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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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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cinema sospeso

Hulot 2020. 6. 2. 21:57

도쿄에서 만났던 한 친구에게서 얼마전 연락이 왔다. 몇년전 도쿄 방문시에 평소 흥미롭게 보고 있던 웹진 indieTokyo의 멤버들과 함께 자리를 했고, 이런 저런 영화 이야기와 일본 미니시어터의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 친구는 얼마전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에 ‘영화관’이란 주제로 짧은 글을 부탁했다. 코로나 19 확산 이후, 일본의 미니시어터도 힘든 상황에 처했고,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떠한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조금 망설였지만, 극장의 빈 자리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극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지금처럼 빈 자리가 많은 상황이 꽤 거북하고 난처한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기억하건대 나는 가급적 스크린이 크고 빈 자리가 많은 극장을 좋아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빈 좌석 많은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봤던 좋았던 기억들이 많다. 북새통을 이루고 법석이는 극장의 기억으로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빈 자리와 함께 했기에 영화가 내게 다가올 수 있었고, 그 빈자리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영화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물론, 빈 자리가 많았던 극장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지금의 상황도 그러하다. 그래서 극장의 자리가 비어 있기에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썼다. 지금 자리에 없는 이와 함께 하기 위해 맡겨둔 커피처럼(카페 소스페소), 극장의 빈 좌석을 영혼의 무게로 채워보면 어떨까. 일종의 시네마 소스페소 말이다. 극장에 빈 자리가 많은 날에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유령 관객’ 혹은 ‘나부야의 유령’처럼 그 빈 좌석에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유령들도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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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sospeso

キム・ソンウク

2月26日、ソウル・アートシネマは2週間の休館に入った。  3日前の2月23日、政府がコロナウイルスの警告レベルを「深刻」段階に格上げし、感染症の拡散防止のため、密集施設の利用制限と集団行事の自粛を勧告したからである。 劇場に休館の義務はなかったが、1月25日にコロナ感染者が確認され、シネコンが臨時休館に入り、映画館は人々に危険な場所とされ始めた。 劇場観客数が急減し、2月の月間観客数は合計734万7028人で、前年同期比67%減少。 アート・ハウス(ミニシアター)の観客も昨年比60~80%減少した。アートシアターでの感染発生が判明した事例はないものの、劇場スタッフと観客の安全と健康を考慮し休館という選択に至った。

3月初めに開催予定だった「ブルーノ・ガンツ レトロスペクティブ」は早々に6月へと延期されたが、少し前に、この企画展を年末に延期しようというメールも読んだところだ。 最近、海外の関係者とのメールのやりとりのくくりには、“Stay safe and healthy”というフレーズを加えるのが習慣になっている。 上映中の作品名の代わりに、劇場入り口の電光掲示板に“Stay Home Safe”というフレーズを掲げて休館している海外の劇場もある。 この3ヶ月の間で、「劇場に映画を見に来てください」という言葉は使いづらくなった。 まだ確定したわけではないが、7月のイベントもキャンセルあるいは延期されるだろう。 韓国の対策が正しいとしても、パンデミックの波をこの国だけで突破することはできない。

予定されていた休館期間を終え、3月中旬に同僚と上映を再開するかどうか議論し、再び劇場の扉を開くことにした。 まずはコロナウイルスによって劇場での上映機会を逃した韓国映画や海外作品を上映した。 幸い、4月中旬から計画していたジョン・カサヴェテスとシャーリー・クラークのレトロスペクティブは予定通り進めている。 シャーリー・クラークに関しては、デジタル上映素材をすべてメールでやりとりした。 定期的な予防策、入場時の発熱チェック、劇場内でのマスクの着用勧告、座席間の距離を置くため前後左右が空席になるようにして、チケット販売を行っている。  2メートルの距離を置くために、200席の劇場で実際に販売するのは実際には70席のみ。 反応はまちまちである。 少し前、ジョン・カサヴェテスの『こわれゆく女』(1974)を見に来たカップルは、お互いに離れて座らなければいけないことに不満そうだった。 一方、常連の学生は、座席間の距離を置くと前より楽に映画を見ることができると言う。ただ、こんなに空席が多くて大丈夫かと心配されたので、 人が少ないと楽で良い、と私は答えた。

