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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HEQUE DE M. HULOT
클래식의 가설 본문
1940년대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를 분석한 스탠리 카벨은 이 장르를 특별히 ‘재혼 희극’이라 불렀다. 같은 반려자와의 두 번째 결혼으로 끝맺는 영화들로, 불화를 거친 커플이 서로 관계의 올바름을 재확인하는 이야기다. 조지 쿠커의 <필라델피아 이야기>(1940)가 그런 재혼 희극의 대표작이다. 이야기는 이중적 과정을 거친다. 그 하나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을 극복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확실성을 넘어서는 일이다. 재혼 희극은 그러므로 질서와 불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고, 불화를 넘어가는 창조적인 방법을 고안하게 한다. 불화를 용인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상기한다면, 이런 영화를 정치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가령 <필라델피아 이야기>의 크레딧에 차례로 등장하는 필라델피아 정치의 공공장소들, 즉 독립기념관, 자유의 종, 윌리엄 펜의 이미지는 커플의 재결합 ‘스토리’가 실은 미국적인 정치 ‘드라마’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희망의 정치는 불화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커플의 재회처럼 그 전에 불화를 용인하는, 즉 서로 믿음을 회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영화들은 클래식의 어떤 가설에 근거한 영화들이다. 특별히 고전기 시기의 작품은 개별 작품의 존립을 넘어서, 어떤 가설이 그 자체로 이들 영화의 존재 의의를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이 가설은 앞서 언급한 '재혼 희극'처럼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려 했던 일종의 약속이다. 그리하여 커플의 불화, 회의주의적 부정은 카벨이 말하듯 실은 더 강력한 확신을 숨기고 있다. 이런 희극에서 회의론의 극복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회심,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통과한다. 영화는 그럴 때 상호 신뢰의 매개체다. 세계와의 관계가 깨진 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그것이 오래전 클래식의 가설이다.
지금이라면, 이제 영화와의 관계에도 이런 가설이 적용된다. 회의론과의 투쟁의 도구인 영화가 그 자체로 회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들이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많은 영화제가 사라졌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독립 예술영화관들은 여전히 어두운 터널을 통과 중이다. 매일 우리는 영화 회의론의 다양한 시나리오와 마주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보다 2023년이 더 힘든 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피할 수 없는 상태를 가능한 한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한겨울의 클래식
2022.12.23-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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