물의 상태>(1982) 후반부,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안에서 사람들은 한때 아름다운 흑백 영화의 시대가 있었다고 토로한다. <그들은 밤에 산다>(니콜라스 레이) 혹은 <그들은 밤에 달린다>(라울 월쉬). 앞쪽 유리창으로는 아름다운 거리의 광경이 우리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져간다. 벤더스는 그것이 영화의현재라고 보여준다. <도시의 앨리스> 할머니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버려진 집들을 보며 앨리스는 아름다운 오래된 집들이 허물어질 같아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슬픔은 역설적이다. 벤더스의 이미지는 실은 그런 사라질 것들이 제대로 지나갈 권리를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멸이 아니라 덧없이 스쳐 지나가버릴 시간을 담아내려 했던 시선을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에서, 셜리 클라크의 <커넥션>에서, 그리고 80년대 펑크 뉴웨이브 작품들에서 또한 발견할 있다

벤더스는광학 독소 시대에(아마도 지금은 더할 것이다), 책임 있는 작가가 그러하듯 사물을 좋은 안에서 다시 나타나게 가능성에 대해 고심했다. 그가 작업과 관련해 인용 했던 세잔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여전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무언가를 보고 싶으면 서둘러야 해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어요.”

* 격월간 「시네마테크」 제 167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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