それは嘘ではない。 私は人が少ない大きな劇場も好きだった。 ソウル近郊のみすぼらしい劇場で3,4人の観客とともに『楽園の瑕』(1994)を見た記憶がある。 カーテンが上がり鐘を鳴らせて映画の開始を知らせた、今はなき500席を超える劇場だ。 ジョニー・トーの『エグザイル/絆』(2006)を老夫婦と二十代の若い友人との4人で見た日もある。 寒い冬、暖房がよく効かない450席の劇場で、10人余りの観客が距離を置いてヴィスコンティの『白夜』(1957)を見た日の冷たい空気がまだ肌に生き生きと残っている。 一昨年の夏、一週間のプラハ旅行で訪れたKino Lucernaで、私は20人ほどの観光客と一緒に『マンマ・ミーア! ヒア・ウィー・ゴー』 (2018)を見た。  1907年に開館したこの美しい劇場でその時見ることができた唯一の映画だ。 前の席の観光客たちが、ABBAの代表曲が流れてくるたびに客席から立ち上がって踊って歌う姿を眺めながら映画を観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のは、とても愉快な記憶として残っている。

このように、空席の多い劇場での記憶は長く残っているものだ。 必ずしも映画館に多くの人がいることは良いことだけではない。 良い記憶はそこにいないひとの魂まで含んでいる。 デュッセルドルフから送られた後輩の風景写真の下に書いてあった「あなたがここにいなくて残念だ」という言葉のように。 真の映画的体験というのは、誰かといること、もしくは誰かがいないということだ。 どんな劇場も空席や観客がいない状態がなければ、劇場として成り立たなかっただろう。 劇場の空席は、本当に”欠けている”のではなく、すでに去った人々、あるいはまだそこに到着していない人々で満たされている。

アピチャッポン・ウィーラセタクンの書いた「Ghosts in the Darkness」(*韓国語タイトルでは「幽霊観客」)の話が頭に浮かぶ。 ある日、移動映画館の映写技師が謎の男に雇われて人里離れた庵へ映画を上映しに行く。 現地に到着した映写技師がスクリーンを設置した時にはすでに日が暮れていた。 暗闇の中、少しずつ人が到着し始める。 上映中、彼らは並んでじっと座っていて、お互いに何も言わず、映画が終わるとふわりと立ち上がってしまう。 次の日、昨夜上映したのは墓地の中であったことに気づく。 彼が雇われたのは、魂に映画を見せるためだった。 空席は見えない幽霊でいっぱいである。 いや、幽霊も映画を見たいと思っている。 最近の空席を見ていると、そんな幽霊の観客を思い出す。

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拡大により休館し、危機に瀕している劇場を支援する様々な試みがある。 劇場が休館中でも事前にチケットを購入できたりする。 映画は見たいが不安な気持ちもあり劇場には行けず、代わりに支援する気持ちで前売りを購入する人々もいる。 イタリアのナポリで始まったcaffe sospeso(カフェ・ソスペーゾ)というコーヒーの寄付活動が思い出される。 これは飲まない、あるいは誰かに預けるためのコーヒーを注文するというものだ。 このような寄付の根源には、コーヒーを飲むという行為には人類愛や友情など人と人との間で起こるすべてのことが含まれている、という認識があるのだ。 友人とコーヒーを飲むことは、つまり一緒に時間を過ごすことである。 連帯がない場合、コーヒーは存在しない。 映画を見るという行為もそれと同じだ。 今劇場に観客が来なくても、隣の席に人がいなくても、空席に想いを寄せて一緒に映画を見るのだと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 今、cinema sospesoが必要である。

韓国では実際に劇場には行かないが映画のチケットを購入することを「魂を送る」と呼んでいる。観客によっては 好きな俳優が出演した独立映画の興行のためだったり、女性映画の普及を期待して、このような応援をしている場合もある。 文字通り座席は空なのに、その場にいない魂が映画を見ることになる。 これらの観客の新しい動きに対して、これは本当の意味の鑑賞ではなく、消費活動にすぎないと一蹴する人もいる。だが、コロナ以降、休館した劇場を支援するために空席を埋めようとチケットを購入する行為は、一種の「魂の送信」ではないかと思う。だから、映画館の空席は、苦境ではなく新たな可能性でもあるかもしれない。 目の前にいる他人でなく、その場にいない見知らぬ他人と交流するための空席。 積極的に空席を作り、その場を魂で満たさなければならない。 良い映画館は空席の魂の重さで生き残る。 私はまだそう信じている。

지난 2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는 2주간 휴관에 들어갔다. 3일 전인 2월 23일, 정부가 코로나 19 바이러스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하면서 감염병 확산 차단을 위해 다중 밀집 시설 이용 제한과 집단 행사 자제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극장 휴관이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1월 25일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방문한 멀티플렉스 극장이 임시 휴관에 들어가면서, 영화관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장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극장 관객수가 급감했다. 2월 한 달간 관객 수가 총 734만702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 감소했다. 예술영화관 관객 수도 지난해 대비 60~80% 감소했는데, 확진자가 발생한 사례는 없다. 극장 휴관은 극장 스태프와 관객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한 선택이다. 

3월 초 개최 예정이던 ‘브루노 간즈 회고전Bruno Ganz Retrospective’은 일치감치 6월로 연기 됐는데, 조금 전 나는 이 기획전을 연말로 연기하자는 메일을 읽고 있었다. 최근 해외 관계자와 주고받는 메일 끄트머리에는 ‘Stay safe and healthy’라는 문구를 늘 적고 있다. 오늘의 상영작 대신 극장 입구 전광판에 ‘Stay Home Safe’ 라는 문구를 내걸고 문 닫은 해외 극장도 있다. 지난 세 달 동안 ‘극장에 영화 보러 오세요’라는 말은 금지어가 됐다. 아직 확실한 답변이 없지만, 기다리는 7월의 행사도 같은 이유로 취소되거나 연기될 것이다. 한국의 방역이 성공적이라 해도 팬데믹의 폭풍을 홀로 뚫고 나아갈 수는 없다.  

예정한 두 주의 휴관을 끝내고, 3월 중순에 동료들과 재개 여부를 논의했고,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당장은 코로나 19 감염확산으로 극장에서 상영 기회를 놓친 한국 영화와 수입 작품을 상영했다. 다행히, 4월 중순부터는 계획한 ‘존 카사베츠 & 셜리 클라크 회고전 John Cassavetes & Shirley Clarke Retrospective’을 예정대로 진행하고 있다. 셜리 클라크의 네 작품은 디지털 상영본을 모두 이메일로 전송받았다. 주기적인 방역, 입장시 발열 체크, 극장 안에서의 마스크 착용 권고, 좌석 간 거리 두기로 앞뒤 좌우 한 칸씩 자리를 비운 매표를 시행하고 있다. 2미터 거리 두기를 유지하기 위해 200석 극장에서 실제로는 70석 좌석만 판매한다. 반응은 제각각이다. 얼마 전,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의 여자こわれゆく女>(1974)를 보러온 커플은 서로 떨어져 앉아야 한다는 말에 난색을 보였다. 자주 오는 한 학생은 좌석 간 거리 두기로 전보다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빈좌석이 많아도 괜찮냐 말하고는, 내 안색을 살핀다. 사람이 적어서 나도 편하고 좋아, 라고 말했다. 

빈 말은 아니다. 나 또한 사람이 적은 큰 극장을 좋아 했다. 서울 근교의 허름한 극장에서 <동사서독楽園の瑕>(1994)을 서 너 명의 관객과 봤던 기억이 있다. 커튼이 올라가고 종을 울려서 영화 시작을 알렸던 500석이 넘던 지금은 사라진 극장이다. 두기봉ジョニー・トー의 <익사일エグザイル/絆>(2006)을 노부부와 이십 대 젊은 친구 한 명을 포함해 네 명이 봤던 날도 있다. 추운 겨울, 난방이 잘 안되는 450석의 극장에 열 명 남짓의 관객들이 거리를 두고 비스콘티ルキノ・ヴィスコンティ의 <백야白夜>(1957)를 보던 날의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피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재작년 여름, 일주일 간의 프라하 여행길에서 들린 ‘키노 루체르나 Kino Lucerna’에서 나는 스무 명 정도의 관광객들과 <맘마미아 2>를 함께 봤다. 1907년에 개관한 이 아름다운 극장에서 당시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다. 앞 자리의 관광객 몇 명이 아바의 유명곡이 흘러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는데, 꽤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빈 자리가 많았던 극장의 기억은 이렇듯 내게 오래 남았다. 영화 체험이 꼭 그 자리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좋은 기억은 부재한 사람의 영혼까지 포함한다. 뒤셀도르프에서 보내온 후배의 풍경 사진 아래 ‘당신이 여기 없어서 너무 아쉬워’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진정한 영화적 체험은 동반, 혹은 동반의 결여라는 사건이다. 빈 좌석, 결여의 관객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극장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장의 빈자리는 정말 비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떠난 사람들, 혹은 아직 거기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アピチャートポン・ウィーラセータクン의 ‘유령 관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유랑극단의 영사 기사가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고용되어 외딴 암자에서 영화를 상영한다. 현지에 도착한 영사기사가 스크린을 설치했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금씩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상영 내내 그들은 나란히 가만히 앉아 있고,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자 일어서 훌쩍 떠나버린다. 다음 날, 영사기사는 자신이 묘지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고용된 것은 영혼들에게 영화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빈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들로 가득하다. 아니, 유령들도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요즘의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 그런 유령 관객들이 생각난다. 

코로나 19 감염확산으로 극장들이 휴관하면서 위기에 처한 극장을 후원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극장이 휴관중이라도 미리 표를 구매하기도 한다. 영화가 보고 싶지만 불안한 마음에 극장에는 가지 못하고, 대신 후원하는 마음으로 표를 예매하는 이들도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작한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라는 커피 기부행위가 생각난다. 이는 주문해 놓고 마시지 않는 커피, 혹은 맡겨 둔 커피를 말한다. 이런 기부의 저변에는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인류애, 우정 등과 같은 사람 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인식이 있다. 친구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연대가 없다면 커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지금 극장에 관객이 오지 않아도, 옆 자리에 지금 사람이 없어도, 빈 자리를 생각하며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시네마 소스페소 cinema sospeso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영화표를 구매했지만, 정작 극장을 찾지 않는 행위를 ‘영혼 보내기’라고 부른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독립 영화의 흥행을 위해, 여성 영화의 선전을 기대하며 관객들이 이런 응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말 그대로 좌석은 비어 있는데,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영혼이 영화를 보는 셈이다. 이를 새로운 관객 운동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고, 진정한 의미의 관람이 아닌 소비자 운동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휴관한 극장을 후원하기 위해, 빈 좌석을 채우기 위해 표를 구매하는 행위가 일종의 ‘영혼 보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관의 빈자리는 그래서 곤경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대면의 타인을 넘어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미지의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빈자리를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빈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를 영혼으로 채워야 한다. 좋은 영화관은 빈자리의 영혼의 무게로 살아남는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김성욱 キム・ソンウク

プログラムディレクター

シネマテーク・ソウル・アートシネマ

 

https://www.filmground.net/posts/2020/5/6/cinema-sospeso?fbclid=IwAR1tgOdduFP51XcD_8G2CC6H0xz1fBxOxvI8YtyVU2vuoisZSNGr35GxF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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